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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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한 교설도 없으며 제창한 교조도 없는 것이 특징인 도교는 내세보다 현생의 삶 자체에 기본적인 전제를 두고 욕구 추구를 근본적인 목적으로 삼고 있었다. 끊임없는 전쟁과 왕권 찬탈이 이루어지는 혼란한 정치적 상황속에서 지식인들은 세속적인 현실을 떠나 자연속에 은거해 자신의 내면을 수양하고자 했고 자연스레 도가 사상은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죽림7현청담사상이 있는데, 이들은 유가들이 격식있게 옷을 차려입거나 깨끗하게 머리와 수염을 깎는 것을 비웃으며, 남루한 옷을 입거나 수염을 깎지 않고 손님을 맞이할 때는 알몸으로 나서는 등의 자기해탈을 추구했다. 또한 깊은 산 속에 은거하며 당시 권력자들과 한 통속이 되지 않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자신의 인격과 절개를 지키고자 했다. 이렇게 자연 속에서 정치에서 벗어난 자연속의 자유로움을추구한 자들을 은사라고 한다. 도가사상이 도교라는 종교로 일체감을 갖게 된 것은, 후한 말 장각(張角)의 태평도와 삼장(三張)의 오두미도에서 나름의 교법을 갖고 그것에 기초한 교단이 조직된 후 동진 말과 남북조 초가 되어서이다. 이렇게 도가사상은 남북조 시대에 들어 도교라는 하나의 종교로서 통합되어 간다. 도교는 충실한 삶과 그러한 삶을 무한히 연장하려는 욕구를 신비적 실천이나 수양에 의하거나 혹은 초인간적인 힘에 의지하여 달성하고자 한다. 초기 도교 신도의 핵심 구성원은 유망 농민이거나 파산 또는 궁핍한 농민이었다. 도교는 한중 지역에서 종교왕국을 건설한 사천의 성한(成漢)정권에서 세력을 확대한 바 있고, 북위 시대 구겸지의 활약으로 불교 대신 국교의 지위를 차지한 적이 있으며, 남조 도교에서 보듯이 어용·관방화한 측면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반왕조적·민중적 성격의 종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