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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대 [[위]](魏)나라 출신의 정치가, 군사가이다. 성은 범(範)이고 이름은 한자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저(雎) 혹은 수(睢)로 다르게 읽을 수 있고, 다른 이름으로는 장록(張綠)이 있다. 위왕을 섬기고자 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진]](秦)나라로 넘어가 [[소양왕]](昭襄王)에게 [[원교근공책]](遠交近功策)을 제안하여 진의 영토를 넓히고 강대국으로 만드는데 일조했다. | 전국시대 [[위]](魏)나라 출신의 정치가, 군사가이다. 성은 범(範)이고 이름은 한자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저(雎) 혹은 수(睢)로 다르게 읽을 수 있고, 다른 이름으로는 장록(張綠)이 있다. 위왕을 섬기고자 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진]](秦)나라로 넘어가 [[소양왕]](昭襄王)에게 [[원교근공책]](遠交近功策)을 제안하여 진의 영토를 넓히고 강대국으로 만드는데 일조했다. |
2018년 6월 26일 (화) 19:34 기준 최신판
범저(範雎) | |
---|---|
출생 |
? |
사망 |
B.C 255 |
생존시기 | 전국시대 |
목차
개요
전국시대 위(魏)나라 출신의 정치가, 군사가이다. 성은 범(範)이고 이름은 한자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저(雎) 혹은 수(睢)로 다르게 읽을 수 있고, 다른 이름으로는 장록(張綠)이 있다. 위왕을 섬기고자 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진(秦)나라로 넘어가 소양왕(昭襄王)에게 원교근공책(遠交近功策)을 제안하여 진의 영토를 넓히고 강대국으로 만드는데 일조했다.
생애
위나라에서 고난을 겪다
범저는 위왕을 섬기려 했으나 집안에 돈이 없어 활동할 경비를 마련하지 못하여 일단 위나라 중대부인 수고(須賈)의 밑에서 일을 하였다. 위나라 소왕이 수고를 제(齊)나라에 사신으로 파견했을 때 범저도 수고를 수행하며 제나라로 들어갔다. 그들은 몇 달 동안 머물고 있었는데, 이 때 제나라 양왕(襄王)이 범저가 뛰어난 인재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에게 황금, 술, 고기를 보냈다. 범저는 이를 거절했지만, 이러한 사실을 안 수고는 범저가 위나라의 비밀 사항을 제나라에 보고한 대가로 선물을 받았다고 생각하였다. 위나라로 돌아간 후, 수고는 위나라 재상인 위제(魏齊)에게 이런 사실을 보고하였고 크게 노한 위제는 범저를 잡아들여 심하게 문초하였다. 범저가 죽은 체하자 문초하던 사람들은 그가 죽은 줄 알고 대나무 발에 말아 변소에다 버렸다. 틈을 타서 도망간 범저는 위나라 사람인 정안평(鄭安平)과 함께 숨어 살면서 이름을 장록(張綠)으로 바꾸었다.
진나라의 재상이 되다
진나라 소양왕이 신하 왕계(王稽)를 사신으로 명하여 위나라에 보냈을 때, 정안평은 포졸로 위장하여 왕계의 시중을 들었다. 왕계는 위나라의 인재 중에서 진나라로 들어가서 유세할 만 한 인물이 있느냐고 물었고, 이에 정안평은 범저를 추천했다. 범저는 우여곡절 끝에 왕계와 함께 진나라 도성인 함양에 도착하여 소양왕을 만나게 되었다. 왕계가 범저를 소개했음에도 불구하고 소양왕은 그를 눈여겨보지 않았고, 그 후 일 년이 넘도록 그를 찾지 않았다.
당시의 진나라 조정의 요직을 선태후의 일가가 장악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권세가 소양왕을 능가할 정도였다. 선태후의 동생인 양후는 장군 백기(白起)를 앞세워 자신의 봉지를 더욱 넓히려고 욕심을 냈다. 범저는 이에 상소를 올려 자신같은 인재를 등용하기를 호소하였다,
“ “신은 집안을 부유하게 할 사람은 나라에서 취하고, 나라를 부유하게 할 사람은 제후들에게서 취한다고 들었습니다. 천하에 영명한 군주가 있으면 제후들이 마음대로 부유해질 수 없는데 왜 그렇겠습니까? 군주가 제후의 권력을 나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의사가 환자의 생사를 알듯이 성군은 일의 성공과 실패를 잘 살펴서 이익이 되면 실행하고 손해가 되면 버리며, 의심스러우면 작게 시험해봅니다. 이는 순이나 우 임금이 다시 살아난다 해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정말 하고 싶은 말은 신이 감히 글에 담지 못했으며, 천박한 말들은 또 들으시기에 부족할 것입니다. 신이 어리석어 왕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입니까, 아니면 신을 추천한 사람이 천해서 믿을 수 없으신 것입니까? 그런 것이 아니라면 신은 (왕께서) 한가한 틈을 타서 잠시 얼굴이라도 뵙길 원하옵니다. 단 한 마디라도 쓸모가 없으면 도끼날에 엎어질 것입니다“[1]
”
소양왕은 이를 읽고 범저를 이궁(離宮)으로 모셔오라 명하였고, 범저에게 세 번에 걸쳐 무릎 꿇고 사과하며 가르침을 부탁하였다. 이에 범저는 소양왕에게 ‘원교근공책’에 대하여 언급한다.
“ “대왕께서는 멀리 있는 나라와는 우호 관계를 맺고 가까이 있는 나라를 공략하도록 하시길 바랍니다. 즉 원교근공(遠交近功)의 정책입니다. 그렇게 하여야만 전쟁으로 얻은 한 치의 땅도 대왕의 온전한 영토가 되는 것입니다.”[2]
”
소양왕의 신임을 얻어가던 범저는 양후의 권력을 견제해야 한다는 조언을 하고, 소양왕은 즉시 태후를 폐출하고 양후의 세력을 함곡관 밖으로 퇴출하였다. 진 소왕 41년에 소양왕은 범저를 재상으로 임명하고 응(應) 땅을 봉지로 하사하였는데, 범저는 그때부터 응후(應侯)로 불렸다.
원한을 갚다
재상이 된 범저는 자신을 모함하고 죽음의 문턱까지 이르게 한 위나라를 정벌하기로 하였다. 당시 범저는 이름을 장록으로 바꾸었기 때문에 위나라에서는 범저가 이미 죽은 지 오래라고 여겼다. 진나라가 위나라를 공격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은 위나라에서는 수고를 사신으로 보냈다. 범저는 신분을 감추고 남루한 옷차림으로 수고를 찾아갔다. 수고는 범저를 불쌍하게 여겨 솜옷 한 벌을 주고 진나라 재상 장록에 대해 물었다. 범저는 장록을 만나게 해주겠다며 수고를 수레에 태워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뒤늦게야 범저가 장록임을 알게 된 수고는 머리를 조아리며 용서를 빌었다.
범저는 수고의 죄를 첫 번째, 범저를 제나라 간첩이라고 허위로 고발한 것, 두 번째 , 위제가 범저를 매질하고 변소에 버릴 때 말리지 않은 것, 세 번재, 변소에 버려진 범저의 몸에 오줌을 눈 것을 들었다. 하지만 수고를 죽이지는 않았다. 수고가 위나라에 돌아가기 전 작별인사를 하러 범저에게 찾아가자, 범저는 각국의 사신들을 초청하여 큰 연회를 베풀었다. 범저는 그 자리에서 수고를 단 아래에 꿇어앉히고 수고의 앞에 콩과 볏단을 놓아 수고가 말처럼 그것을 먹게 하면서 위왕에게 위제의 목을 당장 가지고 오지 않으면 대량성을 공격할 것이라고 전하라고 하였다. 수고가 돌아가서 이를 위제에게 말하자 위제는 두려워 조나라로 달아나 평원군(平原君)의 집에 숨었다.
범저가 재상이 된 지 2년째 되는 해, 진나라는 동쪽으로 한의 소곡(少曲)과 고평(高平)을 차지했다. 소양왕은 위제가 평원군의 집에 숨어있다는 소식을 듣고 범저의 원수를 갚아주기 위해 평원군을 자국으로 불러, 위제를 죽이지 않는다면 진에서 나갈 수 없을 것이라고 협박했다. 이에 조 효성왕(孝成王)은 평원군의 집을 포위했고, 위제는 몰래 빠져나와 조나라의 재상 우경(虞卿)과 함께 멀리 도망쳤다. 우경은 신릉군(信陵君)의 주선을 받아 초(楚)나라로 달아나려고 했지만, 신릉군은 이 소식을 듣고 머뭇거렸다. 위제는 신릉군이 자신을 만나려 하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는 분노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조왕은 위제의 목을 진나라로 보냈다. 소양왕은 그제야 평원군을 조나라로 돌려보냈다.
자리에서 물러나다
진 소왕 48년, 진나라와 조나라는 장평(長平)에서 전쟁을 하고 있었다. 당시 범저는 장평 대전의 분위기를 조나라 쪽으로 이끌고 가던 조나라 명장 염파(廉頗)를 자신의 계략으로 해임하고 무능한 조괄을 조나라 장군으로 임명하게 하여 전쟁을 진나라의 대승으로 이끌었다. 얼마 후 범저는 장평대전을 승리로 이끈 장군 백기와 의견 차이로 사이가 나빠졌다. 조나라를 계속하여 공격하자는 백기의 의견을 무시하고 전쟁을 멈추었기 때문이다. 그 후 다시 벌어진 조나라와의 전투에서 백기가 고의로 출정하지 않자 그를 모함하여 죽였다.
또다시 벌어진 조나라와의 전쟁에 범저는 정안평을 출정시켰지만, 정안평은 전투에서 조나라 군대에 포위당하자 군사를 데리고 조나라에 투항하였다. 진나라의 법에서는 죄를 지은 사람과 그를 천거한 사람 모두 똑같은 벌을 받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범저는 죄받기만을 기다렸다. 소양왕은 범저의 죄를 묻지 않고 평소보다 더 많은 음식물 등을 내려 그를 위로하였다. 하지만 2년 뒤, 범저가 천거한 왕계가 하동 군수로서 다른 제후와 내통하다가 적발되어 처형되었다.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자 범저는 더욱 두려움에 떨게 되었다.
이 무렵 연(燕)나라 사람 채택(蔡澤)이 조나라, 한나라, 위나라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고 떠돌다가 진나라로 들어왔다. 채택은 사람을 시켜 천하의 뛰어난 유세가인 채택이 범저를 내치고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는 소문을 내게 했다. 소문을 들은 범저는 화를 내며 채택을 잡아오도록 했다. 하지만 범저는 채택과 이야기를 나누며 권력에 대한 자신의 욕심이 지나쳤음을 깨달았다. 며칠 뒤 조정으로 들어가 소양왕에게 채택을 천거하였고, 소양왕은 그 능력을 알아보고 고문으로 임명했다. 범저는 그 후 병을 핑계 삼아 사직을 청하였고, 채택은 진나라 재상의 자리에 올랐다.
범저의 죽음
이상은 『사기』 「열전」의 「범저채택열전」의 내용이다. 범저가 사직한 이후에 대해서는 기록이 전해지지 않았는데, 1975년 발굴된 『수호지진간』(睡虎地秦簡)의 기년(紀年) 부분에 “소왕 52년, 왕계, 장록이 죽다.(王稽張祿死)” 라는 기록이 있다. 이를 토대로 범저가 기원전 255년에 죽었다고 알려지게 되었다.
평가
- 사마천(司马迁)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한비자가 ‘옷소매가 길어야 춤을 잘 추고, 밑천이 많아야 장사를 잘 할 수 있다.’고 했다. 믿을 만한 말이다. 범수와 채택은 사람들이 말하는 ‘일체(一體)변사’들이었다. 그럼에도 여러 나라를 돌면서 백발이 되도록 기회를 못 잡은 것은 계략과 전술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유세한 나라들이 약하고 작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두루 다닌 끝에 진나라에 머무르면서 잇따라 재상이란 높은 벼슬로 천하에 이름을 떨친 것은 그들의 능력이 남보다 강한 반면 타인의 능력이 그들보다 약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선비는 우연히 때를 만나는 경우도 있다. 이들 두 사람 못지않은 잘난 사람들도 뜻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러나 이 두 사람도 곤궁한 처지에 빠지지 않았던들 어찌 분발하여 성공할 수 있었겠는가?”
- 이사(李斯)
"공실을 강하게 하고 사문을 막았으며 제후들을 잠식하여 진이 제업을 이루도록 했다.(强公室,杜私门,蚕食诸侯,使秦成帝业)"
관련 드라마
- 1997年 드라마《东周列国·战国篇》
- 2008年 드라마《西风烈》
- 2012年 드라마《虎符传奇》
- 2012年 드라마《传奇》
- 2013年 드라마《大秦帝国之崛起》
참고문헌
장철환, 『중국고대사』, 서울:북랩, 2017.
공원국, 『춘추전국이야기 9. 원교근공』, 위즈덤하우스, 2015.
사마천, 김영수 역, 『사기 : 열전』,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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