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화폐

Chinese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중국의 고대 화폐 사상

중앙정부의 통화정책

동양에서 화폐가 사용된 기원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는 어려운 문제이다. 반고(班固)의 한서(漢書)에 의하면 중국에서 최초로 화폐가 사용된 것은 전설상의 삼황(三皇) 중 한명인 신농(神農)으로
그는 백성들의 삶을 편하게 하기 위해 장터를 만들고, 물물교환을 편하게 하기 위해 화폐를 만들었다고 한다.그렇지만 전설이 아닌 역사에서 화폐의 정확한 기원을 찾는 것은 어려운데,
확실한 것은 적어도 춘추전국시대부터 화폐를 사용한 경제가 발달했다는 사실이다.
춘추전국시대는 서로 경쟁하는 국가들 간에 우위를 점하기 위한 ‘국가경영'의 인식이 최초로 나왔던 제자백가백가쟁명의 시대로“그들이 밟지 않은 사유의 땅은 단 한 곳도 없다”고 평할 정도로 넓고 깊은 사유가 이루어진 시기이다. 이 시기부터 중국에서는 세상을 다스리는 방법의 한 갈래로 ‘인민들의 먹고사는 문제’ 즉, 현대적 의미에서의 경제를 중요하게 여겼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화폐는 중요한 통치수단으로 국가가 관리한다는 인식이 강했다.

통화량 조절

국가가 통화를 통제해야 한다는 사고는 후대에까지 이어지는 동양의 중요한 사상인데, 당송팔대가 중 한명인 백거이의 다음과 같은 글을 통해서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곡물과 천은 농민이 생산한다. 천연자원은 공장(工匠)이 가공한다. 부와 상품은 상인이 유통시킨다.
그리고 화폐는 통치자가 관리한다. 통치자는 이 네 가지 가운데 하나를 관리함으로써 나머지 세 가지를 통제한다.

 
— 백거이


춘추전국시대의 다양한 사상과 사상가들 중에서, 이러한 화폐경제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이 『관자(管子)』이다.
이 책은 춘추시대 첫 패자인 제환공(齊桓公)과 그의 재상이었던 관중(管仲)간의 문답형식으로 된 부국강병에 관한 지침서이다.
전체 86편 중 23편에서 부국강병을 위한 실질적인 경제정책을 다루고 있는데, 그 중에는 후세에 영향을 끼치는 화폐경제학에 관한 내용도 상당수 있다.

가격 조정

먼저 위에서 인용한 백거이의 언급과 유사한내용이 『관자』 「제 35편 치미(侈靡)」에 다음과 같이 서술된다.

곡식을 가벼이 여기고 주옥, 예약을 공경하면 사람의 활동을 제약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곡식을 천히 여기고 주옥을 공경하며, 예약을 좋아하고 사업을 천히 여기는 것은, 근본 발전을 위한 시작입니다.
… 그렇지 않으면 힘센 사람이 주옥을 가지고 있고, 머리 좋은 사람이 주옥을 조종할 수 있어서, 주옥의 가격을 마음대로 조정하여 귀한 것을 천하게 만들고 천한 것을 귀하게 만듭니다. …

 
— 『관자』「제 35편 치미(侈靡)」

이 글에서, ‘힘센 사람이 주옥을 가지고 있고, 머리 좋은 사람이 주옥을 조종할 수 있어서, 주옥의 가격을 마음대로 조정하여 귀한 것을 천하게 만들고 천한 것을 귀하게 만듭니다.’ 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관자』에서는 국가가 화폐를 통제하지 않으면 민간의 권력자가 이를 농단하여 국가경제를 혼란 시키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인식이 있다. 즉, 화폐는 국가가 통제해야 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통치자는 백성의 삶을 안정시킬 수 있다는 사고가 있었던 것이다.

또한 국가의 물가와 백성의 삶에 관해

나라를 잘 다스리는 군주는, 황금과 저울추가 저울의 양끝에서 서로 드는 것과 같아서, 저울추를 무겁게 하면 황금이 기울어집니다.
그러므로 재정 관리를 때에 맞는 정책으로 다스리면, 나라의 힘이 강성해집니다. 불변의 원리만 고수하여 다스린다면 나라의 힘이 쇠약해집니다.
지금 양식 가격이 우리나라는 높고 다른 나라는 낮다면, 제후들은 알아서 우리나라로 양식을 유출시킬 것이니, 이는 마치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물가가 높으면 물자가 모이고, 물가가 낮으면 물자가 흩어집니다. 가격이 높아서 물자를 모으려고 가격이 낮은 물건을 사다가 관리하면, 천하의 재물이 우리 수중에 모입니다.
물자를 비축하면 가격이 오르고, 방출하면 내리며, 민간에 흩어지게 되어 풍족해집니다. 화폐 가격이 높아지면 백성이 죽음을 다투어 이익을 탐하고, 화폐 가격이 낮아지면 버려두고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군주는 화폐 유통을 정책적으로 조절해야 합니다.지역을 통제해야 합니다. 천하의 재정 정책은 모두 물가 조절 방법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 『관자』「제 78편 규탁(規度)」

또한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도 물가 조절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다.

무릇 화폐가치가 높아지면 물가는 떨어지고, 화폐 가치가 떨어지면 물가는 높아지며, 양식 가격이 올라가면 황금의 가치는 떨어집니다.
군주께서는 양식·화폐·황금을 저울질하는 권력을 통제해야 천하를 안정시킬 수 있습니다. 이것이 천하를 지키는 방법입니다.

 
— 『관자』「제 76편 산지수(山至數)」

즉, 화폐가 부족하면 Deflation이 발생하고 화폐가 과도하게 유통되면 Inflation이 발생하기 때문에 국가에서 적정 화폐량을 정책적으로 관리하여, 안정적인 국가 재정의 운용과 백성의 삶의 수준의 향상을 성취할 수 있음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자』의 사고를 통해 우리는 고대 중국에서 화폐와 인플레이션의 관계에 대해 현대 경제학과 동일한 수준의 사고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통화량과 국민 삶의 질

마지막으로 화폐와 국부와의 관계에 대해

나라는 단지 화폐만 5배 늘었습니다. 그러나 초나라 군주는 스스로 득의 양양하여 양식을 다스립니다. 화폐가 5배 늘어났다는 것으로 이에 초나라가 강해졌다고 착각합니다.

 
— 『관자』「제 84편 경중(輕重) 무(戊)」


이 글에서 나라는 중상주의적 사고를 하고 있고, 관자는 고전파 경제학적 사고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화폐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화폐를 통해 백성들이 실제로 구매할 수 있는 재화가 얼마나 풍족한지가 중요한 것이고,
국가가 화폐를 운용하는 목적은 귀금속을 축적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백성들이 부유한 삶을 누리게 만들기 위함인 것이다.

이상의 『관자』에 관한 논의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에서의 화폐는, 앞 절에서 보았듯이, 상거래의 매개체로서 물건의 ‘정당한’ 가치를 측정하는 수단으로 발달한 서양과 달리, 일찍부터 ‘국가 통치의 수단’으로 인식되었고, 이 맥락에서 국가의 화폐에 대한 통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관자』의 인식은 이후 중국의 화폐경제정책을 결정짓는 중요한 사상이 된다.

중국 화폐제도

원시시대

신석기시대에 농업기술의 발달과 수렵도구의 발전에 따라서 잉여자원이 발생하여, 잉여 생산물을 교환하는 “거래” 개념이 형성되었다.

대표적으로 염제의 일중시장(日中市场: 해가 중천에 뜨면 거래가 필요한 사람들이 모여서 각자 원하는 물건을 타인과 교환하는 장소)을 예로 들 수 있다.
일중시장은 시간의 개념이 뚜렷하게 형성되지 않은 후대에도 계속되었고, 주역의 계사에는 일중시장을 “해가 가운데 떴을때 저자하여 천하의 백성을
이르게 하고 천하의 화물을 모아 교역하여 물러나 각자 그 적소를 얻으니 대체로 서합괘에서 취한 것이다 (日中為市,致天下之民,聚天下之貨,交易而退,各得其所, 蓋取諸噬嗑)”라고 묘사되었다.
물건 자체가 화폐로서의 기능을 행하는 시기이다.

하후기-상전기

하나라 후기부터 상나라 전기 시기에 중국역사상 최초의 자연화폐이자 유통화폐 개념을 지닌 “패폐 (貝幣)”가 등장했다. 패폐는 중국 남부에서 서식하는 “패치”라는 종류의 조개다.

물물교환으로는 공정한 거래를 하기가 어렵고, 물건자체의 가치를 측정하기 어렵다는 문제로 화폐라는 개념이 생겼다. 상나라는 바다와 인접한 구역이 적고, 조개 또한 단단하고 훼손염려가 적어 당시 귀중한 물품으로서 화폐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패폐.jpg
패폐(貝幣)

상후기

상나라의 상업의 발전으로 자연화폐인 패폐는 점점 한계를 드러냈다. 따라서 사람들은 돌, 뼈, 도자기 등으로 패폐의 형태를 조형한 석패, 골패, 도패 등을 만들었다.

상나라 후기에는 청동으로 만든 패폐가 등장했다. 이 주폐는 중국 최초의 동으로 만든 인공화폐 금속화폐였다.

동패.jpg
동패(銅貝)

춘추전국시대

춘추전국시대는 화폐의 가장 큰 특징은 4대 화폐 체제의 등장이다
  • (1)포폐(布幣): 조, 한, 위, 나라에서 사용되었으며 원래의 농기구인 삽의 형태를 변환시켜 주조한 것으로 중부의 농경지역 국가에서 자주 사용되었다. 대체적으로 두 가지 유형인 공수포와 평수포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중국의 최초의 은화폐인 은 공수포가 나라에서 등장하였다.

공수포.jpg 평수포.jpg 은공수포.jpg
공수포(空首布)_____________________평수포(平首布)______________은공수포(银空首布)

  • (2)도폐(刀幣): , 연나라에서 사용되었던 생산기구 도의 형태를 화폐로 주조한 것이다. 형태에서 제나라와 연나라의 도폐간에는 차이가 있다.


제국도.jpg 연국도.jpg
제국도___________________________연국도


  • (3)환폐(環幣): 나라에서 사용되던 화폐로 당시의 방직기구인 “방륜”을 본떠서 만들었다. 크게 통일 전 진나라의 원형원공형 환폐와 통일 후 진나라의 원형방공형 환폐로 나눌 수 있다.


환폐.jpg
원형원공형 환폐(環幣)


  • (4)의비전(蟻鼻錢): 나라에서 사용되던 의비전이라는 동패에서 발전된 형태의 화폐인데 외형이 무섭고 귀신의 얼굴 같다하여 귀안전(鬼脸钱)이라고 불렸다.

의비전 윗부분이 마치 콧등에 개미 한 마리가 올라탔을 때 지어지는 얼굴 표정과 같아 의비전이라 명명된 것이다.
송나라의 유명한 화폐연구서 “천지”에는 이 동전을 “ 此钱背平面凸起,长七分,下阔三分,上锐者可阔一分,重十二铢,面有文如刻镂,不类字,世谓之蚁鼻钱”
“이 돈은 윗부분이 볼록 튀어나왔고 2.1cm X 9mm 의 크기이며 무게는 약 7.8g이며 안면이 글씨가 아니라 해골 같았다” 라고 묘사했다.

의비전.jpg
의비전(蟻鼻錢)


그리고 초나라에서 영원(郢爰) 이라는 중국에서 최초로 사용된 금화폐가 등장했다.

영원.jpg
영원(郢爰)

나라의 전국통일로 인해 전국시대는 종결되었다. 진시황은 춘추전국시대의 다양한 화폐들을 전부 원형방공형 환폐인 “반량전”으로 통일시켰다. 여기서 량이란 무게단위를 뜻하고 반량은 8g의 개념이다.
원형방공형 환폐의 형태에 대한 기원의 첫 번째 추측은 “천원지방”설에 근거한다. 진나라의 대표적인 사론서인 여씨 춘추 기록에 "天道圓,地道方, 聖王法之, 所以立上下 하늘은 둥굴고 땅은 네모지며 성왕이 이를 규정했고 상하를 나눈다" 고 했다.

두 번째 추측은 단순하게 대장장이의 지혜를 반영한다. 가운데가 네모형태면 “반량”두 글자의 위치선정이 쉬워질뿐더러 고정시키기 용이하여 마찰과정이 쉬워진다. 반량전은 이후 동전형태의 기본형태가 된다.


반량전.jpg
반량전

서한

진나라 멸망 후 서한시기에 오수전이 등장하였다. 서한 초기에 지방정부가 스스로 화폐를 주조하게끔 한 결과 화폐시장에 혼란이 왔다.
한 무제 시절 6번의 화폐개혁 끝에 지방정부의 주폐권을 폐지하고 오직 중앙정부만이 화폐를 발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오수전은 중국 역사상 사용기간이 가장 긴 화폐다.

서한 후반기 오수전의 가치가 하락하자 왕망은 큰 화폐단위의 오수전 50개의 가치에 상응하는 대천오십과 5000개의 가치에 상응하는 도평오천을 발행했다. 당시 두 개의 도평오천은 금 1량의 가격과 상응한다고 한다.


오수전.jpg 대천오십.jpg 도평오천.jpg
오수전 (五铢钱) ______________ 대천오십(大泉五十) ____________ 도평오천(刀平五千)

수나라 동전의 특징은 기존 오수전에서 황제의 연호를 새긴 것이다. 이러한 형식은 후에도 유지된다. 위진남북조 때의 혼란스러웠던 오수전의 형태는 모두 개황오수로 통일되었다.
여기서 기존 오수전과의 차이점은 바로 “오”자의 표기법이다. 이 표기법에 대해 학자들은 두 가지의 의견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는 단순한 표기법 상의 차이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문제 이후의 황제인 수양제의 폭정을 예견하는 의미라는 것이다. “|X” 를 전환하면 凶 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수 양제시기의 오수전은 정부 재정악화로 오수전의 동의 비율을 낮춰 발행하여, 동전이 흰색을 띄어 “오수백전(五铢白钱)”이고도 불렸다.

개황오수.jpg 오수백전.jpg
_______________________개황오수(开皇五铢)___________________________오수백전(五铢白钱)

나라의 “개원통보(开元通宝)”는 역사상으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먼저 형태와 동의 비중이 일정하지 않은 오수전을 폐지하고, 당 고조 연호로 이름을 지어 일정한 동전의 규격을 규정했다.

그리고 개원통보의 발행 이후 동전을 무게 이름이 아닌 “통보”라고 불렀다. 그리고 동전을 “량”이라는 무게단위에서 “문”이라는 개수 단위로 부르기 시작하였다. 당의 개국 이후 100년간 물가의 변동은 굉장히 심했다.
화폐의 지속적인 발행과 나라의 발전으로 620년대와 720년대 사이에는 물가가 약 360배가 올라 동전의 상대적인 가치가 낮아졌다.

또한 금으로 주조된 개원통보도 존재하였는데, 이는 화폐의 용도보다 황실이나 대신들이 사적으로 주조한 유희, 소장용 화폐였다.

개원통보는 한국 화폐역사에도 영향을 주었다. 조선시대 최초의 동전이라 불리는 조선통보 역시 당나라의 개원통보를 모방해서 주조한 것이다.
750~760년 중 당 숙종은 동전의 가치하락에 대한 대처방안으로 “건원중보乾元重寶”와 “중륜건원중보重輪乾元重寶”를 발행했다.

개원통보.jpg 조선통보.jpg
________개원통보(开元通宝)___________조선통보

중륜건원통보.jpg건원통보.jpg
_______중륜건원통보_________________건원통보

송나라 구체적으론 북송 때 중국 화폐사상 또 하나의 상징적인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바로 지폐의 등장이다. 중국의 지폐 사용은 유럽지역보다 700년 앞선 세계 최초였다.
청나라 속통전(续通典)에는 지폐가 등장한 이유에 대해서 ”북송당시 상인이나 민간인이 대량의 동전을 지니고 다니기 불편하여 지폐를 발행했다 交子三年一届,始于宋代之铜钱与铁钱溷用而不便于携”라고 기록되었다.

중국역사상 최초의 화폐인 ‘교자’의 원래 용도는 사실 화폐가 아니라 화폐 보증서였다. 당시 상인이나 부호들이 대량의 화폐를 가지고 다니기 불편하여 이를 화폐보관소에다 맡기곤 했는데 그 화폐에 대한 소유권을 나타내는 문서였다.
수 년간 교자의 광범위하고 편리한 사용에 의해서 1023년 북송정부는 교자를 법정화폐로 지정하였고 중앙관청에서 발행했기에 이를”관교자”라 칭했다. 그 후 남송에도 ‘회자’라는 지폐가 발행되었다.

교자.jpg 회자.jpg
__________교자(交子) _________ 회자(会子)

원나라의 동전 역시 기존의 개원통보의 형식을 따르는데 대표적으로는 원 회종의 지정통보(至正通宝)가 있다. 그리고 원나라는 중통원보교초(中統元寶交鈔)라는 대표적인 지폐를 사용했다.

그리고 원나라 때는 앞서 언급했던 당나라의 은정의 변화 형태인 화폐를 원보라고 명칭 하였고, 은 50량의 규격을 원보라고 칭했다.

지정통보.jpg 중통원보교초.jpg 원보.jpg
_______지정통보____________________중통원보교초___________________원보

명나라 때의 동전은 대표적으로 명나라 개국황제인 주원장의 연호를 붙인 홍무통보(洪武通宝)인데, 이 홍무통보는 기존형태는 변하지 않고 무게 별로 1문, 2문, 3문, 5문, 10문 가치를 지닌 5가지 종류가 발행되었다.

그리고 명나라의 유일하게 발행되었던 지폐는 대명보초이다. 이 역시 동전과 같이 5가지의 종류가 발행되었다.

홍부통보.jpg 대명보초.jpg
__________홍부통보 _________ 대명보초

청나라의 동전 중 가장 오래 사용되었던 것은 청 고종의 건륭통보(乾隆通寶)이다. 그리고 청나라 말기에 광서제는 서양의 기계식 주조법을 도입하여 은원(银元)을 발행했다.
인공적인 화폐주조에서 기계적인 주조의 형식으로 바뀌면서 현재의 동전과 유사한 형태를 가졌다. 광서제 24년때 위안元이라는 단위가 공식적으로 사용되었고,
은원 1문에 대해 위안이라는 단위를 부여했고, 동전 1문에 대해선 1쟈오角 라는 단위를 부여했다.

건륭통보.jpg 은원.jpg
__________건륭통보 ____________ 은원

동전.jpg
동전

중화민국

중화민국 개국선언 1년 후 위안스카이가 대총통에 부임하고 자신의 얼굴을 은원에다 실리게 하였고 이는 속칭 “원대두”라고 불렸다. 원대두는 약7억5천만개가 발행되었고
역사상 파급력이 가장 컸던 원형화폐라고 평가되었다. 그리고 당시의 기계인쇄형 지폐를 사용하였다.

원대두.jpg 지폐.jpg
__________원대두 ____________ 지폐

중화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은 동전이나 은원을 주조하지 않고 니켈과 동 혹은 알류미늄과 동의 합금으로 동전을 주조하여 이를 현재까지 “경폐”라고 부르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현재까지 5번의 지폐버전을 갱신하였지만 지폐의 인물은 모택동으로 모두 동일하다.
인민폐.jpg
인민폐

화폐와 관련된 역사적 사건

아편전쟁(鴉片戰爭, Opium Wars)

한 국가의 화폐는 곧 그 나라의 경제와 직결된 문제로 이어져 사람들의 삶에 깊숙이 자리잡아 큰 영향을 끼치고, 무역이 활발해짐에 따라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적 충돌을 일으키기도 한다.

중국이 화폐와 관련된 역사적 사건으로 가장 중요한 사건은 단연 중국이 은본위화폐를 사용하던 시절의 아편전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제 1차 아편전쟁(1839년 ~ 1842년)

은경제시절 중국은 도자기와 차 비단을 영국에 수출하였고, 영국은 중국에 모직물과 인도산 면화를 수출하였다. 하지만 영국에서의 중국산 비단과 차의 높은 수요에 비하여
중국에서 영국산 모직물과 인도산 면화는 수출이 매우 부진하였다. 이같은 중국의 일방적인 무역수지 흑자는 영국의 무역수지 적자를 불러왔고, 결국 중국산 차를 수입할 결제 대금으로서의 은 마저 부족하게 되었다.
따라서 영국은 중국에 마약성 물질인 아편을 수출하여 무역적자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아편중독으로 중국 내 사회문제가 커지자 중국 정부는 대대적으로 아편을 단속하게 되고,
영국은 이를 빌미로 하여 1839년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은 1842년에 영국의 승리로 끝났고, 난징조약이 체결되었다. 난징조약으로 영국은 홍콩섬을 할양받고,
광저우(廣州), 샤먼(廈門), 푸저우(福州), 닝보(寧波), 상하이(上海) 등 다섯 개 항구를 강제적으로 개항시켰다.


동아병부.jpg 아편.jpg

아편에 중독된 중국 남자들 '동방의 병든 남자'라는 뜻의 동아병부(東亞病夫)

제 2차 아편전쟁(1856년 ~ 1860년)

청나라는 경제적으로 자급자족적 성격이 강하였고, 무엇보다 중국의 비단은 영국의 모직물과 인도산 면화보다 우수하였기에 난징조약으로 항구를 개항하였더라도 영국은 크게 수출 성과를 내지 못하였다.

게다가 제1차 아편 전쟁으로 영국에 대한 반영 감정으로 인해 광둥을 중심으로 대영 항쟁이 전개되었다. 이에 영국은 중국인 소유의 영국 해적선 애로호를 빌미로 한 애로호 사건을 일으켰다.
따라서 1856년 발발한 제2차 아편 전쟁은 애로호 전쟁이라고도 불리운다.

영국은 프랑스와 구성한 연합군으로 광저우를 침략하여 방화와 살인을 저질렀고, 이와 동시에 러시아군도 청나라 영토로 진격했다. 연합군은 톈진을 점령하여 불평등 조약인 톈진 조약을 맺었다.
톈진조약은 청나라가 영국과 프랑스에게 배상금을 지급하고 개항 항구를 확대하며 아편 무역을 합법화하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청나라는 이때 기독교 공인도 약속해야 했다.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텐진조약 체결 후에도 청나라의 후속 조치가 미진하자 진격을 계속해 1859년에 수도 베이징 근처까지 이르렀고, 1860년에는 대천황의 별궁인 원명원을 약탈하였다.
결국 베이징 함락 후 청나라가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베이징 조약을 맺으면서 전쟁은 종결되었다.

아편전쟁.jpg
아편전쟁

참고문헌

  • 彭信威,『中国货币史』,上海人民出版社
  • 薛天明 , 论文 『中国历代货币形式研究』, 湖北徐寨中学
  • 정재웅, 「중국의 화폐경제체제에 관한 연구: 송(宋)-원(元) 시대를 중심으로」, 『한국금융공학회 학술발표논문집』 2012권2호 pp.404-421, 한국금융공학회, 2012
  • 박진근,『경제학대사전』, 누리미디어, 2002.5
  • 韩雪,论文《 中国古代货币政策得失与王朝兴衰 》,黑龙江省社会科学院历史研究所, 2011年
  • 郭彦岗,《中国历代货币》,商务印书馆,1998年,12月1日
  • 百度图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