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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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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진남북조는 동한 말의 건안년간(196-219)로부터 수(隨)나라 개황 9년(589) 진(陳)나라가 멸망한 시기까지 400년 동안을 말한다.
 
위진남북조는 동한 말의 건안년간(196-219)로부터 수(隨)나라 개황 9년(589) 진(陳)나라가 멸망한 시기까지 400년 동안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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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중의 종교, 황제의 종교 '불교' ==
 
== 민중의 종교, 황제의 종교 '불교' ==

2016년 5월 11일 (수) 02:06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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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개요

위진남북조는 동한 말의 건안년간(196-219)로부터 수(隨)나라 개황 9년(589) 진(陳)나라가 멸망한 시기까지 400년 동안을 말한다.

삼국시대

서진

5호 16국 시대

5호 16국

동진

남북조 시대

남조

북조

민중의 종교, 황제의 종교 '불교'

유교 사상은 국교로서 한 대를 풍미했으나, 위진남북조 시대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유일한 권위가 될 수 없었다. 노자 · 장 계보를 이은 도가 사상과 개인 구제를 기구하는 신앙이 합쳐져 도교가 확립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후한 초기의 실크로드를 타고 서방에서 유입한 불교 사상과 신앙이 비로소 중국인들에게 수용되기 시작했다. 유 · 불 · 도 삼교가 병립하여 인간 정신의 진폭을 크게 넓히자 이런 사상적 다양성 아래서 새롭고 더욱 확실한 가치가 모색되고 있었다. 확실한 교설도 없으며 제창한 교조도 없는 것이 특징인 도교는 내세보다 현생의 삶 자체에 기본적인 전제를 두고 욕구 추구를 근본적인 목적으로 삼고 있었다. 충실한 삶과 그러한 삶을 무한히 연장하려는 욕구를 신비적 실천이나 수양에 의하거나 혹은 초인간적인 힘에 의지하여 달성하려는 것이 바로 도교였다. 후한 말 장각(張角)의 태평도와 삼장(三張)의 오두미도에서 나름의 교법을 갖고 그것에 기초한 교단이 조직되었지만, 신도로서 일체감을 갖는 시기는 동진 말과 남북조 초가 되어서였다. 초기 도교 신도의 핵심 구성원은 유망 농민이거나 파산 또는 궁핍한 농민이었다. 도교는 한중 지역에서 종교왕국을 건설한 사천의 성한(成漢)정권에서 세력을 확대한 바 있고, 북위 시대 구겸지의 활약으로 불교 대신 국교의 지위를 차지한 적이 있으며, 남조 도교에서 보듯이 어용 · 관방화한 측면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반왕조적 · 민중적 성격의 종교였다. 불교가 본격적으로 중국에 정착하게 된 것은 서역과 관련이 깊은 유목민들이 화북을 지배한 오호십육국 시대부터였다. 불교는 호조군주들에게 화이론적 차별의 대상이 아니었다. 또한 초자연적인 힘으로 재난을 물리치고 전쟁에서도 예견 능력을 발휘하는 신이승(神異僧)은 그 시대 상황과 부합하여 특별한 존재로 부각되었다. 불도징이 후조 왕조에 영입되었고, 그의 제자 동안은 전진 왕조에서 크게 활약했다. 특히 부견구마라습을 데려오고자 여광에게 7만의 병사를 주어 쿠차를 정복하게 하였을 정도였다. 돈황에 석굴이 개착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구마라습은 후진 왕조에게 국사가 되어 3000명의 제자를 모아 불경 번역에 힘썼고, 그 결과 8년 동안 74부 384권을 번역하여 불교 교리를 중국에 소개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운강 및 용문 등지의 대석굴 조영이 모두 이민족 왕조 하에서 이뤄졌다는 것은 불교와 호족정권의 밀접성을 말해준다. 오호 · 북조 시대의 불교는 민중의 종교라기보다 황제의 종교였다. 운강석굴 가운데 '담요오굴(曇曜五窟)'로 알려진 대불들이 황제의 모습을 띤 것이라든지 북위 태무제와 북주의 무제시기 양차에 걸쳐 폐불이 단행된 것도 불교가 국가에 종속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황제는 당금의 여래”라고 인정한 북조 불교는 “사문은 왕자(王者)에게 경례하지 않아도 된다.”는 입장을 고수했던 남조 불교와는 달랐다. 특히 네 번에 걸쳐 삼보의 종이라 칭하며 사원에 자신의 몸을 위탁하였고 그때마다 신하들이 수억 전을 사원에 지불하고 황제를 다시 찾아와야 했던 양무제와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불교가 이 시대에 이르러서 성행하게 된 것은 난세의 지속과 민중의 아픔이라는 시대상과 연관이 있다. 그러나 도교와 비교할 때 역시 불교는 국가 또는 황제의 종교로서의 성격이 짙었다.


참고문헌

<<아틀라스 중국사>>, 박한제 외 3인, 사계절 출판사,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