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릉군
신릉군(信陵君)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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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 |
사망 |
B.C 243 |
생존시기 | 춘추전국시대 |
목차
개요
이름은 무기(魏無)이며 위(魏)나라의 왕족으로, 위소왕의 작은 아들이자 위나라 안리왕의 이복동생이다. 소왕의 뒤를 이은 안 리왕이 위공자를 신릉군(信陵君)에 봉했다. 당시 위는 진(秦)과 원수지간이었으므로 자연스레 그는 관직을 맡은 후 죽기 전까지 진과 싸워야 했다. 그가 맡은 역할은 다양했는데, 그는 군사가와 외교전략가로서 주변국들과의 동맹과 절교를 조절하였다. 또한 물주의 역할을 맡아 인재를 모았는데, 이렇게 해야 왕에게 의심을 받는 일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는 협문화의 창시자였다. 의리라는 도덕적 기반을 갖고 있지만 즉각적인 감정에 따라 행동하는 협의 특성 때문에 당시 법가와 유가와는 달리 기존 체제에 얽매이지 않아 일가를 이루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는 전국시대 말기 가장 위협적인 진(秦)을 두 번이나 물리치며 협객으로서 훌륭한 실력을 갖췄다. 그는 현실주의자이자 합종주의자였다. 진의 공격으로 한이 멸망당할 위기에 처하자 한(韓)을 속국으로 만들어 위를 살리려는 목적으로 한을 도와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겁이 많은 위왕이 이를 실천하지 못했다, 조(趙)가 장평(長平)에서 진에 크게 패하자 위에 구원병을 요청했다. 하지만 진이 두려워 위 왕이 군사들을 멈추게 했다. 그러자 위무기가 병부를 훔쳐 협객으로서 조나라를 도왔다. 진을 물리치는 공을 세웠지만, 국법을 어긴 죄로 고국에 돌아가지 못했다. 이후 위왕인 형님의 요청으로 귀환했지만, 이내 형님이 그를 의심하자 현실을 버리고 술에 빠져 쓸쓸한 죽음을 맞았다.
생애
위무기의 합종설
진(秦)의 범저가 한을 공격하자 위는 진과 함께 한을 공격하려 했다. 하지만 위무기는 오히려 한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진은 탐욕스럽고 흉폭하며 신의와 예의를 모르는 나라라며 믿지 못했다. 또한 그는 진의 원교근공(遠交近攻)에 의해 한이 무너지면 다음대상이 위가 될 것이라 예측했다. 그는 조는 거리가 멀고 진이 과거에 실패한 경험이 있으며, 초 또한 거리가 멀고 지형이 험난하여 한이 멸망하면 가장 쉽고 이익이 되는 위를 반드시 공격할 것인데, 한이 없으면 위는 이 위기를 벗어나기 힘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 예전에, 진이 하서의 진(晉) 땅에 있을 때 저들의 나라는 대량에서 천 리나 떨어져 있고 강과 산이 가려주었으며 가운데에 주와 한이 끼어 있었으나, 임향의 싸움 이래 지금까지 진이 우리 위를 일곱 번 공격하여 다섯 번 유중으로 들어왔고 변경의 성을 모조리 뽑아내고 문대는 무너지고 수도는 불탔으며 숲의 나무는 베어져 미록마저 다 잡아가고 국도는 포위되었습니다. (중략) 하물며 저들이 한을 없애 정 땅을 차지하고 하산의 울타리를 제거하고 사이에 낀 주와 한마저 없애도록 가만히 둔다면 우리 대량과 저들은 겨우 100리 간격이니 화는 반드시 이에서 비롯될 것 입니다.
” — 춘추전국이야기9
또한 그는 예전에 합종이 실패한 이유는 한을 끌어들이지 못했기 때문이었으며, 이번에는 한이 망하는 형국이니 성공할 것이라 말했다. 그는 한을 도우면, 먼저 잃어버린 위의 옛 땅을 찾아 진과의 거리를 벌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 이런 고로 신은 합종으로 왕을 섬길까 하오니 왕께서는 속히 초(楚)와 조(趙)의 약조를 받아들이고 한(韓)의 인질을 끼고 한을 살려낸 연후에 우리 옛 땅을 요구하면 한은 고마워 분명히 따를 것입니다. 이리하면 우리 사민을 고생시키지 않고도 옛 땅을 얻는 것이니 그 공은 진과 함께 한을 치는 것보다 크고, 또한 강한 진과 국경을 맞대는 화도 피할 수 있습니다.
” — 춘추전국이야기9
또한 그는 재정도 보충할 수 있을 것이라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지금 한은 상당을 잃고 망할 위기에 처한 상태이기 때문에, 한을 돕는다면 한의 상당(上黨)을 위의 안성 길과 통하게 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출입 관세를 걷을 수 있다는 것이다.
“ 위가 한을 돕는 것은 그저 명분 때문이 아니다. 한이 무너지면 그다음 공격 대상은 위다. 그냥 한을 살려주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도와준 대가로 한에게 땅도 떼어 받고, 한의 수도와 상당으로 통하는 길을 이어준 대가로 관세를 받아 나라를 살찌우자는 것이다.
” — 춘추전국이야기9
하지만 그 당시 위나라 안리왕은 머뭇거리다 이를 실천하지 못했다.
조나라
장평(長平)대전에서 조(趙)가 진에 크게 패하자 조의 평원군(平原君)이 위 안리왕와 위무기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안리왕은 조에 장군 진비와 10만 명의 병력을 보냈지만, 곧 진 소왕에게 경고를 받자 겁을 먹고는 사람을 시켜 군사들을 업에 주둔하며 방어벽을 쌓도록 했다. 한편, 평원군의 부인이 위무기의 누이였는데, 위의 구원병이 오지 않자 평원군이 누이가 불쌍하지도 않냐며 위무기를 꾸짖었다. 합종주의자이자 의리를 중요시했던 협객 위무기는 안리왕에게 수차례 건의했지만, 겁을 먹어 끝까지 그의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일전에 왕은 한(韓)나라를 돕자는 위무기의 요청을 듣지 않은 적이 있기에, 위무기는 직접 전차 100승을 조직하여 진과 싸우기로 결심했다.
그 때 왕의 총애를 받고 있던 인물이 여희(麗姬)였다. 전에 위공자는 여희의 아버지를 살해한 원수의 목을 베어 여희를 도와준 적이 있었는데, 후영의 계책을 받아들여 여희를 통해 병부를 훔쳤다. 위공자가 장군 진비에게 병부를 보여주며 왕명으로 자신이 군대를 이끌겠다고 속였지만, 진비가 이를 믿지 않았다. 이에 위무기는 주해를 시켜 진비를 때려죽여 진비의 군대를 이끌었다.
연합국의 승리와 위무기의 망명생활
진비의 군대를 얻는 위무기는 초나라 군대와 연합하여 진과 싸웠다. 연합군은 북쪽으로 돌아 진이 점령한 거점 신중을 공격했는데, 한의 지원군까지 오자 진군이 대거 투항했다. 이렇듯 위무기는 조나라를 구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형님과 고국을 배반한 이유로 위로 돌아가지 못했다.
위무기, 합종을 이뤄 진에 반격하다
그가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조나라에 있을 때, 진이 규를 시켜 위 오성을 빼앗았다. 이어 진이 주(周)를 멸망시키고 한을 정벌했다. 마침내 진과 위의 경계가 맞닿았고, 진의 공격으로 위나라가 멸망위기에 처했다. 이때, 조나라에 있던 위무기가 5국의 군대(연(燕), 조, 초, 위, 한)와 함께 귀국하여 진에 반격했다. 위무기가 반격하자 진 사령관 몽오가 하외로 퇴각했다. 5국 연합국이 추격하자 하외로 몽오는 함곡관(函谷關)까지 퇴각했으나 위무기가 계속 추격하여 진군을 물러나게 했다.
“ 위나라 장수 무기가 다섯 나라의 군대를 이끌고 진을 쳐서, 진이 하외로 퇴각했다. 몽오가 패하여 물러났다.
” — 춘추전국이야기9
“ 안리왕 30년, 위무기가 위나라로 돌아가 다섯 나라의 군대를 이끌고 진을 공격해서 하회에서 패배시키고 몽오를 달아나게 했다.
” — 춘추전국이야기9
후에 세상에서 이를 위공자병법이라 일컬었다.
술의 중독된 위무기의 죽음
위무기가 5국의 군대를 이끌고 진군을 격파하자, 진왕이 이를 걱정했다. 진왕은 위왕에게 위무기가 왕위에 욕심을 내고 있으며, 백성들 또한 위무기가 있다는 소리는 들어도 위왕이 있다는 소리는 모른다며 위공자를 모함했다. 이에 위왕은 위무기를 의심하여 그를 대신해 다른 사람을 장군으로 삼았다. 위무기는 크게 상심하여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가지 않고 술과 여자를 가까이 했다. 이러한 생활을 한 지 4년의 세월 끝에, 결국 술병으로 생을 마감했다.
관련 일화
위무기의 현능함
위무기가 위 안리왕과 바둑을 두고 있을 때였다. 북쪽에서 봉화를 올리자 위왕은 조(趙)나라가 경계를 침범하는 줄 알고 바둑을 그만두려 했다. 하지만 위공자는 조왕이 사냥을 하러 온 것 일뿐이라며 위왕을 말렸다. 얼마 후, 조왕이 사냥한 것이지 침입한 것이 아니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놀란 위왕은 이후로 위무기의 현능함을 두려워해 그에게 국정을 맡기지 않았다.
위무기, 아래로 사귀는 것을 장려하다
위에 후영(侯赢)이라는 은사가 있었는데, 가난하여 10년 동안 문지기 일을 하고 있었다. 위 공자가 이 소식을 듣고 친히 찾아가 선물을 주며 빈객들을 모아 술을 대접하려 했다. 위 공자가 후영 대신 말고삐를 쥐어 수레를 몰자 사람들이 속으로 후영을 욕했다. 그러나 공자의 표정은 줄곧 공손했다. 위무기가 후영을 상석에 앉히고 빈객들에게 돌아가며 소개해주니 빈객들이 모두 놀랐다.
평가
- 원칙을 중시했던 순자는 비록 그가 명을 거슬렀으나 옳음을 증명했다 평가했다.
순자: "거스름으로써 충성을 다했다."
- 한 고조는 어렸을 때부터 위공자의 이야기를 듣고 그를 존경했다. 즉위 후 한 고조는 대량을 지날 때마다 공자의 제사를 지냈으며, 공자의 무덤을 지키는 다섯 집을 두고 해마다 공자의 제사를 지내게 했다.
- 사마천: "낮은 사람과 사귀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不恥下交]"
참고 문헌
공원국, 『춘추전국이야기9, 원교근공 대학살의 시대』, 위즈덤하우스, 2015
사마천, 장세후 역, 『사기열전1』, 연암서가,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