여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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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여태후의 이름은 여치(呂雉). 당대의 유명한 관상가인 아버지 여공의 뜻에 따라 (秦)의 사수(泗水) 정장(亭長) 유방 劉邦과 결혼한다.(정장(亭長)이란 그리 높은 신분이 아니었으며, 사마천여태후본기에 ‘미천한 신분’이라고 유방을 서술했던 걸 보면 정상적인 혼인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당대의 부자였던 여태후가 이 혼인에 불만을 가질 법도 하지만, 그녀는 유방에게 최선을 다해 내조한다.
후에 유방이 패(沛)지역에서 반진(反秦) 대열에 합류하자, 그녀는 집 안에서만 유방을 보필하는 것이 아니라 집 밖에서도 유방을 보필하며, 많은 수모를 겪었다. 우선 유방(劉邦)이 망산(芒山)과 탕산(碭山) 지역에 도망쳐 숨어있을 때는 몰래 그곳을 찾아가 유방을 돕고, 『史記』卷8,「高祖本紀」) 유방(劉邦)이 수배자였던 시절에는 그녀가 감옥살이를 하기도 하였다.(『史記』卷96,「張丞相列傳」) 초한(楚漢)전쟁 중에는 유방(劉邦)이 팽성(彭城)에서 항우(項羽) 군대에게 대패하였을 때 그녀는 (楚)나라 군대에게 체포되어 그 후 초한(楚漢)전쟁이 끝나기 직전까지 2년 5개월 동안 초(楚)의 포로생활을 하다 석방되기도 하였다.(『史記』 卷8,「高祖本{紀」)
(漢) 제국이 건립되어 유방(劉邦)이 황제가 되면서 그녀는 황후가 되었는데, 한나라의 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손에 피를 묻힌다. 제왕(齊王) 한신(韓信)과 양왕(梁王) 팽월(彭越)을 주살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이 그 예이다. (『史記』卷92 ,「淮陰侯列傳」, 『史記』卷90,「魏豹彭越列傳」)

여태후의 섭정

고조 유방이 죽은 후 여태후의 아들이자 영(盈)이 즉위하였다. 고조에게는 영(盈)을 제외하고 7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고조가 죽은 후 여태후에 의해 그 중 4명이 죽음을 당하였다. 혜제가 재위한지 7년 만에 병사하자 여태후는 혜제의 어린 아들 유공과 유홍을 차례로 황제로 내세웠다. 이로써 여태후는 고조 사후 15년에 걸쳐 섭정을 시작하였다.
여태후는 자신의 일족들을 관료로 대거 등용하였다. 자신의 형제들을 열후(列侯)에 봉하고 수도와 황궁을 책임지는 북군과 남군을 자신의 일족들이 통솔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呂國을 세워 자신의 친족을 분봉하였다. 여씨일족의 권세가 다른 제후와 공신들의 권력을 압도하였다.
하지만 BC180년 여태후는 돌연히 병사하였다. 이에 여태후에 불만을 느끼고 있던 여러 제후왕들이 연합하여 여씨일족을 몰아내고 소제 유홍을 폐하였다. 그 후 고조의 서자인 代王 恒(문제)로 하여금 황위를 계승하도록 하였다.

인간 돼지, 인체(人彘) 사건

‘인간 돼지’ 사건은 여태후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사마천여태후본기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여태후는 혜제와 딸 노원태후를 낳았다. 고조가 한왕이 된 이후 다시 정도에서 척부인을 얻어 매우 총애했다. 척부인은 후에 여의를 낳았다. (중략) 고조의 총애를 받은 척부인은 고조의 면전에서 밤낮으로 울며 자기의 아들을 태자로 책봉해 달라고 애원했다. (중략) 척부인의 아들 여의는 조왕이 된 이후 일찍이 몇 번에 걸쳐 태자의 자리를 차지할 뻔하였다. 그러나 다행이도 대신들의 간언과 유후 장량의 계책으로 태자는 가까스로 폐위되는 운명을 모면할 수 있었다.'

'이후 한 고조 유방이 죽고 아들인 혜제가 즉위하자, 척부인의 위협으로 척부인에게 원한이 있던 여태후는 조왕 여의를 주살한다. 그러고 나서 척부인의 팔과 다리를 자르고 벙어리가 되게 하는 음약을 먹인 뒤 그녀를 변소에 내다 버려 그곳에서 기거하게 했다. 여태후는 그녀를 인체(人彘), 즉 사람 돼지라고 불렀다. 며칠 후 여후혜제를 불러 사람 돼지를 구경시킨다. 한참 후에야 혜제는 그것이 척부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목 놓아 울었다. 그 후로 혜제는 온종일 술과 여자에만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은 결과 병을 얻게 되었다.'

후대의 인식

전 세계의 인터넷에서 ‘중국의 3대 악녀’를 검색하면 여태후가 그곳에 항상 있을 정도로 많은 대중들이 여태후를 악녀,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여자라고 생각한다.(이는 여태후의 인체사건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는 반고에 의해 쓰인 중국 고대의 기록인 『한서』에서 잘 드러난다.

“자고이래로 국가가 문란했던 까닭은 황제가 어리고 그 어머니가 장성해서다. 태후가 교만 방자하고 음란하기 이를 데 없으면 이를 금할 수 없는 일이다. 너희들은 여태후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는가.“ -반고, 『한서』中무제의 말-

“여태후를 만나 지극한 덕이 훼손되었다.” -반고, 『한서』-

반고는 첫 번째 예시에서도 볼 수 있듯이, 여태후 생존 당시의 인물이 아닌 그 이후인 무제의 언급까지 제시하면서 여후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드러낸다. 그리고 두 번째 예시는 반고의 ‘여후 부정’의 사고를 대표한다고 생각한다. 반고가 당대의 대표적인 학자라는 점을 생각하면, 중국 당대의 이데올로기도 여후를 악녀로 생각할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이는 본인의 의견과 다소 차이가 있지만, 많은 학자들 또한 사마천이 여후를 부정한다는 점을 들어 여후를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물론 미야자키 이치사다가 여후를 부정적으로 바라본다는 점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여기서 중점은 미야자키 이치사다가 보기에 사마천이라는 학자가 여후를 부정한다는 것이다.)

사마천은 한 무제가 제위에 있을 때 한나라 초기의 이러한 역사를 써서 여후의 졸렬하고 악독한 행동을 하나도 남김없이 폭로하였다. 이는 대단한 담력과 식견이다. 사마천은 조리 있게 여러 사태를 묘사함으로써 여태후라는 반동적인 인물의 형상을 만들어 냈으며 (중략) <여태후 본기>는 한편의 뛰어난 폭로문학이다.-양중석, 「사마천이 서술한 여태후 이야기 : 《한서·고후기》와의 비교를 통한 《사기·여태후본기》 읽기」, 『中國文學』, 韓國中國語文學會, 2013, p38-

사마천은 대단한 남성편력을 자랑하던 하희와 같이 부정적인 여성들을 사기에서 주로 기록하고 있으며, <열녀전>에 나올 만한 절부의 이야기들을 거의 수록하고 있지 않았다. 어쩌면 사마천이 궁형에 처해진 후 인생관에 변화가 와서 여성에 대한 혐오나 증오의 감정을 품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상상도 하게 된다. -미야자키 이치사다, <자유인 사마천과 사기의 세계>-

대중적인 논의가 아니긴 하지만, 여태후라는 인물이 잔혹했어도 그녀의 업적이 있어 어느 정도 긍정하는 학자 혹은 대중들이 있다. 대표적인 예로 왕소군을 배경으로 한 대표적인 문학작품 <한궁추>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는데, <한궁추에서> 원제가 '"명비가 연약하고 착하다 하여 업신여기는 모양인데, 만약 옛날 여태후가 계시던 시절이라면, 누가 감히 한마디 명령인들 거역하였겠나?"'라는 대사를 볼 수 있다. 하지만 한과 흉노 간의 화친정책, 왕소군에 대한 리텔링에서 알 수 있듯이 여태후 생전 당시에 흉노는 한나라에 큰 위협을 가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리텔링'이라는 배경 하에서 여태후의 권위 혹은 능력을 증폭시킨 것이지만, 여기서 주의깊게 볼 점은 여태후가 한을 통치(섭정)했을 때 한의 백성들이 평화로운 삶을 살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여태후는 긍정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글을 작성한 본인도 위 관점을 취하고 있는데, 여태후 변호 항목에서 여태후의 업적을 볼 수 있다.)

참고 문헌

  • 사마천, 『사기』, 「여태후본기
  • 金澤中, 「呂太后와 人彘사건」, 『중앙사론』, 중앙대학교 중앙사학연구소, 2002
  • 양중석, 「사마천이 서술한 여태후 이야기 : 《한서·고후기》와의 비교를 통한 《사기·여태후본기》 읽기」, 『中國文學』, 韓國中國語文學會, 2013
  • 미야자키 이치사다, <자유인 사마천과 사기의 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