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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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가(藏書家)란 사전적으로 ‘책을 많이 간직하여 둔 사람’을 의미한다.[1] 이 문서에서 지칭하는 장서가란 명청시기에 출판된 도서의 소비자이자 생산자의 기능을 담당했던 출판문화의 주체 중 하나이다.


장서문화의 중심지

장서문화의 역사를 살펴보면 알 수 있는 기본적인 특성은 사회가 안정되고 경제와 문화, 과학기술이 발전한 시기에 장서 사업이 활발해지고 다수의 장서가가 출현한다는 점이다. 명청시기에는 특히 강남지역을 중심으로 많은 장서가가 배출되었다. 이는 당시 강남지역이 문화가 발달하고 학술이 창성하여 전반적인 문화소양이 높고 독서의 열기가 고조되었던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강남지역을 중심으로 한 장서가들의 활동은 중국의 명청시기에 두드러졌으며 강남지역의 높은 문화소양을 반영하는 것임과 동시에 이러한 문화적 분위기를 고양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여기서 강남은 장강(長江) 중하류 지역 문화권역을 통칭하지만, 좁은 의미로는 그 하류 삼각주 지역의 강소성(江蘇省)·절강성(浙江省) 및 안휘성(安徽省) 일부에 형성된 오월문화(吳越文化) 지역을 의미한다. 이 지역은 남송 이후 줄곧 중국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지만, 특히 16세기 중엽에 이르러 예술문학 분야에서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주요 출판지

  • 호응린(胡應麟) 《소실산방필총(少室山房筆叢)》〈경적회통사(經籍會通四)〉: “今海內書, 凡聚之地有四: 燕市也, 金陵也, 閶閶也, 臨安也. 閩楚滇黔則余間得其梓, 秦晉川洛則余時友其人, 旁諏歷閱, 大槪非四方比矣.” (지금 천하의 책은 집중지가 대략 네 곳이 있는데, 북경·남경·소주·항주이다. 복건·강서·운남·귀주는 내가 가끔 책들을 얻고, 섬서·산서·사천·하남은 내가 때로 그곳 사람을 사귀어 곁에서 부탁하여 두루 살펴보건대, 대체로 앞의 네 곳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 호응린(胡應麟) 《소실산방필총(少室山房筆叢)》〈경적회통사(經籍會通四)〉: “凡刻之地有三, 吳也, 越也, 閩也, 蜀本宋最稱善, 近世甚希. 燕, 粤, 秦, 楚 今皆有刻, 類自可觀, 而不若三方之盛.” (책을 간행하는 지역은 세 곳이 있는데, 吳지역, 越지역, 閩지역이다. 蜀本은 대에 가장 뛰어나다고 칭송을 받았으나 요즘은 매우 드물다. 燕, 粤, 秦, 楚지역에서도 지금은 모두 책을 간행하여 종류별로 볼 만한 책들이 있지만, 세 지역의 번성보다는 못하다.)
  • 호응린(胡應麟) 《소실산방필총(少室山房筆叢)》〈경적회통사(經籍會通四)〉: “葉(夢得)又云, 天下印書, 以杭爲上, 蜀次之, 閩最下. 余所見當今刻本, 蘇·常爲上, 金陵次之, 杭又次之. 近湖刻·歙刻驟精, 遂與蘇·常爭價. 蜀本行世甚寡, 閩本最下.” (葉夢得은 또 말하길 천하의 도서 출판은 항주를 으뜸으로 하고, 蜀(사천)을 다음으로, 閩(복건)을 최하로 친다고 했다. 내가 본 현재의 판본들은 소주·상주를 으뜸으로 하고, 금릉을 다음으로, 항주를 또 그 다음으로 친다. 근래에 호주·휘주의 책들이 날로 정교해져 드디어 소주·상주와 값을 다투지만, 蜀本은 세상에 유통되는 것이 극히 적으며, 閩本은 최하이다.)
  • 사조제(謝肇淛), 《오잡조(五雜俎)》卷十三: “金陵·新安·越與三地, 剞劂之精者, 不下宋版. 楚·蜀之刻皆尋耳. 閩建陽有書坊, 出書最多, 而板紙俱最濫惡.” (남경·휘주·호주 세 곳은, 판각의 정교함으로는 송대의 것에 필적한다. 楚(강서), 蜀(사천)의 판본은 모두 보통 수준이며, 閩(복건)의 건양에도 서방이 있어서 도서 생산이 가장 많지만, 판각이나 용지는 모두 가장 엉망이다.)

장서문화의 주체

사대부

중국에서 개인의 장서가 하나의 사회문화적 현상으로 자리잡게 된 것은 북송대의 일이었지만 송대까지 장서를 보유하는 것은 사대부층에 국한된 일이었다. 조판, 인쇄기술 및 상업경제의 발달로 서적의 매매가 용이해지고 사회전반에 서적의 유동량이 많아진 결과, 신분에 관계없이 장서가의 숫자가 폭증하게 된 것은 명대 중기 이후의 일이었다. 중국과 같은 봉건사회에서 서적을 간행하고 소장하는 일은 그 성격상 주로 관리나 사대부들의 영역이었던 것이다. 관리나 사대부는 전통문화 가운데 주류에 속하는 장서문화의 형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장서활동과 형태는 매우 다양했는데 그들의 성질과 소유주에 따라 대체로 아래와 같이 나뉜다.
  • 관부장서: 황실위주의 관부장서(官府藏書)
  • 사가장서: 역대(歷代) 개인장서인 사가장서(私家藏書)
  • 서원장서: 당대(當代) 이후의 서원장서(書院藏書)
  • 사원장서: 사원장서(寺院藏書)
중국사회에서 단순히 장서문화의 형성이라는 측면에서만 본다면 전통적으로는 역시 관부장서(官府藏書)가 중심이었고, 지주나 명문후예 출신인 사대부들의 사가장서(私家藏書)가 그 뒤를 이으며, 그 다음으로 상인들이 장서문화의 형성에 기여가 컸다고 할 수 있다.


상인

명청시대에 이르면, 여태껏 사회적 약자로만 머물러 있던 상인들이 상업이 발달한 지역에서 혈연이나 지연 등을 연고로 한 거대한 경제력과 조직력을 확보하면서, 이른바 상방(商幫)이라불리는 매우 긴밀한 집단조직을 이루어 낸다. 상방을 결성한 상인들은 그들의 활동을 상업적 거래에만 국한시키지 않았다. 그들은 상업에서 거둬들인 이익을 사회전반에 걸친 문화활동에 투자하면서, 민간의 문화활동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심지어 서적을 간행하고 매입하거나, 또는 그것을 대량으로 소장하는 일에까지 나아갔다. 이렇게 서적을 수장하는 일은 특히 휘상(徽商)과 같은 유상(儒商)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중국과 같은 봉건사회에서 서적을 간행하고 소장하는 일은 그 성격상 관리나 사대부들의 영역이라 할 수 있는데, 역사상 계층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영향력이 별로 없었던 상인들이 관리나 사대부처럼 전통문화 가운데 주류에 속하는 장서문화의 형성에 크게 기여한 일은 매우 특기할 만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유상이란 유(儒)와 상(商)이 결합된 말로서, 유학에 대해 배경이 있는, 글자 그대로 유학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상인을 가리킨다. 사실 황무제(潢武帝)가 “백가를 물리치고 오직 유학만 존중하기”시작한 이래로 유가의 최고 이념은 “학문하고도 여력이 있으면 관리가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유학에서는 전통적으로 오랜 세월동안 상인과 상업을 무시하였다. 상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유학이란 학문과 사인이라는 신분은 자신들이 태생적으로 다가갈 수 없는 대상이었다. 그러던 것이 명대 중엽 이후에 이르면 인구증가와 상공업발달과 같은 급격한 사회변화와 정통유학에 대한 사상적 도전이 발생하면서, 상인과 유학이 결합한 유상이라는 새로운 계층이 등장하게 되었다.


장서가의 생활[2]

고대 장서가의 하루는 어떠했을까? 아마 오늘날과 비슷했을 것으로 보인다. 아침에는 헌 책을 구매하러 외출하고, 책에 대해 의논 할 친구를 찾아가는 김에 잠시 책 시장에 들러 책의 시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친구들의 근황을 들으며 누가 최근 양서(良書)를 구매했는지, 또 어느 책방에 좋은 물건이 들어왔는지를 이야기했다. 그래서 대부분 오후나 저녁에야 집에 도착했고, 밥을 먹고 난 후에 책방에서 구해 온 낡은 책을 읽으며 깊이 연구하기 시작해 책의 발문을 쓰곤 했다.
장서가도 사실은 보통 사람과 다르지 않아서 책을 좋아하는 애호가와 별다른 구분이 없고, 매일의 생활이 책과 떨어질 수 없었다. 그들이 장서가가 될 수 있었던 일부의 원인은 그들 대부분이 관료 집안에서 출생했다는 것에 있었다. 돈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고, 게다가 그들은 진귀하게 여기는 책과 교환하는 것에 금전을 쓸 여력이 있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원인은 그들이 책에 빠져들어서 책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장서가의 역할

장서가 출판에 이용되려면 우선 진본(珍本), 선본(善本)을 찾아서 그것을 인쇄의 저본(底本)으로 삼아야 하고, 여기에 여러 차례의 교감과 정리 작업을 거쳐야 한다. 따라서 장서가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교감가이며 출판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장서가 가운데 “장서는 독서만 못하고, 독서는 각서만 못하니, 독서는 그저 자기를 위한 것이지만 각서는 남에게 베풀 수 있기 때문이다.(藏書不如讀書, 讀書不如刻書, 讀書只以爲己, 刻書可以澤人.)”라는 인식을 가지고, 자신의 장서를 이용해 저본으로 삼아 서적을 출판하던 주체들이 많았다.
장서가가 자신의 전적을 이용하여 서적을 출판·전파한 상황을 보면, 그 출판동기와 목적은 제각각 차이가 있겠지만 진귀한 전적의 보급에 큰 공헌을 했다.
장서가들이 출판에 힘쓴 이유는 도서에 대한 개인적인 기호에서, 혹은 자신의 명성과 지위를 높이기 위해 수 만 금을 아끼지 않고 장인을 불러 모아 도서를 간행하였고, 그 궁극적은 목표는 “서적을 판각하여 세상에 전해준다(刻書傳世)”는 것이었다.
또 출판을 통해 자신의 사상이나 문학이론을 전파하기 위해 출판에 참여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이 간행한 수많은 총서(叢書)와 유서(類書)는 대량의 가치 있는 문헌을 전파했다는 점에서 그 역할을 인정할 수 있다. 또 하나의 공헌은 삽화를 대량으로 간각하여 중국 판화예술을 발전시켰다는 점이다. 도서에 삽화가 있으면 독자들의 흥미와 이해를 증가시킬 수 있는데, 휘판(徽版) 도서는 아름다운 삽화를 대량으로 첨가함으로써 한때 출판시장을 점거하기도 하였다. 또한 장서가들은 극단을 양성해 문예활동을 후원하기도 하고, 장서들을 개방하여 문인 담론의 장을 제공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장서가들의 이러한 활동들로 인해 많은 책이 출간되자 인쇄관련 산업도 부흥하여 경제의 활성화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명대 중기 이후 청대까지 강남의 부유한 도시를 중심으로 장서가가 비약적으로 증가하여 고증학(考證學)과 목록학(目錄學), 골동(骨董)·감상학(鑑賞學) 등 독서치학(讀書治學)과 문화생활의 근간이 되었다. 이렇게 남겨진 장서목록들은 후대에도 중국의 고서분류와 목록학의 발전에 기여하였으며, 유실책 복원의 역할을 하였다.
장서가의 주체 중 하나였던 유상에 대해 살펴보면, “‘利’는 소인배가 추구하는 바로서, 군자는 이에 앞서 ‘義’를 취하여야 한다.”는 유교적인 사고에 따라 ‘利’를 취하되, ‘義’로써 ‘利’를 취하였다. 이들은 ‘仁者愛人’이란 유교적 철학을 상업경영에 도입하여서, 물질적 기초가 마련되고 나면 장사에서 벌어들인 영리를 사회의 문화사업에 환원하기도 하였다. 상인들은 수험서나 학술서 등의 실용서 외에 여가 선용의 수단으로서 소설, 희곡을 선호하여 통속문학의 창작과 전파에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유상은 상업경영에서 유가윤리인 절검(節儉)·성신(誠信)을 실천하고, 기꺼이 재산을 기부하여서 마을의 사당을 수리하거나 수리사업과 도로개설·보수를 수행하고, 가난한 자를 돕거나, 학교를 세우는 등의 일을 행했다. 유상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이름을 날리고, 또 가문과 조상을 빛나게 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명청 상인들은 특히 이러한 유상을 중심으로 하여서 중국장서문화의 형성에 크게 기여하였던 것이다.


장서가의 특성

장서가들의 출판활동은 일반의 개인적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출판업자와는 다르다. 서상(書商)의 출판은 영리를 목적으로 하므로 선택한 저본이 좋지 못하거나 교감이 정확치 않기도 하고, 도서의 장정(裝幀)에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심지어 오탈자와 연문(衍文) 등이 심해 오히려 후학들에게 나쁜 영향을 주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장서가의 출판의도는 이와는 차이가 있었는데, 일부는 자신의 사장(私藏)을 보충하기 위해 출판하는 경우도 있고, 또 일부는 치학(治學)의 목적이나 저술을 발표하기 위해 출판하였으며, 또 그 중에는 개인적인 취미로 하는 이도 있었다. 이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경우는 진귀한 전적(典籍)을 보존하기 위해 출판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장서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책은 출판할 도서 종류의 선택에서부터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 것이고, 또한 우수한 선본을 저본으로 삼았으며, 저본에 대해 성실하게 교정을 가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질적인 면에서 상당히 우수했다.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상인들 가운데서도 도서를 다루던 상인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비록 영리목적이긴 하였지만 상인 가운데서도 특히 유상의 성격이 짙은 상인이 도서를 많이 취급하였다. 일반 서상(書商)들보다는 유상(儒商)들이 취급하는 서적의 질이 조금은 더 우수했다. 상인들은 나중에 비싼 값을 받기 위하여 희귀본이나 학술성이 높은 도서를 개인적으로 구입하여 수장하기도 하였고, 또 일부는 서포(書鋪)를 열어서 책을 직접 인쇄하거나 판매하기도 하였다.


명청대 유명 장서가

명청시기에는 강남지역을 중심으로 배출된 장서가가 많았다. 엽성(葉盛), 전겸익(錢謙益), 전회(錢會), 장해붕(張海鵬), 장금오(張金吾), 황비열(黃丕烈), 황정감(黃廷鑒), 구용(瞿鏞), 모진(毛晋), 황정위(黃正位), 오면학(吳勉學), 동패(童佩), 마일관(馬日琯) 등이 중국 역사에서 대표적인 장서가들로 꼽힌다.

사대부

황비열

황비열(黃丕烈)은 장주(지금의 소주) 출신으로 건륭 28년(1763년)에 태어나 도광 5년(1825년)에 향년 63세로 사망했다.[3] 그는 건륭년간에 대장서가였는데, “나는 장서를 즐기며 또한 서책의 간행을 좋아하는데, 바라건대 소장하고 있는 것을 차례로 판각하고 싶구나.(余喜藏書而兼刻書, 欲擧所藏而次第刻之.)”라고 말한 바 있다. 그가 책을 간행할 자금이 없었을 때, 호과천(胡果泉)이 자금을 대겠다고 하자 황비열은 곧 박서정 소장 송본 《輿地廣記》를 선택하여 삼년간 호과천의 힘을 빌어 간행하였다. 이때 황비열은 “이 책이 세상에 사라져 드러나지 않은 지가 오래 되었다. 내가 비록 그것을 얻었으나 책 넣어 두는 궤짝에 들어 있을 따름이었다. 과천 선생이 나를 도와 새길 수 있게 해 주지 않았다면 어찌 사라진 것이 문득 나타날 수 있었겠는가! (是書煙沒不彰久矣, 余雖得之, 第藏之篋笴已耳, 敬非果川先生之助剞劂, 安能使晦者忽顯乎.)”라고 하며 책을 출판하였을 때의 기쁨을 표현하였다.
모진

출생 1599년
소주부(蘇州府) 상숙(常熟)
사망 1659년
관련 활동 정치, 문학

모진

모진(毛晋)은 명말청초의 유명한 장서루 급고각(汲古閣)의 주인으로 그의 장서는 84,000여 책에 이르는데 모두 급고각과 목경루(目耕樓)에 두었다. 모진은 평생을 도서의 수집에 바쳤는데 명 만력말에서 청 순치년간에 이르기까지 40여 년간 그가 출판한 서적은 600여 종에 이르며, 조판(雕版)만 해도 10만 9천여 편에 달한다. 당시에 “모진의 책이 천하를 다닌다. (毛氏之書走天下).”라는 말이 있었으니 모진의 출판사업이 얼마나 성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모진이 출판한 서적은 지금까지 선본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그 가운데 유명한 것으로 《십삼경주소(十三經注疏)》·《십칠사(十七史)》·《진체비서(津逮秘書)》·《육십종곡(六十種曲)》 등이 있다.
모진이 서적을 간각한 것은 판매를 위한 것이긴 하지만, 오로지 이윤만을 목적으로 하는 일반 서상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었다. 우선 그는 거금을 아까워하지 않고 송원(宋元) 판본을 사들였는데, 아예 자기 집 문 앞에 다음과 같은 방문(榜文)까지 붙여 둘 정도였다.

송판본을 가지고 오는 사람이 있으면, 이 집의 주인이 쪽으로 계산해 값을 쳐서 한 쪽당 이백을 낼 것입니다. 구초본(舊抄本)을 가져오는 사람에게는 한 쪽당 사십을 줄 것이며, 요즘의 선본을 가져오는 사람에게 다른 집에서라면 일천을 줄 것을 이 집 주인은 일천 이백을 줄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에 “삼백예순가지 장사 중에 모씨네에 책 파는 것 만한 게 없다네. (三百六十行生意, 不如鬻書于毛氏.)”라는 속언까지 있을 정도였다.


상인

  • <휘상> 대표적인 유상 중 휘주를 중심으로 활동한 상인으로 황정위(黃正位), 황계고(黃啓高), 오면학(吳勉學) 등이 있다.

황정위

황정위(黃正位)는 대표적인 유상이라 할 수 있는 휘상 가운데 안휘(安徽) 흡현(歙縣) 사람으로 존생관(尊生館)을 운영하면서 책을 인쇄하여 팔기도 하였다. 그가 판각한 『초현(草玄)』, 『우초(虞初)』, 『양춘주(陽春奏)』, 『전등화(剪燈話)』, 『신증격고요론(新增格古要論)』은 매우 유명하다.

황계고

황계고(黃啓高) 역시 대표적인 유상이라 할 수 있는 휘상 가운데 안휘(安徽) 흡현(歙縣) 사람으로 처음에는 혼자서 책을 메고 시골 마을의 골목길을 다니면서 팔았는데, 후에 연고서루(延古書樓)를 지어서 책을 간행하고 팔았다. 그의 아들 황국인(黃國印), 황국이(黃國怡), 황국전(黃國傳), 황국돈(黃國敦)은 모두 아버지의 직업을 계승하여서 책을 파는 것으로 생활하였다.

오면학

오면학(吳勉學) 역시 대표적인 유상이라 할 수 있는 휘상 가운데 안휘(安徽) 흡현(歙縣) 사람으로 집이 대대로 상업을 하였으므로 집안 재산이 아주 부유하였다. 그는 평소에 책을 수집하여 소장하기를 좋아하였으며, 사고재(師古齋)를 세워서 서적을 출판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출판한 책은 경(經), 사(史), 자(子), 집(集)을 포함하여 총서(叢書)와 유서(類書)를 똑같이 중히 여겼지만 특히 의학전적의 교감과 출판에 매우 공헌이 크다. 오면학은 의서(醫書)를 간행하는데 10만 은량의 비용을 썼다고 한다. 그가 출판한 책으로는 의학에서의 명저인 『하간육서(河間六書)』, 『고금의통정맥(古今醫統正脈)』, 『난경본의(難經本義)』, 『침구갑을경(針灸甲乙經)』 등이 있다. 의서출판은 아주 쉽게 이익을 얻을 수 있었는데 그는 여기에서의 이익을 기초로 하여 다시 경, 사, 자, 집의 여러 책을 간행하여서 명예와 이익을 동시에 얻었다. 그의 아들 오중형(吳中珩)도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일생을 서적출판에 전념하여 부자가 모두 장서가 겸 출판가로 유명하다.


  • <용유상인> 중국 전통문화 속에서 휘상처럼 유학의 영향을 특히 많이 받은 상인으로, 대표적으로 동패(童佩)를 들 수 있다.

동패

동패(童佩)는 유학의 영향을 많이 받은 상인이었던 용유상인(龍遊商人)으로 아버지를 따라 오(吳)와 월(越) 사이를 왕래하면서, 서적장사를 하였다. 그는 시문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서화금석문(金石文)을 고증하는 데에도 뛰어났다. 그는 곤산(昆山)으로 가서 귀유광(歸有光)에게서 배움을 묻기도 하였으며, 당시의 명사인 왕세정(王世貞), 호응린(胡應麟), 치등(穉登) 등과 교유하였다. 그의 집에는 25,000권의 책들이 소장되어 있었는데, 그중에는 진귀하면서도 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서적들이 아주 많았다. 호응린은 그의 장서 서목(書目)을 보고서 “전열된 경사자집의 서적은 모두 섬뜩하리만치 마음에 들어, 나로 하여금 손과 발을 움직이며 춤을 추게 할 정도였다”라고 극히 칭상하고 기린 바가 있다.


  • <양주상인> 양주에는 휘주 출신 상인 강운데 장서가들이 아주 많았다. 양주는 수운시대 때 교통의 중심지로서 상업중심이었으므로, 이곳은 상대적으로 책을 쉽게 팔 수 있었고, 보급도 빨리 되었다. 양주의 상인들은 상업적 이익을 목적으로 책을 간행하기 위해서 많은 책을 소장했다고 볼 수 있다.
『송시기사(宋詩紀事)』

저자    여악(厲鶚, 1730~1802년)
간행시기  청대

마일관

마일관(馬日琯)은 원래 휘주(徽州) 기문(祁門) 출신이지만 양주(揚州)로 이사하였던 사람이다. 동생 마일로(馬日璐)와 함께 ‘양주이마(揚州二馬)’로 불리었다. 그는 희귀한 책을 보면 천금을 아끼지 않고 구입하였다고 한다. 그의 소영롱산관(小玲瓏山館)에는 10만 여 권의 책들이 수장되어 있었는데, 여악(厲鶚)의 『송시기사(宋詩紀事)』는 바로 이곳에 소장되어 있던 책을 크게 참고한 것이다.

강춘

강춘(江春)은 역시 휘주 흡현(歙縣) 출신으로 양주에서 염상을 하였다. 그는 평민으로 천자와 사귐을 맺었다고 할 정도로 휘상 가운데서도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의 집에는 수월독서루(隨月讀書樓)가 있는데, 당시의 시문을 가려 뽑아 『수월독서시문(隨月讀書詩文)』을 간행하였다. 또 강춘의 동생으로서 형과 함께 ‘이강선생(二江先生)’으로 불린 강방(江昉)은 손님이 자기 집에 일 년이 넘도록 머물러 있어도 싫어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그의 집에는 자영롱관(紫玲朧館)이 있었는데 『수월독서루사초(隨月讀書樓詞抄)』를 간행한 바가 있다.


  • <휴녕상인> 명대 만력 년간에는 휴녕 출신 상인들이 대상인으로서 대지주인 동시에 대출판가, 대장서가로 활동하였다.

왕정눌

왕정눌(汪廷訥)은 금릉에서 환취당서방(環翠堂書坊)을 설립하였다. 환취당서방은 자본이 풍부하여서 인서국(印書局), 장판소(藏版所) 등을 세워 많은 책을 출판하였는데, 여기서 각인한 책으로는 『인경양추(人鏡陽秋)』, 『환취당악부(環翠堂樂府)』, 『사자후(獅子吼)』, 『초당여의(草堂餘意)』 등 수십 종이 있다.

호정언

호정언(胡正言) 역시 휴녕출신 상인인데 금릉에서 십죽재(十竹齋)ff 세워서 『십죽재총화보(十竹齋叢畵譜)』, 『십죽총전보(十竹叢箋譜)』, 『십죽총서보(十竹叢書譜)』, 『설문자원(說文字原)』 등을 각인 출판하였다. 이것들은 모두 중국출판사에서의 걸작들이다.


각주


참고문헌

  • 장미경, 명청대 강남지역의 출판문화: 출판의 주체를 중심으로, 한국중문학회, 중국문학연구 제35집: pp.103-129, 2007.
  • 권호종 외, 명청상인의 장서문화, 한국중국학회, 중국학보 제60집: pp.73-93,2009.
  • 황지영, 명말청초 과거수험용 서적의 상업출판과 전파, 연세대학교, 학위논문(박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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