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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24일 (월) 12:04 판
비수의 전투
383년 비수에서 동진의 사현이 전진 부견을 격파한 전투로, 진무제 사후 발생한 8왕의 난 이후 후한시대에 중원에 유입된 호족들이 서진의 멸망시키고 북쪽에서 5호 16국 형세가 유지되는데, 이 상황에서 호족 저족의 전진이 화북을 통일한 후 중국 전체를 통일시키기 위해 약 87만 대군을 거느리고 동진으로 남하하여 일으킨 전쟁이다. 이 전쟁은 막강한 군사를 보유했다고 반드시 승리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전투이다.
위진남북조 시대
삼국시대와 서진
후한 말기부터 시작된 삼국시대에는 모두 100여 차례의 크고 작은 전쟁이 있었는데 이 가운데 영향력이 깊은 4대 전쟁으로 조조가 중심인 관도대전, 적벽대전, 한중대전, 그리고 조조가 죽은 후 일어난 이릉대전이 그것이다. 4대 전쟁에서 알 수 있듯이 세 나라 중 가장 강한 나라는 위나라였지만, 3국의 세력이 비슷했기 때문에 잦은 전쟁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40여 년 동안 지속적으로 대립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강한 세 나라가 갑자기 진나라에 의해 멸망하게 되는데 이는 각 나라 모두 커다란 내분에 휩싸여 국력을 극도로 소진하다가 결국 사마씨에게 차례로 무너진 것이다. 사마의는 사마방의 차남으로 265년부터 420년까지 150여 년동안 이어진 사마씨의 왕조 진 나라의 시조로 추숭되며 그는 제갈량의 두 차례 북벌을 막았고 요동을 평정한 공적이 있었다. 사마의는 그 아들들과 함께 위나라의 실권자인 조상 형제에 대항해 고평릉의 변을 일으켜 성공했고 사마씨 일가는 위나라의 조씨 정권을 탈취해 사마의의 손자 사마염이 선양을 받아 국호를 진으로 고쳤다. 263년, 촉나라는 위나라에게 투항하였고 이어 279년, 오나라 투항하며 전국이 통일된다. 촉나라의 투항 후 사마염이 조환을 몰아내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는데 그가 진 무제이다. 진 무제는 초기 10년동안은 천하태평을 이뤘지만 오나라를 평정한 이후 정사에 태만하고 연회에 빠져 측근의 귀족이 권력을 장악하며 진나라는 분열을 길로 들어섰다. 분봉제 등의 이유로 중앙집권이 심각하게 약화되었고 진 무제 사후, 이는 8왕의 난의 원인이 되었다. 이 난에 의해 동한 때부터 중원으로 이주해 온 많은 북방 소수민족(5호) 동원되어 죽었으며 이들은 이에 분노하며 진나라 군대를 무찌르고 새로운 정권을 세운다. 흉노 귀족 유연이 세운 한에 의해 진 회제와 진 민제가 잡혀가며 서진은 멸망하게 된다. 이후 황하 유역과 장강 이북 지역을 5호가 다스리며 전쟁을 통해 많은 나라가 들어섰기 때문에 16국이라 불리고 이때부터 중국은 역사상 유례없는 혼란기인 남북조시대로 들어간다.
동진
북쪽의 혼란한 상황을 틈타 남쪽에서 낭야왕 사마예가 동진을 건국해 서진의 전통을 이어갔다. 그는 낭양의 호족 왕씨와 힘을 합쳐 강남의 호족을 설득해 건국하긴 했지만 지방 호족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여력이 없었고 북쪽 이민족 국가들의 공격을 막아내긴 했지만 북벌을 행할 의지 또한 없었다. 하지만 383년 북방을 통일한 전진이 일으킨 비수의 전투에서 동진이 승리하여 강남에서 견고하게 자리를 잡게 되었지만 비수의 전투 이후, 치열해진 권력투쟁으로 많은 지역이 조정에서 독립하여 중앙집권이 어려워졌고, 왕조의 농민 수탈에 의해 농민봉기가 발생하여 동진은 큰 타격을 입었다. 부견과 전투 전개 과정 남북조시대 북조 전진의 항제 부견은 북조를 통일한 뒤 남조 동진을 병탄해 천하를 통일하고자 했다. 이때 양쪽 군사가 격돌한 싸움이 이른바 '비수의 전투'이다. 부견은 어렸을 때 부터 영특했고 할아버지 부흥 곁에서 명을 기다리면서 행동거지가 모두 예에 맞아 조부인 부홍은 부견을 크게 총애하며 매우 기뻐했다. 8세 무렵 부견은 부홍에게 선생님을 붙여달라고 요구하면서 유학을 열심히 공부했고 보위에 오른 부견은 20여 년에 걸쳐 정성을 다해 나라를 다스렸으며 이에 전진이 부강한 나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의 최대 최대목표는 천하통일이었기 때문에 동진을 정복해야만 했다. 양양에서 동진의 장수 주서를 포획한 후 부견은 천하통일의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하여 군신들을 모아놓고 자신의 구상을 밝힌 뒤 신하들에게 각자 자신의 의견을 발표하게 했다. 비서감주동을 제외한 대신들 전원이 반대했으나 부견은 "춘추시대 말기 오나라 부차도 강남의 월나라 구천을 포로로 잡았고. 삼국시대 말기 사마씨의 군사는 3대에 걸친 동오의 손오를 포로로 잡았다. 진나라가 장강의 험고함에 기대고 있으나 이는 큰 문제가 안된다. 수많은 우리 군사 말채찍으로 장강을 치면 가히 그 흐름도 끊을 수 있다."라고 말하며 전투를 추진했다. 당시 동진의 조정은 부견이 나라를 기울여 친정에 나섰다는 소식을 접하고 대경실색하며 급히 승상 사안에게 명해 군사들을 이끌고 가 부견의 남침을 저지하게 했다. 전쟁 초기 싸움은 전진에게 유리하게 진행되었고 동진의 조정이 크게 놀라 곧 모든 병사를 동원해 총력 저지에 나섰다. 동진의 용양장군 호빈이 먼저 협석을 굳게 지켰고 그는 조정에 속히 구원에 나설 것을 청하는 서신을 사석에게 보냈다. 그러나 사자는 도주에 부견의 동생인 부융에게 잡히고 말았다. 크게 기뻐한 부융은 부견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부견이 크게 기뻐하며 곧바로 대군을 항성에 주둔시킨 뒤 직접 8000명의 기병을 이끌고 수춘으로 달려갔다. 이때 동진의 용양장군 유뢰가 5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밤에 전진의 영채를 급습하여 양성을 비롯한 전진의 대장 10명의 목이 떨어지고 병사 15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동진의 군사가 여세를 몰아 수륙을 병진하며 공격에 나섰다. 당시 부융은 동진의 군사가 절반쯤 강을 거넜을 때 곧바로 공격을 가할 심산이었지만 부견의 승인을 받은 후 군사를 이동시키는게 낫다고 판단했다. 이때 전에 투항했던 동진의 장수 주서가 '진나라 군사가 패했다.'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이 소리를 듣고는 전진의 군사로 편입돼 있던 선비족과 강족, 갈족의 병사들이 크게 놀라 사방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전진의 군사들이 일패도지하자 동진의 군사들이 승세를 이어 급박하게 그 뒤를 추격했다. 이 와중에 부융은 유시를 맞은 채 단기로 회북까지 도주했고 물에 빠져 죽는 자가 부지기수였으며 겨우 목숨을 건진 남은 군사들은 갑옷을 벗어던지고 밤을 새워 달아났다. 그들은 바람소리와 학의 울음소리만 들려도 동진의 군사가 뒤쫓아오는 줄 알고 도망가기 바빴다. 결국 동진을 병탄해 천하를 통일하려고 한 부견의 야망은 헛된 꿈이 되고 말았다. 이 전쟁에서 패배한 가장 큰 이유는 선비족과 강족, 갈족 등 여러 민족으로 병사를 구성했음에도 단지 숫자만 많은 것만 믿고 무모하게 정벌에 나선 것이다.
전투이후
비수의 전투이후 동진의 농민 봉기를 진압한 장군 유유는 420년 황제에 올라 국호를 송나라로 바꾸었다. 이후 60년이 지나지 않아 479년에 제나라, 502년에 양557년에 진나라로 국호가 바뀌며 매우 짧은 기간동안 왕조 교체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국가는 점점 피폐해졌다. 당시 위진남북조 말기에 태어난 수문제가 북주 황실 일족을 제게하고 수나라를 세웠는데, 수문제는 남조의 진나라를 몰아내 300여년의 분열을 끝내고 두 번째의 대통일을 완성하였다.
참고문헌
신동준, 한 권으로 끝내는 통중국사, 2018
엄문명, 중화문명사 제2권 상하, 진한 위진남북조,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