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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무제는 즉위 4년째에 수도에 국립대학을 세우고, 오경(五經)에 각각 박사(博士)의 관직을 두고 학교를 만들어 학생을 가르치게 했다. 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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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는 즉위 4년째에 수도에 국립대학을 세우고, 오경(五經)에 각각 박사(博士)의 관직을 두고 학교를 만들어 학생을 가르치게 했다. 오경을 가르치는 학교를 오관(五館)이라고 한다. 국립대학은 송, 제 시대에도 만들어진 적이 있으나 모두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고 또 귀족자제에게만 입학이 허가되었다. 그런데 무제는 귀족이 입학하는 국자학 외에 오관 쪽은 널리 일반의 수재에게도 개방하고 정원에 제한을 두지 않았다. 또 많은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국가시험에 합격한 자는 곧바로 관리로 채용하였다. 이 시책으로 학문과 교양이 보다 넓은 계층으로까지 전파될 수 있었고, 마침내 이 시책은 수대에 시작되는 과거제를 촉진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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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는 즉위 4년째에 수도에 국립대학을 세우고, [[오경]](五經)에 각각 박사(博士)의 관직을 두고 학교를 만들어 학생을 가르치게 했다. 오경을 가르치는 학교를 오관(五館)이라고 한다. 국립대학은 송, 제 시대에도 만들어진 적이 있으나 모두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고 또 귀족자제에게만 입학이 허가되었다. 그런데 무제는 귀족이 입학하는 국자학 외에 오관 쪽은 널리 일반의 수재에게도 개방하고 정원에 제한을 두지 않았다. 또 많은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국가시험에 합격한 자는 곧바로 관리로 채용하였다. 이 시책으로 학문과 교양이 보다 넓은 계층으로까지 전파될 수 있었고, 마침내 이 시책은 수대에 시작되는 과거제를 촉진하는 것이었다.
<br>이와 같은 학술장려책으로 학문이 발달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더욱이 무제 자신이 대단한 학자이면서 유학, 형이상학, 불교학에 깊은 조예를 갖고 많은 저술한 것 또한 학문의 발전을 자극했다. 당시의 일반 학풍은 이와 같은 넓은 교양을 갖추고 무엇보다도 우수한 시문을 창작하는 능력을 존중하였다. 소명태자(昭明太子)로 잘 알려진 황태자 소통을 중심으로 하여 편집된 『문선(文選)』은 당시까지의 뛰어난 시문을 모은 시문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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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이와 같은 학술장려책으로 학문이 발달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더욱이 무제 자신이 대단한 학자이면서 유학, 형이상학, 불교학에 깊은 조예를 갖고 많은 저술한 것 또한 학문의 발전을 자극했다. 당시의 일반 학풍은 이와 같은 넓은 교양을 갖추고 무엇보다도 우수한 시문을 창작하는 능력을 존중하였다. [[소명태자]](昭明太子)로 잘 알려진 황태자 소통을 중심으로 하여 편집된 『문선(文選)』은 당시까지의 뛰어난 시문을 모은 시문집이다.  
<br>소명태자 사후 새로이 태자가 된 소강(蕭綱)의 궁정에서는 서리(徐摛) 등의 문사가 뛰어난 기교로 앞 다투어 화려한 시문을 창작하고 있었다. 그때 이용된 문체는 ‘궁체(宮體)’라고 불리는데, 이는 저 남제의 경릉왕 소자량 아래 모인 문인들이 만들어 낸 문체를 더욱 빛나고 아름답게 발전시킨 것이었다. 그리고 위진 이래의 문학론을 집대성한 유협의 『문심조룡』과 고래의 시를 비평한 종영의 『시품(詩品)』 등은 문학이론, 문학비평 장르에서 크게 수확한 예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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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소명태자 사후 새로이 태자가 된 [[소강]](蕭綱)의 궁정에서는 [[서리]](徐摛) 등의 문사가 뛰어난 기교로 앞 다투어 화려한 시문을 창작하고 있었다. 그때 이용된 문체는 ‘[[궁체]](宮體)’라고 불리는데, 이는 저 남제의 경릉왕 소자량 아래 모인 문인들이 만들어 낸 문체를 더욱 빛나고 아름답게 발전시킨 것이었다. 그리고 위진 이래의 문학론을 집대성한 유협의 『문심조룡』과 고래의 시를 비평한 종영의 『시품(詩品)』 등은 문학이론, 문학비평 장르에서 크게 수확한 예라고 하겠다.

2016년 6월 21일 (화) 17:24 기준 최신판

무제는 즉위 4년째에 수도에 국립대학을 세우고, 오경(五經)에 각각 박사(博士)의 관직을 두고 학교를 만들어 학생을 가르치게 했다. 오경을 가르치는 학교를 오관(五館)이라고 한다. 국립대학은 송, 제 시대에도 만들어진 적이 있으나 모두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고 또 귀족자제에게만 입학이 허가되었다. 그런데 무제는 귀족이 입학하는 국자학 외에 오관 쪽은 널리 일반의 수재에게도 개방하고 정원에 제한을 두지 않았다. 또 많은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국가시험에 합격한 자는 곧바로 관리로 채용하였다. 이 시책으로 학문과 교양이 보다 넓은 계층으로까지 전파될 수 있었고, 마침내 이 시책은 수대에 시작되는 과거제를 촉진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학술장려책으로 학문이 발달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더욱이 무제 자신이 대단한 학자이면서 유학, 형이상학, 불교학에 깊은 조예를 갖고 많은 저술한 것 또한 학문의 발전을 자극했다. 당시의 일반 학풍은 이와 같은 넓은 교양을 갖추고 무엇보다도 우수한 시문을 창작하는 능력을 존중하였다. 소명태자(昭明太子)로 잘 알려진 황태자 소통을 중심으로 하여 편집된 『문선(文選)』은 당시까지의 뛰어난 시문을 모은 시문집이다.
소명태자 사후 새로이 태자가 된 소강(蕭綱)의 궁정에서는 서리(徐摛) 등의 문사가 뛰어난 기교로 앞 다투어 화려한 시문을 창작하고 있었다. 그때 이용된 문체는 ‘궁체(宮體)’라고 불리는데, 이는 저 남제의 경릉왕 소자량 아래 모인 문인들이 만들어 낸 문체를 더욱 빛나고 아름답게 발전시킨 것이었다. 그리고 위진 이래의 문학론을 집대성한 유협의 『문심조룡』과 고래의 시를 비평한 종영의 『시품(詩品)』 등은 문학이론, 문학비평 장르에서 크게 수확한 예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