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개방
개혁개방 연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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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 | 닉슨의 중국 방문 |
1973 | 43 방안 |
1976 | 마오쩌둥 사망, 화궈펑 당 및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취임 |
1978 | 중국 고위 경제사절단 해외 방문 |
1978 | 11기 3중전회 |
단기적으로는 공산당의 문화대혁명에 대한 반성의 결과, 장기적으로는 마오 시기의 사회주의 건설과정에 대한 반성의 결과라 할 수 있다. 문혁이 종결되는 1976년 즈음의 중국 주민들의 생활 수준은 1950년대와 비교했을 때 거의 나아지지 않았고, 이에 따라 마오쩌둥 사망과 문혁의 종결 이후 등장한 화궈펑 체제는 체제 정당성을 위해서 새로운 경제발전 방식을 모색하였다. 이렇듯 개혁개방은 본래 마오쩌둥의 지명을 통해 등장한 화궈펑 체제의 의제였다. 게다가 개혁개방은 본래 마오 시기, 즉 문혁 후반기의 중미 관계 개선이나 외국 자본 유치, 기술 도입 등의 기초 위에 성공적으로 실행할 수 있었던 의제였다. 덩샤오핑을 중심으로 하는 개혁 세력이 정치의 주도권을 차지한 것은 화궈펑 체제에서 개혁개방 자체를 거부했기 때문이라기보다, 문혁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덩샤오핑 등 개혁 세력이 주도권을 차지한 것은 1978년 11기 3중전회부터이다. 화궈펑 체제는 마오쩌둥의 지명을 통해 등장했으므로 마오의 권위를 절대화하는 양개범시를 제시했다. 하지만 양개범시가 존재하는 한 문혁 시기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 불가능했고, 이에 문혁 반대 세력이 양개범시에 대해 반대를 하며 진리표준토론을 전개했다. 그 결과 화궈펑 세력이 패배하고 11기 3중전회를 기점으로 덩샤오핑 등 개혁 세력이 주도권을 장악했다. 이에 따라 개혁개방은 덩샤오핑을 중심으로 하는 개혁 세력에 의해 주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