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택동
모택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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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3년 12월 26일 후난성(湖南省) 샹탄현 사오산 구 |
사망 |
1976년 9월 9일 |
생존시기 | 청나라 ~ 중화인민공화국 |
주요 작품 | 모순론, 신민주주의론 등 |
관련 활동 | 정치, 문학, |
개요
생애
어린시절
청년시절
공산당 창당
1921년 모택동은 마르크스주의자 일지는 몰라도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당시 중국에는 공산당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천두슈는 1919년에 러시아인을 통해 코민테른과 접촉을 하기 시작한 상태였고 1921년 드디어 상하이에서 공산당은 창당되었다. 하지만 오해하지 말 것이 이 당시의 모택동은 창당대회에 참여하기는 했을지언정 결코 당 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지금 상하이에 가보면 공산당 창당 기념관이 있는데, 모택동이 회의 당시 일어나서 연설을 하는 듯한 모형이 전시되어있다. 하지만 과연 실제 회의에서 이러한 연설을 했을지는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
공산당 생활
공산당 창립 이후, 이곳에 속해 있는 동안 모택동은 (자신이 농민출신이라서 인지) 농민들에게 많은 관심을 가졌고 농민들 안에 내재되어 있는 힘을 파악하였다. 1922년 당시 모택동은 호남성 지부의 서기로 있었는데 훗날 회고하기를 당시 천듀수 휘하의 공산당의 활동은 주로 학생과 노동자들에게 집중이 되었을 뿐, 농민들에게는 거의 눈을 돌리지 않았었다고 한다.[1] 1927년에는 농민의 혁명 투쟁에 대한 당시 당내외의 비판들에 답변하기 위해 『호남농민운동 시찰보고』라는 글을 써 중앙위원회에 제출하며 [2] 농민 운동에 대한 새로운 노선을 채택하도록 촉구하였다. 하지만 진독수를 위시한 공산당은 여전히 농민에게 관심이 없었다. 당이 농민에게 내재된 가능성을 간과하고 시간이 흐른 뒤, 1927년 장개석의 국민당이 4.12 사건을 일으킨다. 이 사건으로 공산당에 소속된 노동자들은 학살당하였으며 국민당과 정부 내에서 공산주의자들을 축출하여 무한에 있던 공산당 무한정부는 결국 소멸되고 만다.
정강산 시절
1927년 8월 1일 국민당의 학살에 대한 반동으로 하룡과 엽정이 이끄는 제20군은 주덕과 힘을 합쳐 남창봉기를 일으킨다. (이를 기려 지금도 중국의 8월1일은 군인의 날이다.) 모택동 또한 소규모 군대로 농민 봉기를 일으키며 호남성을 따라 남쪽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마지막엔 정강산에 들어간다. (흔히들 이 정강산을 지리산에 들어간 빨치산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정강산은 산새가 험하고 둘레 500리, 직경 80리가 되는 거대한 산이다.) 모택동은 1927년 겨울부터 1928년 가을까지 정강산에 있었는데 이곳에 있는 동안 힘을 크게 키운다. 당시 정강산에서 산적을 하고 있던 왕좌와 원문재의 군대를 합류시키고 1928년 5월에는 주덕의 군대가 정강산에 도착하였고 ‘모주군毛朱軍’이라고 불리는 유명한 홍군 제4군이 탄생하였다. 정강산은 지형이 험하고 요새로서의 기능을 갖추었기 때문에 이 산을 탈환하기 위한 국민당의 군대들을 모두 물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