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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22일 (수) 16:09 기준 최신판
구보의 난
구보의 난의 배경
9세기 후반으로 넘어가자 당조의 재정기반이었던 남방의 여러 번진에서 병사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원화중흥에 의해 반측지지의 순지화에 어느 정도 성공한 헌종은 중앙의 고관을 순지의 절도사로 파견했다. 그런데 임기가 짧은 절도사들은 절도사 취임을 승진을 위한 하나의 단계로 여겨 부임지에서의 통치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로지 감군으로 파견된 환관의 요구에 따라 막대한 재물을 진봉이라 해 중앙으로 보냈는데 이는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태도였다. 진봉이란 원래 임지의 번진에서 경비절약 등에 의해 남은 잉여재원을 중앙에 반환한다는 명목인데, 실제로는 병사에 대한 급여를 유용하고 영내의 세수를 증징하는 증의 방법으로 획득했다. 진봉은 강회의 순지에서 특히 두드러졌으며, 이에 따라 이 지역에서는 일반 농민의 부담이 증가하고 병사의 대우가 악화되어 지역의 불만이 높아졌다. 부병제시대처럼 비참한 존재가 아니었던 병사들은 불만이 그 이전보다 급속히 강도높게 커져만 갔다. 이 시기 병사들의 반란은 절도사와 병사들의 대립 때문이 아니라 중앙정부와 병사, 농민의 대립으로 인해 일어난 것이다. 중앙정부와 병사, 농민 이 두 집단 사이의 절도사들이 대립의 주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
구보의 난
병사들의 반란은 855년 절동지역에서 시작되었지만, 858년에는 영남과 호남, 강서, 선주 등지에서 하급장교들이 주동자가 되어 처우의 개선을 요구하면서 절도사를 구금하고 추방하기도 했다. 특히 강전태를 지도자로 하는 병란에는 일반 병사만이 아니라 그 지역의 부상과 토호가 참여했는데, 이는 그들도 수탈의 강화에 반발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었다. 다음 해인 859년에는 절동지역에서 농민 출신 구보의 난이 일어났다. 봉기시에 불과 100명 전후였던 반란 집단은 몰락농민과 부랑인과 군도가 가담해 3만 명으로 늘어났으며 후에는 토호와 부상도 참여했다. 당조에 대해 극심한 적의를 품은 반란군에 대해 당조는 주변의 전진병력을 동원함과 동시에 기마병을 동원해 진압에 나서 7개월 만에 진압에 성공했다. 이 난은 이후 황소의 난의 선구를 이룬다.
참고문헌
- <<중국통사>>, 범문란, 우종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