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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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에 장성의 축조와 관련해 적혀있는 내용을 보면, 대체로 ‘築’과 ‘立’이 ‘쌓다’라는 의미로 서술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장성이 인공적인 힘을 이용해 축조되었음을 내포하는데, ‘築’이 ‘나무와 삽을 이용하여 인공적으로 쌓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성은 사람이 힘을 가하여 쌓은 것이라고 해석된다. | 사기에 장성의 축조와 관련해 적혀있는 내용을 보면, 대체로 ‘築’과 ‘立’이 ‘쌓다’라는 의미로 서술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장성이 인공적인 힘을 이용해 축조되었음을 내포하는데, ‘築’이 ‘나무와 삽을 이용하여 인공적으로 쌓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성은 사람이 힘을 가하여 쌓은 것이라고 해석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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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장성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험한 자연물을 이용하여 축조했다는 것이다. 이는 진시황 때부터 내려온 전통 중 하나인데, 사기에 따르면 ‘趙 장성은 漳水와 涪水를 이용하여 지었다.’라는 내용이 적혀있다. 이는 장성을 두 강의 제방과 인접하여 쌓았다는 의견과, 두 강의 제방을 증축하였다, 즉 제방이 곧 장성이 되었다는 의견이다. 대다수의 학자는 秦의 서장성이 비슷한 방법으로 축조되었다고 서술하였으나 실제로는 濱洛와 동쪽으로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전자의 방법으로 축조하였다고 해석한다. 즉, 제방과 인접하여 쌓았다고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漳水와 涪水가 1차 방어선이고 장성이 2차 방어선의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 그러나 장성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험한 자연물을 이용하여 축조했다는 것이다. 이는 진시황 때부터 내려온 전통 중 하나인데, 사기에 따르면 ‘趙 장성은 漳水와 涪水를 이용하여 지었다.’라는 내용이 적혀있다. 이는 장성을 두 강의 제방과 인접하여 쌓았다는 의견과, 두 강의 제방을 증축하였다, 즉 제방이 곧 장성이 되었다는 의견이다. 대다수의 학자는 秦의 서장성이 비슷한 방법으로 축조되었다고 서술하였으나 실제로는 濱洛와 동쪽으로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전자의 방법으로 축조하였다고 해석한다. 즉, 제방과 인접하여 쌓았다고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漳水와 涪水가 1차 방어선이고 장성이 2차 방어선의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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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이전의 장성은 흙으로 쌓은 것이 주를 이루었는데, 시대와 장소에 따라 여러 가지 소재가 사용되었다. 중국 쪽에서 볼 때 동쪽이나 산간 지역에서는 주변에서 조달하기 쉬운 돌을 쌓아 만든 곳도 있고, 돌과 흙 두 가지를 함께 사용한 곳도 있다. 흙은 주로 황토를 사용했다. 황토는 물과 함께 절구에 빻아 건조시키면 아주 단단해지는 성격이 있기에 성벽을 쌓는데 유리했다. 그래서 치수를 재어 나무 판으로 만든 틀 안에 황토와 물을 넣고 반죽하여 건조시킨 후 시간이 지나 틀을 빼면 제방과 같은 장성이 생긴다. 이러한 건축 기법을 '판축(板築)이라고 한다. 서쪽의 실크로드가 있는 곳으로 가면 황토 점토 안에 억새나 타마리스크 가지 등의 보강재를 섞은 곳도 존재한다. 또한 표면에 볕에 말린 벽돌을 쌓은 곳도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벽돌은 판축 장성과 같은 방법으로 틀을 만들고 그 안에 황토와 물을 반죽해 넣어 햇볕에 건조시킨 벽돌이다. | 명나라 이전의 장성은 흙으로 쌓은 것이 주를 이루었는데, 시대와 장소에 따라 여러 가지 소재가 사용되었다. 중국 쪽에서 볼 때 동쪽이나 산간 지역에서는 주변에서 조달하기 쉬운 돌을 쌓아 만든 곳도 있고, 돌과 흙 두 가지를 함께 사용한 곳도 있다. 흙은 주로 황토를 사용했다. 황토는 물과 함께 절구에 빻아 건조시키면 아주 단단해지는 성격이 있기에 성벽을 쌓는데 유리했다. 그래서 치수를 재어 나무 판으로 만든 틀 안에 황토와 물을 넣고 반죽하여 건조시킨 후 시간이 지나 틀을 빼면 제방과 같은 장성이 생긴다. 이러한 건축 기법을 '판축(板築)이라고 한다. 서쪽의 실크로드가 있는 곳으로 가면 황토 점토 안에 억새나 타마리스크 가지 등의 보강재를 섞은 곳도 존재한다. 또한 표면에 볕에 말린 벽돌을 쌓은 곳도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벽돌은 판축 장성과 같은 방법으로 틀을 만들고 그 안에 황토와 물을 반죽해 넣어 햇볕에 건조시킨 벽돌이다. | ||
2019년 6월 24일 (월) 13:35 판
목차
개요
중국의 역사가 진행되어 오면서 역대 왕조들이 북방 유목민족(흉노족, 몽골인, 만주족등)의 침공을 막기 위해 중국이 세운 성벽이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BC 259~BC 210)때에 처음 건립되었다고 전해지지만, 그보다 훨씬 전인 춘추시대(BC 770~BC 443)부터 북쪽 변방에 부분적으로 성벽이 건축되었다. 오늘날 남아 있는 성벽은 대부분 15세기 이후 명나라 때에 쌓은 것이다. 지금은 흔히 '장성(長城)'으로 줄여서 불러지기도 한다. 만리장성이라고 불리지만 실제로는 만 리보다 조금더 길다. 이는 길이가 서쪽의 간쑤성, 자위관에서 동쪽의 허베이성 산하이관까지 2,700km에 이르며, 지형의 높낮이 등을 반영하면 실질적인 성벽의 길이는 6,352Km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혁
왜 장성을 지었을까?
장성을 지은 이유는 기본적으로 북방 민족의 침입을 저지하는 것에 있다. 예전에 중국 사회의 가장 큰 걱정거리이자 근심거리는 북방 유목민들의 침략이었다. 그들은 줄곧 침략해 와 사람들을 죽이고, 한 해 동안 정성껏 재배한 작물을 약탈해갔다. 북방의 유목 민족들은 모두 말을 이동 수단으로 삼았다. 말은 기동력이 좋다는 장점이 있으나 앞에 장애물이 있을 경우 활용이 쉽지 않다는 단점이 있다. 여기에 착안해 중국인들이 축조한 것이 바로 만리장성이다. 한편 단순히 말의 접근을 막기 위해 축조한 성이기 때문에 초기 만리장성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만리장성과는 조금 다르다. 진(秦)나라 당시 진시황이 축조한 만리장성은 성벽이라기보다는 담에 가까웠다. 높이는 고작 2~3M에 불과했기 때문에 기마병의 접근을 막는데에는 효율적이었을지 몰라도 만약 사람이 넘고자 한다면 충분히 넘을 수 있는 정도의 높이이다.
장성의 역사
기원
춘추 전국
진
진(秦)대의 장성은 장소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높이는 2~3m정도이다. 또한 벽돌로 이루어져 있는 오늘날의 장성과는 달리 흙으로 쌓은 담과 유사한 형태를 보인다. 이 시기 장성을 만든 이유는 유목민의 기마부대가 넘어오지 못하게 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또한 장성 앞에 도랑을 파 해자(垓子)를 만들었고 또 이 앞에 성벽같은 흙담을 설치했다. [1]
한
위진남북조
송
원
명·청
오늘날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만리장성이 바로 이 시기에 축조되었다. 16세기 명나라 시기에 기존에 있던 만리장성을 보수, 신축하였다. 장성을 둘러싼 치열한 공방전이 명대 이전에 자주 일어났다. 16세기에 이르러서는 공격하는 쪽도, 수비하는 쪽도 기술이 과거보다 진보한 상태이기에, 축조된 장성의 높이도 7~8M에 이르렀다. 이 당시의 장성은 말이 접근할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훌륭한 것인데 기존의 장성보다 평균 100KM나 남하한 위치에 형성되었다.[2] 이 시기 장성은 산의 능선을 따라 쌓은 곳이 많다. 이는 적이 침입했을때 접근이 쉽지 않은 험준한 곳을 전략적으로 선택한 결과이다. 한편 이 시기 강수량이 많은 지역으로 장성이 남하한 이유는 둔전(屯田) 경작의 용이함을 위해서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둔전이란 주둔군이 자급자족 할 수 있도록 밭을 경작하는 등 농사를 짓는 것을 말한다.[3] 만약 전체 군사를 열 명으로 본다면 이 중 여덟명은 둔전을 경작하고, 나머지 둘이 근무를 서는 것이 당시 명나라 군사 체제였다. 한편 1년동안 농사를 지으려면 연 평균 강수량이 200ml로는 힘들다. 따라서 이들은 둔전을 유지할 수 있는, 연 평균 강수량이 500ml인 지역으로 내려온 것이다.[4]
명대 말에 접어들면 현재의 장성과 유사하게 구운 벽돌을 사용하여 성벽을 축조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벽돌은 오르도스 내의 장성 중간 부분에서 동쪽으로 한정된 지역에 나타나는데, 이런 벽돌을 '전(磚)'이라 부른다.
건축 방법
사기에 장성의 축조와 관련해 적혀있는 내용을 보면, 대체로 ‘築’과 ‘立’이 ‘쌓다’라는 의미로 서술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장성이 인공적인 힘을 이용해 축조되었음을 내포하는데, ‘築’이 ‘나무와 삽을 이용하여 인공적으로 쌓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성은 사람이 힘을 가하여 쌓은 것이라고 해석된다.
그러나 장성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험한 자연물을 이용하여 축조했다는 것이다. 이는 진시황 때부터 내려온 전통 중 하나인데, 사기에 따르면 ‘趙 장성은 漳水와 涪水를 이용하여 지었다.’라는 내용이 적혀있다. 이는 장성을 두 강의 제방과 인접하여 쌓았다는 의견과, 두 강의 제방을 증축하였다, 즉 제방이 곧 장성이 되었다는 의견이다. 대다수의 학자는 秦의 서장성이 비슷한 방법으로 축조되었다고 서술하였으나 실제로는 濱洛와 동쪽으로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전자의 방법으로 축조하였다고 해석한다. 즉, 제방과 인접하여 쌓았다고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漳水와 涪水가 1차 방어선이고 장성이 2차 방어선의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명나라 이전의 장성은 흙으로 쌓은 것이 주를 이루었는데, 시대와 장소에 따라 여러 가지 소재가 사용되었다. 중국 쪽에서 볼 때 동쪽이나 산간 지역에서는 주변에서 조달하기 쉬운 돌을 쌓아 만든 곳도 있고, 돌과 흙 두 가지를 함께 사용한 곳도 있다. 흙은 주로 황토를 사용했다. 황토는 물과 함께 절구에 빻아 건조시키면 아주 단단해지는 성격이 있기에 성벽을 쌓는데 유리했다. 그래서 치수를 재어 나무 판으로 만든 틀 안에 황토와 물을 넣고 반죽하여 건조시킨 후 시간이 지나 틀을 빼면 제방과 같은 장성이 생긴다. 이러한 건축 기법을 '판축(板築)이라고 한다. 서쪽의 실크로드가 있는 곳으로 가면 황토 점토 안에 억새나 타마리스크 가지 등의 보강재를 섞은 곳도 존재한다. 또한 표면에 볕에 말린 벽돌을 쌓은 곳도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벽돌은 판축 장성과 같은 방법으로 틀을 만들고 그 안에 황토와 물을 반죽해 넣어 햇볕에 건조시킨 벽돌이다.
현황
기사 위주로, 관광상품으로의, 관광지로서의 장성. 중국을 상징하는 건물
만리장성은 중국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문화유산으로 198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으며, 현재까지 '인류 최대의 토목공사'라고 칭송되고 있다. 2007년에는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다.
현재 만리장성은 중국의 관광상품으로서 많이 활용되고 있다. 이는 험준한 산과 협곡은 물론이고 사막까지 이어진 '자연경관'때문인데, 관광철이 되면 사람들로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그 인기는 굉장하다. 그래서 현 베이징의 만리장성은 '인간 장성'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기와 함께 '문화재 훼손 문제, 환경 오염 문제'등의 여러 문제들이 속출하고 있다. 중국정부는 이러한 문제가 심각해지자 2006년 부터 만리장성 보존을 위한 법률을 강력히 시행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현재는 만리장성 훼손과 주변에서 이뤄지는 광물 채굴 작업이 장성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 그리고 불법적인 건축물이 지어지고 있는지 등을 알기 위해 드론과 위성을 이용해 이를 방지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중국을 상징하는 건물로서 자리매김 하고 있는 만리장성은 중국의 문화사를 바탕으로 바라보았을 때, '중화사상'의 근본으로 중국에게 있어서 구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