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화폐"의 두 판 사이의 차이
(→하후기-상전기) |
(→하후기-상전기) |
||
12번째 줄: | 12번째 줄: | ||
===하후기-상전기=== | ===하후기-상전기=== | ||
:하나라 후기부터 상나라 전기 시기에 중국역사상 최초의 자연화폐이자 유통화폐 개념을 지닌 “패폐 (貝幣)”가 등장했다. 패폐는 중국 남부에서 서식하는 “패치”라는 종류의 조개다. | :하나라 후기부터 상나라 전기 시기에 중국역사상 최초의 자연화폐이자 유통화폐 개념을 지닌 “패폐 (貝幣)”가 등장했다. 패폐는 중국 남부에서 서식하는 “패치”라는 종류의 조개다. | ||
− | 물물교환으로는 공정한 거래를 하기가 어렵고, 물건자체의 가치를 측정하기 어렵다는 문제로 화폐라는 개념이 생겼다. 상나라는 바다와 인접한 구역이 적고, | + | 물물교환으로는 공정한 거래를 하기가 어렵고, 물건자체의 가치를 측정하기 어렵다는 문제로 화폐라는 개념이 생겼다. |
− | 조개 또한 단단하고 훼손염려가 적어 당시 귀중한 물품으로서 화폐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 + | 상나라는 바다와 인접한 구역이 적고, 조개 또한 단단하고 훼손염려가 적어 당시 귀중한 물품으로서 화폐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
===상후기=== | ===상후기=== |
2016년 5월 30일 (월) 11:05 판
목차
화폐의 기능
중국 화폐제도
원시시대
- 신석기시대에 농업기술의 발달과 수렵도구의 발전에 따라서 잉여자원이 발생하여, 잉여 생산물을 교환하는 “거래” 개념이 형성되었다. 대표적으로 염제의 일중시장(日中市场: 해가 중천에 뜨면 거래가 필요한 사람들이
모여서 각자 원하는 물건을 타인과 교환하는 장소)을 예로 들 수 있다. 일중시장은 시간의 개념이 뚜렷하게 형성되지 않은 후대에도 계속되었고, 주역의 계사에는 일중시장을 “해가 가운데 떴을때 저자하여 천하의 백성을 이르게 하고 천하의 화물을 모아 교역하여 물러나 각자 그 적소를 얻으니 대체로 서합괘에서 취한 것이다 (日中為市,致天下之民,聚天下之貨,交易而退,各得其所, 蓋取諸噬嗑)”라고 묘사되었다. 물건 자체가 화폐로서의 기능을 행하는 시기이다.
하후기-상전기
- 하나라 후기부터 상나라 전기 시기에 중국역사상 최초의 자연화폐이자 유통화폐 개념을 지닌 “패폐 (貝幣)”가 등장했다. 패폐는 중국 남부에서 서식하는 “패치”라는 종류의 조개다.
물물교환으로는 공정한 거래를 하기가 어렵고, 물건자체의 가치를 측정하기 어렵다는 문제로 화폐라는 개념이 생겼다. 상나라는 바다와 인접한 구역이 적고, 조개 또한 단단하고 훼손염려가 적어 당시 귀중한 물품으로서 화폐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상후기
- 상나라의 상업의 발전으로 자연화폐인 패폐는 점점 한계를 드러냈다. 따라서 사람들은 돌, 뼈, 도자기 등으로 패폐의 형태를 조형한 석패, 골패, 도패 등을 만들었다.
상나라 후기에는 청동으로 만든 패폐가 등장했다. 이 주폐는 중국 최초의 동으로 만든 인공화폐 금속화폐였다.
춘추전국시대
- 춘추전국시대는 화폐의 가장 큰 특징은 4대 화폐 체제의 등장이다
.
- (1)포폐(布幣): 조, 한, 위, 초나라에서 사용되었으며 원래의 농기구인 삽의 형태를 변환시켜 주조한 것으로 중부의 농경지역 국가에서 자주 사용되었다. 대체적으로 두 가지 유형인 공수포와 평수포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중국의 최초의 은화폐인 은 공수포가 초나라에서 등장하였다.
- (2)도폐(刀幣): 제, 연나라에서 사용되었던 생산기구 도의 형태를 화폐로 주조한 것이다. 형태에서 제나라와 연나라의 도폐간에는 차이가 있다.
- (3)환폐(環幣): 진나라에서 사용되던 화폐로 당시의 방직기구인 “방륜”을 본떠서 만들었다. 크게 통일 전 진나라의 원형원공형 환폐와 통일 후 진나라의 원형방공형 환폐로 나눌 수 있다.
- (4)의비전(蟻鼻錢): 초나라에서 사용되던 의비전이라는 동패에서 발전된 형태의 화폐인데 외형이 무섭고 귀신의 얼굴 같다하여 귀안전(鬼脸钱)이라고 불렸다.
의비전 윗부분이 마치 콧등에 개미 한 마리가 올라탔을 때 지어지는 얼굴 표정과 같아 의비전이라 명명된 것이다. 송나라의 유명한 화폐연구서 “천지”에는 이 동전을 “ 此钱背平面凸起,长七分,下阔三分,上锐者可阔一分,重十二铢,面有文如刻镂,不类字,世谓之蚁鼻钱” “이 돈은 윗부분이 볼록 튀어나왔고 2.1cm X 9mm 의 크기이며 무게는 약 7.8g이며 안면이 글씨가 아니라 해골 같았다” 라고 묘사했다.
그리고 초나라에서 영원(郢爰) 이라는 중국에서 최초로 사용된 금화폐가 등장했다.
진
- 진 나라의 전국통일로 인해 전국시대는 종결되었다. 진시황은 춘추전국시대의 다양한 화폐들을 전부 원형방공형 환폐인 “반량전”으로 통일시켰다. 여기서 량이란 무게단위를 뜻하고 반량은 8g의 개념이다.
원형방공형 환폐의 형태에 대한 기원의 첫 번째 추측은 “천원지방”설에 근거한다. 진나라의 대표적인 사론서인 여씨 춘추 기록에 "천도원 지도방 성왕법지 소이입상사 (天道圓,地道方, 聖王法之, 所以立上下)" 뜻은 하늘은 둥굴고 땅은 네모지며 성왕이 이를 규정했고 상하를 나눈다고 했다. 두 번째 추측은 단순하게 대장장이의 지혜를 반영한다. 가운데가 네모형태면 “반량”두 글자의 위치선정이 쉬워질뿐더러 고정시키기 용이하여 마찰과정이 쉬워진다. 반량전은 이후 동전형태의 기본형태가 된다.
서한
- 진나라 멸망 후 서한시기에 오수전이 등장하였다. 서한 초기에 지방정부가 스스로 화폐를 주조하게끔 한 결과 화폐시장에 혼란이 왔다.
한무제 시절 6번의 화폐개혁 끝에 지방정부의 주폐권을 폐지하고 오직 중앙정부만이 화폐를 발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오수전은 중국 역사상 사용기간이 가장 긴 화폐다. 서한 후반기 오수전의 가치가 하락하자 왕망은 큰 화폐단위의 오수전 50개의 가치에 상응하는 대천오십과 5000개의 가치에 상응하는 도평오천을 발행했다. 당시 두 개의 도평오천은 금 1량의 가격과 상응한다고 한다.
수
- 수나라 동전의 특징은 기존 오수전에서 황제의 연호를 새긴 것이다. 이러한 형식은 후에도 유지된다. 위진남북조 때의 혼란스러웠던 오수전의 형태는 모두 개황오수로 통일되었다.
여기서 기존 오수전과의 차이점은 바로 “오”자의 표기법이다. 이 표기법에 대해 학자들은 두 가지의 의견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는 단순한 표기법 상의 차이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문제 이후의 황제인 수양제의 폭정을 예견하는 의미라는 것이다. “|X” 를 전환하면 凶 과 흡사하기 때문. 수 양제시기의 오수전은 정부 재정악화로 오수전의 동의 비율을 낮춰 발행하여, 동전이 흰색을 띄어 “오수백전(五铢白钱)”이고도 불렸다.
당
- 당나라의 “개원통보(开元通宝)”는 역사상으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먼저 형태와 동의 비중이 일정하지 않은 오수전을 폐지하고, 당 고조 연호로 이름을 지어 일정한 동전의 규격을 규정했다.
그리고 개원통보의 발행 이후 동전을 무게 이름이 아닌 “통보”라고 불렀다. 그리고 동전을 “량”이라는 무게단위에서 “문”이라는 개수 단위로 부르기 시작하였다. 당의 개국 이후 100년간 물가의 변동은 굉장히 심했다. 화폐의 지속적인 발행과 나라의 발전으로 620년대와 720년대 사이에는 물가가 약 360배가 올라 동전의 상대적인 가치가 낮아졌다. 또한 금으로 주조된 개원통보도 존재하였는데, 이는 화폐의 용도보다 황실이나 대신들이 사적으로 주조한 유희, 소장용 화폐였다. 개원통보는 한국 화폐역사에도 영향을 주었다. 조선시대 최초의 동전이라 불리는 조선통보 역시 당나라의 개원통보를 모방해서 주조한 것이다. 750~760년 중 당 숙종은 동전의 가치하락에 대한 대처방안으로 “건원중보乾元重寶”와 “중륜건원중보重輪乾元重寶”를 발행했다.
송
- 오대십국에 이어 송시기에는 철전이 많이 발행되었는데 당시 철전10문은 동전1문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송나라 구체적으론 북송 때 중국 화폐사상 또 하나의 상징적인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바로 지폐의 등장이다.
중국의 지폐 사용은 유럽지역보다 700년 앞선 세계 최초였다. 청나라 속통전(续通典)에는 지폐가 등장한 이유에 대해서 ”북송당시 상인이나 민간인이 대량의 동전을 지니고 다니기 불편하여 지폐를 발행했다 交子三年一届,始于宋代之铜钱与铁钱溷用而不便于携”라고 기록되었다. 중국역사상 최초의 화폐인 ‘교자’의 원래 용도는 사실 화폐가 아니라 화폐 보증서였다. 당시 상인이나 부호들이 대량의 화폐를 가지고 다니기 불편하여 이를 화폐보관소에다 맡기곤 했는데 그 화폐에 대한 소유권을 나타내는 문서였다. 수 년간 교자의 광범위하고 편리한 사용에 의해서 1023년 북송정부는 교자를 법정화폐로 지정하였고 중앙관청에서 발행했기에 이를”관교자”라 칭했다. 그 후 남송에도 ‘회자’라는 지폐가 발행되었다.
원
- 원나라의 동전 역시 기존의 개원통보의 형식을 따르는데 대표적으로는 원 회종의 지정통보(至正通宝)가 있다. 그리고 원나라는 중통원보교초(中統元寶交鈔)라는 대표적인 지폐를 사용했다.
그리고 원나라 때는 앞서 언급했던 당나라의 은정의 변화 형태인 화폐를 원보라고 명칭 하였고, 은 50량의 규격을 원보라고 칭했다.
명
- 명나라 때의 동전은 대표적으로 명나라 개국황제인 주원장의 연호를 붙인 홍무통보(洪武通宝)인데, 이 홍무통보는 기존형태는 변하지 않고 무게 별로 1문, 2문, 3문, 5문, 10문 가치를 지닌 5가지 종류가 발행되었다.
그리고 명나라의 유일하게 발행되었던 지폐는 대명보초이다. 이 역시 동전과 같이 5가지의 종류가 발행되었다.
청
- 청나라의 동전 중 가장 오래 사용되었던 것은 청 고종의 건륭통보(乾隆通寶)이다. 그리고 청나라 말기에 광서제는 서양의 기계식 주조법을 도입하여 은원(银元)을 발행했다.
인공적인 화폐주조에서 기계적인 주조의 형식으로 바뀌면서 현재의 동전과 유사한 형태를 가졌다. 광서제 24년때 위안元이라는 단위가 공식적으로 사용되었고, 은원 1문에 대해 위안이라는 단위를 부여했고, 동전 1문에 대해선 1쟈오角 라는 단위를 부여했다.
중화인민공화국
- 중화민국 개국선언 1년 후 위안스카이가 대총통에 부임하고 자신의 얼굴을 은원에다 실리게 하였고 이는 속칭 “원대두”라고 불렸다. 원대두는 약7억5천만개가 발행되었고 역사상 파급력이 가장 컸던 원형화폐라고 평가되었다.
그리고 당시의 기계인쇄형 지폐를 사용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동전이나 은원을 주조하지 않고 니켈과 동 혹은 알류미늄과 동의 합금으로 동전을 주조하여 이를 현재까지 “경폐”라고 부르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현재까지 5번의 지폐버전을 갱신하였지만 지폐의 인물은 모택동으로 모두 동일하다.
화폐로 인한 역사적 사건
아편전쟁
중국의 화폐 사상
참고문헌
- 彭信威,『中国货币史』,上海人民出版社
- 薛天明 , 论文 『中国历代货币形式研究』, 湖北徐寨中学
- 정재웅, 「중국의 화폐경제체제에 관한 연구: 송(宋)-원(元) 시대를 중심으로」, 『한국금융공학회 학술발표논문집』 2012권2호 pp.404-421, 한국금융공학회, 2012
- 박진근,『경제학대사전』, 누리미디어, 20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