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샤오보
개요
류샤오보는 중국의 작가, 정치 평론가, 반체제/인권운동가이다. 중국의 민주화와 인권개선을 위해 노력했고 전 세계에서 인정받는 인권운동가이며 이에 공로를 인정받아 201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당시 류샤오보는 ‘국가정권 전복선동죄’로 교도소에 수감 중이었는데 노벨상을 수상한 최초의 중국인인 동시에 구금 중 노벨상을 수상한 세 번째 인물이 되었다.
생애
천안문 사건 이전
1955년 12월 28일 중국 지린 성 장춘 시에서 태어났다. 그가 만 11세가 되던 해 중국에서는 문화대혁명이 일어났고 1969년에 하방운동에 참여했던 부모와 함께 내몽골의 농촌지역으로 이주했다.
문혁이 잠잠해진 이후 1974년 중등학교(우리나라로 치면 중학교+고등학교)를 졸업하였고 3년간 농장, 건설현장에서 일하다가 1977년 지린 대학 중국 문학부에 입학, 졸업했다. 이후 1984년 베이징 사범대학에서 중문학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1988년 베이징 사범대학에서 문예부 박사과정을 취득했다.
박사학위를 딴 이후에는 미국, 노르웨이, 스위스 등에서 중국 문학과 중국 철학, 정치 등을 강의했다.
류샤오보가 본격적으로 중국의 체제를 비판하는 성향을 드러낸 것은 80년대 중반 철학자인 리저허우를 비판하는 글을 쓰면서인데 이는 중국 문단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이를 계기로 류샤오보는 흑마라는 필명을 얻게 된다.
천안문 사건 이후
1989년 뉴욕의 컬럼비아 대학 버나드 칼리지(Barnard College)에서 방문학자로 체류 중이었는데 1989천안문사건의 발발 소식을 듣자마자 계약을 해지하고 귀국하게 된다. 당시 천안문의 사군자로 불리던 저우둬, 허우더젠, 가오싱등과 함께 지식인을 대표해 천안문 광장에서 단식 투쟁을 벌였으며 전공인 동양의 전통문화와 연계해 마오쩌둥을 비판하고 청년 대표 가운데 한명으로 중국 정부와 협상을 하게 된다.
시위가 천안문광장의 사수를 주장한 차이링등의 강경파와 평화적 해결을 주장한 우얼카이시, 왕단들의 온건파로 나뉘자 류샤오보는 비폭력 민주화 요구 시위에 참여하여 온건파를 대표하게 된다. 6월 4일, 무력진압이 시작되자 계엄군과 타협하여 학생들의 철수를 돕는 등의 활약을 하는데 우선 시위를 해산하여 유혈사태를 피하고 상황을 지켜보자는 주장을 하는 온건파였던 그의 사상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또 ‘6.2단식투쟁’ 선언문에서, 류샤오보는 정부뿐 만아니라 학생들의 반성 또한 촉구했는데 6월 5일 체포되어 ‘반혁명 선전선동죄’로 유죄를 받고 바로 사면된 것도 당시 천안문 광장에서 대규모 유혈사태를 막으려 했던 그의 노력이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사태가 진압된 이후 류샤오보는 6월 6일 중국 공안 당국에 체포되고 사건의 주동혐의로 베이징에 있는 친청 감옥에서 20개월 동안 구속조치를 받게 되며 89년 9월에는 모든 공직을 박탈당한다. 당시 천안문 사건의 주동자들의 대부분은 크게 중형을 선고받지 않았고 해외망명 희망자들에게는 형에 대한 일시적 집행정지 후 해외추방을 하는 방식을 통해 망명기회를 제공했는데 이는 당시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유지정책과 미국의 압박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류샤오보는 91년 1월 석방 된 이후에도 중국에 남아 투쟁을 계속한다.
베이징에 남아 문필활동과 인권, 민주주의운동에 참여하고 단식투쟁을 통해 정부에 천안문 사태에 대한 진상규명과 재평가, 정치개혁을 요구하는 청원운동을 벌이다 1995년 5월 8일에 다시 중국 공안당국에 사회불안 조장 형의로 체포되어 9개월 동안 가택연금을 당한다.
91년 1월 석방된 이후 민주주의 운동과 문필활동을 재개하면서 지금의 아내 류샤와 결혼하게 되는데 중국의 위협적 대만정책을 비판하고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10.10선언’을 발표하고 천안문 사건에 의해 희생된 노동자의 권리 요구를 위한 운동을 벌이다가 결혼직후 다시 체포된다. 이후 1996년 10월 8일부터 1999년 10월 7일까지 ‘사회질서 교란죄’로 체포되어 노동 개조 3년 처분을 받는다. 중국의 노동 개조형은 서부지역의 사막이나 황무지등 오지에서 중노동을 하는 것으로 문혁이후 지식인층에게는 거의 선고되지 않는 중형인데도 불구 지속적으로 민주화 운동을 하던 류샤오보에게 선고된 것으로 보아 류샤오보에게 중국정부가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노동 개조에서 석방 된 뒤에는 평론가로 활동하며 2004년에는 국경 없는 기자회와 프랑스 기금화로부터 언론의 자유 수호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008년에는 중국의 민주화 개혁과 인권 선언 내용을 담은 ‘08헌장’의 발표를 준비하는데 류샤오보는 이 헌장을 통해 중국의 일당독제체제가 여러 가지 사건을 통해 국민의 의사를 침해하고 수많은 인명피해를 낳은 점을 지적했다. 아울러 장기독재체제와 기형적인 경제 발전으로 인해 빈부격차 등 사회문제가 심각한 현 상황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 체제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 외에도 구체적으로는 헌법 개정을 통한 인권 보장, 삼권분립과 중앙-지방의 분권화, 직선제에 기초한 입법 민주화, 사법부의 독립, 군대의 공유화, 공직선거제, 도농평등, 언론·집회·결사·종교의 자유 보장, 보편적 가치에 기반을 둔 공민교육의 실현, 대만·홍콩·마카오의 자유주의 제도를 수호하는 중화연방공화국 건국, 정치범과 양심수의 석방과 명예회복 등을 요지로 하는데 발표를 준비하는 도중 12월 8일 베이징 공안 당국에게 발각되어 ‘국가정권 전복선동’ 혐의로 구속되었고 2009년 6월 23일에 체포, 12월 11일에 베이징 제1급 인민법원에서 열린 재판을 통해 11년 형을 선고 받았다. 베이징 고급 인민 법원은 2010년 2월 11일에 열린 항소심 재판에서 그의 항소를 기각하며 징역 11년형과 정치적 권리 박탈 2년형을 추가로 선고했고 류샤오보는 랴오닝 성 진저루 시의 교도소에 수감된다.
노벨상 수상
수감 중이던 2010년 10월 8일 민주화 운동과 인권운동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된다.
이에 중국 정부는 반발했고 신화 통신사등의 중국의 관영 매체의 의견을 통해 류샤오보의 노벨 평화상 수상이 중국에 대한 내정간섭이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류샤오보의 판결과정은 중국의 법률과 국제인권 표준에 모두 부합하며 서방권 국가들이 노벨평화상을 1989년 국제사회에서 중국을 고립시키기 위한 달라이 라마의 노벨상 수상과 같은 맥락의 정치적인 도구로 이용한다고 항의했다. 형법학자 주원치와 가오밍쉬안은 각 나라마다 사회, 문화적인 차이에 의해 법률이 상의할 수 있으며 어떤 나라에도 언론에 자유에는 특정한 제한이 있음을 지적했다.
이에 더불어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노벨 평화상은 국가 조화, 국가 간의 우정, 군축 진전, 평화 회의 소집 및 선전에 기여한 사람들에게 수여되어야 한다. 류샤오보는 중국 법률을 위반하여 중국 사법 당국의 판결을 받은 범죄자였기 때문에 노르웨이 노벨 위원회가 그러한 사람에게 노벨 평화상을 수여하기로 한 결정은 노벨상을 모독하는 행위이다."라고 규정했다.
이러한 중국의 항의로 중국 정부를 비롯한 러시아, 카자흐스탄, 튀니지, 사우디아라비아, 파키스탄, 이라크, 이란, 베트남, 아프가니스탄, 베네수엘라, 이집트, 네팔, 스리랑카, 수단, 쿠바, 모로코, 알제리, 필리핀등 19개국이 노벨 평화상 시상에 불참하게 된다.
2010년 12월 10일, 중국 정부가 류샤오보의 모든 가족, 친척들, 인권운동가등 수백 명을 출국 금지 시켜 노벨상 대리 수상을 막았고 때문에 노벨평화상 수상은 공석으로 진행된다. 결국 시상식장에서는 상징적으로 빈 의자를 설치하고 노벨 평화상 메달을 수여하게 된다. 메달과 상장이 빈 의자에 놓이자 이후 3분 동안 현장에서는 참여 인원 전원이 기립박수를 친다.
류샤오보의 노벨상 수상 소식은 그전까지 유명하지 않았던 그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낸 중요한 계기가 된다. 이후 류샤오보의 석방에 대한 요구가 전 세계적으로 퍼졌고 미국, 캐나다, 스위스등 서방의 다양한 국가들이 그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변호사, 학자, 작가, 인권운동자들의 서명운동 또한 활발히 전개되었으며 국제 인권단체와 사회단체들도 그의 석방 운동을 지지하였다. 이후 2017년 6월 26일 간암 말기 진단을 받아 병보석으로 가석방되었다. 이후 투병생활을 지속하다 그 해 7월 13일 다발성 장기 기능 상실로 사망했다. (향년 61세)
사상=
류샤오보의 성향에 대해서는 1988년 11월 27일 홍콩 월간지 카이팡지와의 인터뷰가 가장 언급된다. 이 인터뷰에서 류 샤오보는
It took Hong Kong 100 years to become what it is. Given the size of China, certainly it would need 300 years of colonisation for it to become like what Hong Kong is today. I even doubt whether 300 years would be enough. 홍콩이 지금처럼 되기는 100년이 걸렸다. 중국의 크기를 볼 때, 중국이 오늘의 홍콩처럼 변화하려면 300년의 식민지 역사가 필요하다. 솔직히 300년도 부족할 것 같다.
라는 언급을 한다. 요약하자면 친서양적인 사상을 갖고 있는데 더불어 베트남전 옹호와 부시정권의 이라크, 아프간 전쟁을 지지한 것을 보고 과연 노벨상 수상에 적합한 인물이었는가에 대한 비판 여론도 많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