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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11일 (수) 21:36 판
북방통일을 이룬 북위
(1)북강남약
(2)
동위와 서위로 분할된 위나라
북위 영희 3년(534), 효무제 원수가 고환의 압박에 불만을 품고 서쪽 장안으로 달아나 우문태에게 의탁하자 고환은 대노했다. 10월 17일 11세이던 청하왕 세자 원선을 다시 황제로 세우니 이 이가 바로 동위 효정제이며 영희 3년을 천평 원년으로 개원하고 업으로 천도했다. 이렇게 되기 전부터 북위는 대 동란을 겪으며 점차 양대 군사집단을 형성하고 있었다. 하나는 진양을 근거지로 하는 고환 집단이고 다른 하나는 장안을 근거지로 하는 우문태 집단이다. 영희 3년(534) 5월, 원수는 계엄을 선포하고 하남 등의 주의 군대를 이동시켜 직접 대군을 이끌고 양나라를 정벌하겠다고 공언했지만 사실 진양(晋阳)을 습격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노회한 고환은 이미 사정을 훤히 알고 선수를 쳐 기선을 제압하기 위하여 역시 양나라를 정벌한다는 명분 하에 20만 대군을 나누어 남하시켜 낙양까지 육박했다. 원수는 다급해지자 우문태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고환은 동관까지 쳐들어가 화음까지 진주했다. 원수는 우문태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낙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나 같은 해 윤 12월, 우문태는 효문제 원수를 독살하였다. 다음해(535) 정월, 우문태는 남양왕 보거를 황제로 세우니 이가 바로 서위 문제며 대통으로 개원했다. 이로부터 북위는 점차 분열되어 동위 정권은 고환 집단의 독점 아래 있고, 서위 정권은 우문태가 통제했다.
(1) 사원 전투
북위가 동위와 서위로 분열된 후, 대통 원년 우문태와 고환의 양대 집단은 공개적으로 반목하며 각기 정예 부대를 동원하여 한동안 사방에 전화가 일고 도처에 봉화가 올랐다. 대통 3년(537) 8월, 서위에서 기근이 발생하자 서위의 우문태는 동위를 토벌하려 출병하여 동위의 곡식 저장 요지인 항농을 공격 및 함락하여 현지에서 군량을 충당했다. 고환은 자기의 양식 창고가 급습당한 것을 보고 대노하여 즉시 대장 고오조에 3만을 이끌고 항농을 겹겹이 포위하도록 했다. 또한 자신은 친히 20만 대군을 이끌고 포진에서 황하를 건너 위세당당하게 장안까지 쳐들어가 우문태와 생사를 건 마지막 승부를 벌이고자 했다. 우문태는 고환의 맹렬한 기세를 보고 그가 전열을 완전히 정비하기 전에 맹공을 감행하기로 결정하였다. 10월, 우문태는 부족을 이끌고 고환 군대와 60리 정도 떨어진 사원(지금의 섬서 대려 남쪽 난과 위 사이)의 안영에 도착했다. 우문태와 여러 장군들은 의논을 거쳐 부대를 좌우로 나누어 각각 방진을 치고 장사들은 모두 갈대 숲 속으로 매복하여 위곡에서 적을 기다리다 북소리를 듣고 출격하기로 결정했다. 동위 군대는 병사도 많고 세력도 강하며 군력은 서위 군대의 20배에 달했기에 진격하는 내내 의기양양하여 군심이 교만하고 나태했다. 이에 우문태가 군대를 이끌고 공격하자 고환은 대패하여 그날 밤 내내 황하를 건너 도주했다. 사원 전투로 동진이 입은 손실은 무장 병사 8만, 버린 갑옷과 병기가 18만으로 동진의 참패였다. 우문태는 1대 20의 절대적 열세에서 강적을 물리치고 수도로 개선했다.
참고문헌
『아틀라스 중국사』, 사계절, 박한제 외 4명, 2015 『중국통사2』, 범우, 중국사학회,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