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양
예양(豫讓)은 춘추 시대 말기 진(晉)나라 시대 협객으로 출생과 사망 년도가 알려져 있지 않다.
서문
전국(戰國)시대는 한편 자객들의 시대였다. 공개적인 해결책이 없을 때 은밀한 방법을 찾는 것은 유사 이래 의지를 가진 인간들의 공통점이지만, 전국시대에 오면 그런 행동이 얼마나 성행했는지 일부 자객들은 독립적인 열할을 부여받았고, 일부는 역사책에 이름을 올렸다. 실제로 전국 말진 진(秦)의 정치를 전담하던 승상 이사는 6국의 정치가들에게 두 가지 선택지를 던졌다. “금이나 칼이냐?” 매수공작이 통하지 않으면 자객을 보내 그들을 찔렀다. 사마천(司馬遷)은 그저 명령을 받고 수행하는 불나방 같은 살수들은 빼고 나름대로 주종관계의 의를 실천한 이들을 열전에 실었다. 춘추전국시대 때 활약한 다섯 명의 자객들을 다룬 이 편은 『사기(史記)』에서도 명편으로 꼽힌다. 여기에는 아득한 역사 속에서 찰나처럼 나타났다 사라져간 칼잡이들의 희로애락이 눈앞에 살아 움직이는 듯 생생히 펼쳐져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정작 읽어야할 것은 그 속에 담긴 사마천의 심정일 것이다. 그는 명분과 도리를 지키기 위해 혼탁한 세상에 맞서 제 한 몸을 던졌던 협객들의 용기와 의기를 높이 평가하면서 냉혹한 현실 속에서 바르게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었다. 사마천은 이들을 한갓 범법자로 치부하는 것은 불공평한 처사라 여겼다.[1] 그중 한 사람이 바로 예양(豫讓)이다.
인물 전기
사마천(司馬遷) ‘사기(史記)’의 ‘자객열전(刺客列傳)’에 보면 예양(豫讓)이란 이름이 나온다. 그는 전국시대(BC403~BC221) 진(晉)나라 사람으로 형가와 더불어 협객의 시초로 분류되는 인물이다. 그는 처음에 범씨(范氏)와 중항씨(中行氏)를 섬긴 일이 있는데 이 두 사람은 예양을 그다지 예우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예양은 그들을 떠나 지백(智伯)이란 자를 섬기게 되었다. 지백은 진(晉)나라 육경의 한 사람으로 세력이 강성하고 야심만만한 사람이었는데 마침 찾아온 예양을 알아보고 국사(國士)로 예우하였다.
당시 진(晉)나라는 많은 씨족들이 세력을 다투고 있었는데 결국 ‘위(魏), 조(趙), 한(韓)’ 3개 성씨가 나라를 세우게 된다. 그리하여 진의 지백이 이들을 공격하게 되는데 도리어 이들 3개 연합국에 패해 나라는 분해되고 지백은 멸족하게 된다. 조나라 양자(趙襄子)는 이미 죽은 지백의 두개골에 옻칠을 해서 술잔으로 쓰며 과거에 당한 분풀이를 한다. 지백이 패한 후 그의 가신들은 대게 새 주인을 찾아 떠났을 것이다. 그러나 예양만은 새 주인을 찾지 않고 산중으로 달아나 탄식했다.
“ 士爲知己者 死, 女爲說己者 容 (사위지기자 사, 여위열기자 용)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고, 여자는 자기를 사랑해 주는 사람을 위해 화장을 한다'
”
이후 성과 이름을 바꾸어 죄를 받은 사람으로 꾸민 다음 조양자의 궁전으로 들어가 변소의 벽에 흙을 바르는 일을 하며, 몸에 비수를 지니고 찌를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두달 후 조양자가 변소에 들어가는데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채고 변소 주변을 샅샅이 수색하게 한다. 호위병들은 잠복하고 있던 자객 하나를 끌고 나와 심문해보니 바로 예양이었는데, 품에 칼을 품고 있었다. 예양은 서슬 퍼런 조양자 앞에서 ‘죽은 주군을 위해 원수를 갚으려 했다’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주위에 있던 자들이 그의 목을 베려고 하자 조양자는 그를 의로운 사람이라며 풀어주었다.
그러나 예양은 여기에서 포기하지 않는다. 얼마 지나서 그는 몸에 옻칠을 하고 숯을 삼켜 문둥이에 벙어리가 되어 남이 자기 모습을 못 알아보게 하고는 도회에서 구걸을 하며 다녔다. 자기 아내도 못 알아볼 지경이었는데, 어느 날 친구가 그를 알아보고 울면서 말했다.
- "자내만한 재능으로 예물을 바치고 조양자의 부하가 된다면 조양자는 반드시 자네를 가까이하고 총애할 것이네. 그런 다음에 그에게 접근하여 목을 베면 오히려 손쉽지 않겠나? 어째서 자네는 몸을 그 모양으로 망가뜨리고 원수를 갚을 작정을 한단 말인가? 그래가지고는 성공하기가 힘들 것 같네.”
예양은 답했다.
- “이미 예물을 바쳐 남을 섬기는 처지가 된 후에 그를 죽이려 한다면 두 마음을 품고 주군을 섬기는 일일세. 지금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은 매우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지.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후세에 남의 신하가 되어 두 마음을 품어 주인을 섬기는 자를 경계하려는 것이네.”
이듬해 기원전 450년 2월 초사월, 봄 사냥철에 예양은 조양자가 말을 타고 지나가는 다리 밑에 숨어 있었다. 조양자의 말이 알아채고 놀라 날뛰니 조양자가 사람을 시켜 다리 밑에 숨은 자를 데려오니 예양이었다. 조양자는 예양의 진심을 알았으되 더 이상 용서해주는 일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자 예양은 자신이 지난번 암살하려 했을 때 용서해준 일에 감사하면서 조양자의 옷이라도 칼로 베어 원수를 갚으려는 뜻을 이루게 해주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말한다. 조양자는 그의 의로운 기상에 감탄하고, 사람을 시켜 자기 옷을 예양에게 가져다주도록 했다. 예양은 칼을 뽑아 세 번을 뛰어올라 그 옷을 베어버리고는 칼에 엎어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가 죽던 날 ‘조나라의 뜻있는 선비들이 이 소식을 전해 듣고 모두 그를 위해 눈물을 흘렸다’고 사마천은 기록하고 있다.
관련 고사
- 칠신탄탄(漆身呑炭): 숯을 삼키고 몸에 칠을 하는 고난을 견디며 복수를 기다린다
- 국사우지국사보지(國士遇之國士報之): 국사로 대우하면 국사로 갚는다
- 삼약격지(三躍擊之): 예양이 조양자 암살에 실패하고 자결하기에 앞서 조양자의 옷을 벨 기회를 달라 청한다. 예양의 의리에 감동한 조양자가 자신의 겉옷을 벗어주자 예양은 칼을 뽑아 껑충 뛰어오르며 세 번 옷을 찌른 다음 스스로 칼을 찌르고 자결한다.
평가
예양은 어쩌면 전국(戰國)이라는 특수한 국면에서 특정 주군을 보좌함으로써 역사의 전면으로 떠오르고자 했던 하급 선비들의 마음가짐을 대변한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양처럼 칼을 든 사람뿐만 아니라 지식을 가지고 출사하는 사람들의 운명도 다르지 않았다. 싸움 와중에 우두머리가 쓰러지면 쓰러진 이와 함께 갈 것인가 새로운 길을 갈 것인가는 선택의 몫이었다. 대체로 자기를 따르는 무리들을 모두 예양과 같은 이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이라면 전쟁의 각축장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컸다. 우두머리들은 부하 전사들이 예양을 표본으로 따르기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비자는 「간겁시신(奸劫弑臣)」에서 예양에 대한 혹독한 평가가 내린다.
“ 예양은 지백의 신하가 되어 위로는 주군을 설득하여 법술과 도수(度數)의 이치를 깨쳐 화란을 만나지 않도록 하지 못했고, 아래로는 그 대중을 이끌고 제어하여 국가를 안정시키지도 못했다. (중략) 비록 잔혹하게 자기 몸을 해치고 죽여가며 주군을 위한다는 이름을 얻었지만 실상 지백에게는 털끝만큼의 도움도 되지 못했다. 이런 짓은 내가 비천하게 여기는 바이지만 세상의 군주된 이들은 충성스럽다 하여 높게 산다.
”
한비자가 보기에 예양의 행동은 의도와는 다르게 아무런 실익이 없는 짓이다. 그러나 사마천이 예양을 높이 산 것은 그가 대가를 바라지 않고 주동적으로 행동했기 때문이다. 그는 고용된 사람이라기보다 여전히 독립적인 사람이다.
'와호장룡'의 진짜 주인
2001년 아카데미 시상식은 세계 영화팬들을 연거푸 네 번씩이나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아카데미 역사상 처음으로 중국 무협 영화 「와호장룡(臥虎藏龍)」이 4개 부문을 석권하였기 때문이다. 3월 25일 L.A.의 슈라인오디토리움에서 있던 아카데미 시상식은 시작부터 긴장감이 감돌았다. 미국인들의 잔치로만 여겨지던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중국영화 「와호장룡」이 10개 부문의 후보에 오르면서 무서운 복병으로 등장하더니만 미술감독상, 음악상, 촬영상, 외국어작품상 등을 연달아 거머쥐었다. 땅콩을 심심풀이로 먹기에 안성맞춤이라는 무협영화로 아카데미의 벽을 뚫는 기염을 토한 것이다.
무협이라는 가장 대중적인 장르를 통해 중국 고전문화의 유산을 탐구하고자 한 「와호장룡」은 지극히 중국적인 정서로 미국 관객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한마디로 미국 내에서 「와호장룡」의 열풍은 대단했다. 아시아와 유럽을 통틀어 미국에 진출한 외국어 영화로는 사상 처음으로 흥행성적 1억 달러를 돌파한 점은 미국인들에게도 놀라움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다음은 「와호장룡」의 리안(李安) 감독이 영화 시사회 직후에 가진 내외신 기자들과의 인터뷰 내용이다. 특히 미국 내 기자들은 ‘차이니즈 나이트’ 즉 이 중국판 기사(騎士)영화에 나오는 용어에 관심이 많았다.
- - 이 영화의 특징과 감독을 맡은 동기를 간단히 말해달라.
- “내 어린 시절의 상상력은 대부분 무협영화와 무협지가 키운 것이다. 수천 년 동안 중국 문인들은 협객이 되고 싶은 꿈을 꾸었다. 그 꿈을 종이 위에 맨 처음 적은 것이 사마천이 지은 『사기』의 「자객열전」과 「유협열전」이다. 그 후에도 이 협객들의 정사(正史)를 문학화하는 무협문학가가 중국사에 쉴새없이 출몰해왔는데, 영화 「와호장룡」은 1930~40년대의 유명한 무협소설과 왕뚜루가 쓴 5부작 『학철오부곡』 중에서 제 4편 ‘와호장룡’을 각색한 것이다.”
- - 영화에 자주 나오는 강호(江湖)는 무엇인가?
- “강호는 협객들의 생존세계다. 그 세계의 법칙은 협(俠)의 뼈와 부드러운 창자, 의기를 산처럼 중히 여기고 의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세계다.”
- - 협객은 무엇인가. 이른바 차이니즈 나이트(knight)인가?
- “그렇게 비유해도 괜찮다. 협객은 본래 ‘관군’에 대한 ‘재야’, 즉 민간의 무사를 상징한다. 주로 검객이나 무예인, 도적 등의 세계를 가리키는데, 넓은 의미로는 무예와 관련이 없는 책사, 자발적인 반란군, 정처없이 강호를 떠돌아다니는 사람들도 포함된다.”
- - 리안 감독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역사상의 협객 한 사람만 말해달라.
- "예양(豫讓)이다. 사마천의 「자객열전」에서 ‘사나이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서 죽는다’는 말을 남기고 피를 뿌리며 사라진 사람이다.”
- - 예양이 ‘와호장룡’ 영화에도 나오는가?
- “...그건 아니다. 다만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서 죽는다’라는 그의 최후의 절규가 이 영화에 흐르는 일관된 주제다. 비록 스크린상에 나타나는 주인공은 주윤발과 양자경이지만 그 스크린의 이면의 주인공은 예양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황서우보, 한정선 역, 『사기백과사전』, 휘닉스, 2011.
- 사마천, 연변대학 고적연구소 역,『사기열전』, 서해문집, 2006.
- 강효백, 『협객의 나라 중국(강효백의 중국역사인물기행)』, 한길사, 2002.
- 공원국, 『춘추전국이야기 3(중원을 장악한 남방의 군주)』, 위즈덤하우스,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