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서가"의 두 판 사이의 차이

Chinese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새 문서: {{작성중}} 장서가(藏書家)란 사전적으로 ‘책을 많이 간직하여 둔 사람’을 의미한다. 이 문서에서 지칭하는 장서가란 명청시기에 출판...)
 
잔글 (참고문헌)
28번째 줄: 28번째 줄:
  
 
==참고문헌==
 
==참고문헌==
 +
 +
[[분류:중국의 역사]]

2016년 5월 25일 (수) 13:16 판

이 문서는 현재 누군가가 작성 중입니다. 편집 충돌이 발생하면 소중한 문서 기여가 날아감으로 잠시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문서작성이 완료되신 분은 편집이 완료되면 제발 이 틀을 때어주시기 바랍니다.


장서가(藏書家)란 사전적으로 ‘책을 많이 간직하여 둔 사람’을 의미한다. 이 문서에서 지칭하는 장서가란 명청시기에 출판된 도서의 소비자이자 생산자의 기능을 담당했던 출판문화의 주체 중 하나이다.


장서문화의 발전

장서문화의 역사를 살펴보면 알 수 있는 기본적인 특성은 사회가 안정되고 경제와 문화, 과학기술이 발전한 시기에 장서 사업이 활발해지고 다수의 장서가가 출현한다는 점이다. 명청시기에는 특히 강남지역을 중심으로 많은 장서가가 배출되었다. 이는 당시 강남지역이 문화가 발달하고 학술이 창성하여 전반적인 문화소양이 높고 독서의 열기가 고조되었던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강남지역을 중심으로 한 장서가들의 활동은 중국의 명청시기에 두드러졌으며 강남지역의 높은 문화소양을 반영하는 것임과 동시에 이러한 문화적 분위기를 고양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장서가의 역할

장서가 출판에 이용되려면 우선 진본(珍本), 선본(善本)을 찾아서 그것을 인쇄의 저본(底本)으로 삼아야 하고, 여기에 여러 차례의 교감과 정리 작업을 거쳐야 한다. 따라서 장서가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교감가이며 출판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장서가 가운데 “장서는 독서만 못하고, 독서는 각서만 못하니, 독서는 그저 자기를 위한 것이지만 각서는 남에게 베풀 수 있기 때문이다.(藏書不如讀書, 讀書不如刻書, 讀書只以爲己, 刻書可以澤人.)”라는 인식을 가지고, 자신의 장서를 이용해 저본으로 삼아 서적을 출판하던 주체들이 많았다.
장서가가 자신의 전적을 이용하여 서적을 출판·전파한 상황을 보면, 그 출판동기와 목적은 제각각 차이가 있겠지만 진귀한 전적의 보급에 큰 공헌을 했다.


장서가의 특성

장서가들의 출판활동은 일반의 개인적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출판업자와는 다르다. 서상(書商)의 출판은 영리를 목적으로 하므로 선택한 저본이 좋지 못하거나 교감이 정확치 않기도 하고, 도서의 장정(裝幀)에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심지어 오탈자와 연문(衍文) 등이 심해 오히려 후학들에게 나쁜 영향을 주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장서가의 출판의도는 이와는 차이가 있었는데, 일부는 자신의 사장(私藏)을 보충하기 위해 출판하는 경우도 있고, 또 일부는 치학(治學)의 목적이나 저술을 발표하기 위해 출판하였으며, 또 그 중에는 개인적인 취미로 하는 이도 있었다. 이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경우는 진귀한 전적(典籍)을 보존하기 위해 출판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장서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책은 출판할 도서 종류의 선택에서부터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 것이고, 또한 우수한 선본을 저본으로 삼았으며, 저본에 대해 성실하게 교정을 가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질적인 면에서 상당히 우수했다.


명청대 유명 장서가

명청시기에는 강남지역을 중심으로 배출된 장서가가 많았다. 엽성(葉盛), 전겸익(錢謙益), 전회(錢會), 장해붕(張海鵬), 장금오(張金吾), 황비열(黃丕烈), 황정감(黃廷鑒), 구용(瞿鏞), 모진(毛晋) 등이 중국 역사에서 대표적인 장서가들로 꼽힌다.

황비열

황비열(黃丕烈)은 건륭년간에 대장서가였는데, “나는 장서를 즐기며 또한 서책의 간행을 좋아하는데, 바라건대 소장하고 있는 것을 차례로 판각하고 싶구나.(余喜藏書而兼刻書, 欲擧所藏而次第刻之.)”라고 말한 바 있다. 그가 책을 간행할 자금이 없었을 때, 호과천(胡果泉)이 자금을 대겠다고 하자 황비열은 곧 박서정 소장 송본 《輿地廣記》를 선택하여 삼년간 호과천의 힘을 빌어 간행하였다. 이때 황비열은 “이 책이 세상에 사라져 드러나지 않은 지가 오래 되었다. 내가 비록 그것을 얻었으나 책 넣어 두는 궤짝에 들어 있을 따름이었다. 과천 선생이 나를 도와 새길 수 있게 해 주지 않았다면 어찌 사라진 것이 문득 나타날 수 있었겠는가! (是書煙沒不彰久矣, 余雖得之, 第藏之篋笴已耳, 敬非果川先生之助剞劂, 安能使晦者忽顯乎.)”라고 하며 책을 출판하였을 때의 기쁨을 표현하였다.

모진

모진(毛晋)은 명말청초의 유명한 장서루 급고각(汲古閣)의 주인으로 그의 장서는 84,000여 책에 이르는데 모두 급고각과 목경루(目耕樓)에 두었다. 모진은 평생을 도서의 수집에 바쳤는데 명 만력말에서 청 순치년간에 이르기까지 40여 년간 그가 출판한 서적은 600여 종에 이르며, 조판(雕版)만 해도 10만 9천여 편에 달한다. 당시에 “모진의 책이 천하를 다닌다. (毛氏之書走天下).”라는 말이 있었으니 모진의 출판사업이 얼마나 성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모진이 출판한 서적은 지금까지 선본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그 가운데 유명한 것으로 《십삼경주소(十三經注疏)》·《십칠사(十七史)》·《진체비서(津逮秘書)》·《육십종곡(六十種曲)》 등이 있다.
모진이 서적을 간각한 것은 판매를 위한 것이긴 하지만, 오로지 이윤만을 목적으로 하는 일반 서상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었다. 우선 그는 거금을 아까워하지 않고 송원(宋元) 판본을 사들였는데, 아예 자기 집 문 앞에 다음과 같은 방문(榜文)까지 붙여 둘 정도였다.

송판본을 가지고 오는 사람이 있으면, 이 집의 주인이 쪽으로 계산해 값을 쳐서 한 쪽당 이백을 낼 것입니다. 구초본(舊抄本)을 가져오는 사람에게는 한 쪽당 사십을 줄 것이며, 요즘의 선본을 가져오는 사람에게 다른 집에서라면 일천을 줄 것을 이 집 주인은 일천 이백을 줄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에 “삼백예순가지 장사 중에 모씨네에 책 파는 것 만한 게 없다네. (三百六十行生意, 不如鬻書于毛氏.)”라는 속언까지 있을 정도였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