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경국민정부"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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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평양전쟁 | | 태평양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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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당의 남경 점령 | | 공산당의 남경 점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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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 |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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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23일 (목) 20:20 판
목차
개요
- 남경국민정부는 1927년 4월 장개석에 의해 수립되어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 이전까지 존재하였던 국민정부를 말한다.
주요사건
연도 | 사건 |
1927.01.01-08.19 | 무한국민정부 |
1927.04.12 | 남경국민정부 출범 |
1927.10.27 | 정강산 소비에트 건설 |
1928.10 | 훈정강령 발표 |
1931.05 | 훈정 시기 약법 채택 |
1931.09.18 | 만주사변 |
1932.01.28 | 상해 1·28 사변 |
1934.10-1936.10 | 공산당 대장정 |
1936.12 | 서안사변 |
1937.07-1945.08 | 중일전쟁 |
1937.09-1945.08 | 제2차 국공합작 |
1941.12-1945.08 | 태평양전쟁 |
1945.08.24-10.10 | 중경회담 |
1946.07 | 국공내전 시작 |
1949.01 | 공산당의 천진,북경 점령 |
1949.04 | 공산당의 남경 점령 |
1949.10.01 |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
성립과 붕괴
국민당 내부의 대립
- 1926년 10월 중국국민당제2계중앙급각성시집행위원연석회의에서 장개석은 국민정부의 소재지를 무한으로 옮길 것을 주장한다. 북벌 개시 이전에 천도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주도권을 확고하게 다지려는 목적이었다. 이에 대해 국민당 좌파와 공산당은 처음에는 반대하였으나, 11월26일 중앙정치회의에서 천도에 찬성함으로써 국민당 중앙당부와 국민정부의 무한 이전이 결정되었다. 그들이 천도에 찬성한 이유는 이 시기 장개석이 강서 일대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장개석과의 연합을 유지하려는 의도였다.
- 무한 이전이 결정되고 북상하는 도중, 장개석이 돌연 무한이 아닌 남창으로의 이전을 주장하였다. 1926년 12월초에 광주에 있던 황포동학회를 남창으로 옮겼으며, 31일에는 북상하고 있던 중집위원과 국민정부위원 제2진을 남창에 억류하였다. 이듬해 1월 21일, 남창정치회의를 열어 무한의 연석회의를 부정함으로써 무한과 남창의 대립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국민당 세력이 남창의 국민혁명군과 무한의 국민정부로 양분된 것이다.
4·12정변
- 1927년 3월 장개석의 직속부대인 동로군이 상해와 남경을 점령하였다. 당시 상해는 제3차 무장기의가 성공하고, 중국공산당의 지도 하에 상해총공회를 중심으로 하여 시민정부가 조직되어 있었다. 이에 대하여 장개석은 상해임시정치위원회를 조직하여 상해의 군사, 정치, 재정의 권한을 행사하였고, 계엄을 선포하여 모든 집회나 시위, 파업을 금지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4월 11일 밤, 동로군에게 명령을 내려 상해 내의 규찰대를 무장해제하고 공산당원을 체포, 처형하였다.
남경국민정부의 성립
- 장개석은 4·12정변을 통하여 상해에서의 정치적 주도권을 확보하고, 남경에 독자적인 국민정부를 조직하였다. 국민당 최고 원로인 호한민을 주석으로 한 남경국민정부가 탄생한 것이다. 이로써 국민정부가 남경과 무한 두 곳에 존재하게 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4월~5월, 무한정부가 노동자·농민운동을 금지하고 농민협회에 제재를 가하면서 공산당과 무한국민정부(국민당 좌파)사이에 내분이 일어나게 되었다. 7월 15일에 열린 분공회의에서 국민당 좌파가 공산당과 완전히 갈라서자, 국민당 내에서는 좌파와 우파가 대립할 명분이 없어졌으므로 무한정부는 우파인 남경정부로 흡수되었다.
남경국민정부의 붕괴
- 중일전쟁이 끝나고 일본군이 물러간 이후, 1946년 7월 국민당군의 선제 공격으로 국공합작은 격렬되고 전면적인 내전이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미군의 군사적 지원으로 국민당이 우세하였으나, 1948년 말부터는 공산당이 승세를 잡기 시작하였다. 1948년 9월, 모택통의 지휘에 따라 나영환과 임표가 이끄는 동북야전군이 만주의 주요 도시를 점령하였고, 동시에 진의의 화동야전군이 산동성의 국민당의 최후보루라고 할 수 있는 제남(濟南)을 해방시켰다. 1948년 11월, 유백승과 등소평이 지휘하는 중원야전군이 화동야전군과 협력하여 서주(徐州)를 점령하였다. 같은 해 12월, 동북야전군과 화북야전군이 장가구(張家口)를 점령하였고 1949년 1월에 공산당군이 마침내 천진과 북경에 입성하였다. 이처럼 동북지방과 화북지방에서 국민당군이 크게 패하자 1949년 1월에는 장개석이 국민당정부의 총통직을 사임하였고, 4월에는 총통대리인인 이종인이 공산당에게 화평교섭을 제안했다. 그러나 공산당이 국민당에게 요구한 국공화평협정 8개조는 실질적으로 국민당의 무조건적인 항복을 요구한 것이었기 때문에 4월 20일 화평교섭은 결렬되었다. 4월 24일 공산당은 국민당정부가 있는 남경마저 점령하였고, 10월에는 북경 천안문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었음을 선포하였다. 12월에 이르러서는 공산당이 중국 본토 전 지역을 점령하게 되었고, 결국 장개석은 50만의 국민당군과 함께 대만으로 도피하였다.
정치
당국체제
- 당국체제는 쉽게 말해 국민당이 정치적 권력을 독점으로 행사하는 정치체제이다. 남경국민정부는 1928년 10월 중앙집행위원회를 통해 훈정강령을 결의한다. 남경국민정부는 서구적 민주주의와 정당정치로 나아가기 이전의 과도기 단계로써 훈정을 공포하였는데, 이것이 훈정강령을 통해 처음 실제 정책으로 드러나게 된 것이다. 이어서 1929년 3월 국민당 삼전대회에서 훈정방략안을 확정하고, 1931년 5월 국민대회에서 훈정시기약법을 통과시킴으로써 당국체제를 제도적으로 완성하였다.
실제 운영
- 당이 정부를 지도 감독하는 당국체제, 당치체제를 제도적으로 완성하였지만, 실제 운영에 있어서는 당이 완전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특히 지방에서의 국민당의 지도와 감독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중앙에서는 중앙정치회의를 통해 정부에 대한 영향력을 어느 정도 발휘하였다. 또한 중앙정치회의를 통하지 않고도, 국민당 중앙의 주요 지도자가 정부와 군부의 주요 직위를 겸직하는 방법을 통하여 당의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처럼 중앙에서는 당권의 간섭이 상당부분 이루어졌으나, 이것 마저 한계가 있었다. 먼저, 중앙정치회의 구성위원이 몇백 명에 이를 정도로 많아져 실제적인 권력을 행사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또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겪으면서 군권의 더욱 영향력이 확대되어 나중에는 국방최고위원회가 중앙정치회의를 대신하는 상황까지 발생하였다.
교육
당화교육
- 당화교육은 국민당의 정치논리에 교육을 예속시켜, 학교교육을 통해 ‘국민당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1927년 장개석이 남경에서 있었던 5·4운동기념대회에서 처음으로 당화교육을 언급하였고, 그 해 8월 남경국민정부교육행정위원회에서 각급학교에 당화교육 실시 방법 초안을 의결하였다. 그 내용의 핵심은 국민당의 지도하에 교육이 이루어지며, 국민당의 근본 정책에 따라서 교육방침이 세워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모든 중소학교는 당의(黨義) 수업을 받았다. 이때, 삼민주의와 관련된 책들이 수업 필독서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진보주의자들의 비난이 거세고, 당화에 대한 해석이 일정하지 않아 1928년 5월 제1차전국교육회의에서 폐지되었다.
삼민주의교육
- 삼민주의교육은 삼민주의의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교육으로 당화교육이 폐지되고 그것을 대신해 나온 교육방침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이전의 당화교육과 큰 차이는 없는 것으로, 통치질서의 안정을 위해 학생의 사상과 행위를 규제하는 목적을 갖고 있다. 여기서 장개석의 삼민주의란, 국민의 사상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중심사상으로 “중국 고유의 정치와 윤리철학에 연원하는 정통사상”을 뜻한다. 그리고 이런 고유사상의 기본정신으로 ‘충효인애신의화평’의 팔덕(八德)과 ‘예의염치’의 사유(四維)를 제시하였다.
경제
국가 자본의 발전
- 1930년대 남경국민정부는 지속된 내전으로 인한 재정 곤란, 경제 불황, 일본의 침략 등의 상황 속에서 국가 주도의 국방경제건설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먼저 국가 권력을 동원하여 민영은행을 개조하여 중앙정부의 금융체계 속으로 편입시켰다. 전국 금융업에 대한 국가금융자본의 지배력을 확보한 뒤, 폐제개혁을 단행하였다. 폐제개혁을 통해 정부는 지폐발행권과 금융통제력을 장악할 수 있게 되었고, 화폐의 공급이 원활해지자 시장 또한 회복되었다. 국가금융자본의 건립을 토대로 철도, 제철업, 기계공업, 광업, 전력공업과 같은 기본산업분야에 국가가 개입함으로써 상당부분 기초적 발전을 이루어냈다.
사적 자본의 발전
- 남경국민정부의 경제정책은 민영에서 담당할 수 있는 분야에 대해서는 민영에 맡기고 국가는 지원, 보호하는 형태의 실업계획의 원칙을 따르는 것을 기본으로 했다. 특히 경공업 분야에 대해 여러 가지 지원정책을 실행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관세정책이다. 수입관세율을 지속적으로 인상하여 수입을 줄였는데, 특히 경공업 부문에서의 수입이 많이 감소되었다. 또한 세계경제대공황의 타격을 받은 업종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구제대책을 마련하여 회생을 도왔다. 민간소자본에 대해 여러 가지 보호정책을 실행한 결과 대자본가의 성장은 억제되었다.
군사
군사조직 개편
- 국민혁명군 총사령부와 군사위원회는 북벌 완수와 함께 폐지되었는데, 1932년 상해사변으로 위기를 느낀 국민정부는 군사위원회를 재설치한다. 이 때 군사위원회가 국방과 관련된 모든 업무를 관장하고 군령에 관한 최고 의결기관의 지위를 가짐으로써 군사조직의 중앙집권화가 추진되었다. 또한 대일국방업무를 전담하는 국방위원회가 신설되었다.
지방군대 정리
- 남경국민정부가 중앙정부로 출범한 이후에도, 지방의 군벌은 여전히 독립적 세력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장개석은 지방군벌의 군대를 통제하기 위해서 지방군대를 중앙에 복속시켜 중앙에서 군비를 받도록 하였다. 또한 지방군대 자체 무기제조를 금지하였다. 그러나 지방군대의 세력을 견제하려는 여러 가지 시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군벌세력들을 완전하게 중앙의 통제 하에 두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다.
장교양성 교육
- 국민정부는 군벌 군대에서 탈피하여 서양식 전술과 무기체계를 갖춘 장교단을 양성하기 위해 특수 군사학교를 설립한다. 또한 장교교육 체계를 3단계로 구체화시켰다. 먼저 중앙군관학교를 통해 교육생들에게 기본적인 교육과 훈련을 시킨 다음, 각 특수병과 학교에서 병과특성에 맞게 보수교육을 받도록 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육군대학에서의 참모훈련을 통해 고위 장교를 양성했다.
국민군사훈련
- 국민군사훈련은 민중을 대상으로 실시한 것이다. 국민정부의 병역제도가 징역제를 최종 목표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평상시 민중을 대상으로 군사교육을 할 필요가 있었다. 국민군사훈련은 훈련통감부가 담당하여 학교군사훈련, 사회군사훈련, 국민체육으로 나눠서 실시되었다. 모든 군사훈련은 수도인 남경에서 시작하여 지방으로 확대되어 진행되었다.
한계
- 남경국민정부의 성립은 근대적 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분열과 혼란 속에서, 신해혁명으로 청 왕조가 멸망한 후 처음으로 이루어 낸 국가적 통합이라는 점에서는 의의가 있다. 하지만 완전한 통합을 이루어내지는 못해 당내 반장개석세력, 군벌세력, 공산당세력이 끊임없이 정부와 대립했다. 또한 대중적 지지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국민적 통합도 미약했다고 할 수 있다.
중국공산당의 평가
남경국민정부는 봉건지주와 매판부르조아지를 계급적 지지기반으로 가지는 독재적 파쇼정권이다.
- 위 평가는 모택동과 진백달의 관점을 반영하는 것이다. 모택동과 진백달이 장개석정권을 지주와 매판관료 독점자본가의 연합정권으로 주장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장개석이 상해와 남경을 점령할 때, 절강자본가들의 후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둘째, 남경정부가 출범한 이후에도 지주와 매판자본가 집단이 정부의 중요한 지지기반이 되어 정책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셋째, 장개석정권의 관료자본가들이 그들의 정치력을 행사하여 독점적 이익을 추구하고, 그로 인해 독재적 지배구조를 강화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평가는 남경국민정부시기 관료독점자본으로 민족자본이 발전할 수 없었다는 결론으로 연결되며 이는 제국주의의 이익을 대변하는 국민당정권이 수립되면서 중국자본주의의 발전이 쇠퇴되었다는 설명과 그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다.
남경국민정부의 성격을 어떻게 볼 것인가
참고문헌
- 김소중, 『중국을 정복하자』, 제4차 개정증보판, 서울: 백산서당, 2002.
- 서진영, 『중국혁명사』, 파주: 한울, 1992.
- 강명희, 「남경정부 시기 국가주도하 국민경제 건설」, 『중국근현대사연구』31, 2006.
- 기세찬, 「남경국민정부의 국방건설 재검토」, 『중국근현대사연구』46, 2010.
- 배경한, 「남경국민정부의 성립과 그 성격」, 서울대학교 동양사학연구실 편, 『강좌중국사』7, 1989.
- 배경한, 「중국국민당의 당국체제와 “중국적 국민국가”」, 『중국근현대사연구』31, 2006.
- 천성일, 「남경 국민정부시기 장개석의 교육사상」, 『녹우연구논총』37,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