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로천사
Duarbfl0204 (토론 | 기여)님의 2016년 6월 23일 (목) 22:49 판
소개
<거리의 천사>라고도 한다. 마로천사(馬路天使)는 1937년 위안무즈(袁牧之, 1909~1978)가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영화이다. 자오단, 주쉬안, 웨이허링, 자오회이션 등이 출연했으며 할리우드 영화를 각색한 것으로 코미디적 요소가 가미되어 있다. 감독인 위안무즈는 1938년 옌안영화단의 결성을 주도하게 된다. 배우인 자오단(趙丹, 1915∼1980)과 웨이허링(魏鶴齡, 1907∼1979)은 이 시기를 대표하던 남자 배우들이었다. 위안무즈(袁牧之)가 시나리오 작업과 감독을 맡은 영화 <거리의 천사>는“중국영화계의 특별한 꽃”이라고 불렸다. <거리의 천사>는 순수한 서민소재의 영화이다. 중국 1930년대 대도시 하층시민의 생활을 그대로 재현하였으며 도시빈민의 실업과 가난, 굴욕적인 생활을 묘사하여 그들의 비참한 삶을 초래한 사회문제를 심각하게 밝혔다. 이 영화는 단순히 하층민의 생활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창작자의 현실에 대한 깊은 사고를 담아내고 있다.
줄거리
- 1930년대 상하이를 배경으로 여주인공인 샤오홍과 샤오윈 자매는 유곽에서 주인 부부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는 상태이다. 아직 어린 샤오홍은 요청하는 손님에게 노래를 부르고 언니인 샤오윈은 유곽에서 매춘을 한다. 이런 샤오홍의 연인인 샤오천은 악단에서 트럼펫을 부는 일을 하고 있으며 그의 절친한 친구인 라오왕은 신문파는 사람이다. 샤오홍의 건너편에 살고 있는 샤오천은 창문을 사이로 두고 서로를 특정한 소리로 호출하며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연주하는 등 사랑을 나눈다. 하지만 샤오홍의 언니인 샤오윈은 공교롭게도 샤오천을 사랑하는 상태이며 이런 샤오윈을 좋아하는 사람은 라오왕이다. 어느날 어린 샤오홍에게 늙고 부유한 남자가 눈독을 들이며 샤오홍에게 옷감을 사주자 이를 본 샤오천이 분노해 둘의 관계는 갈등에 휩싸이게 된다. 이후 유곽의 주인 부부에게서 샤오홍을 사들이려는 늙고 부유한 남자의 의도를 알게 되자 샤오홍 자매는 방법을 강구하게 된다. 이내 샤오윈의 권유로 샤오홍과 샤오천은 함께 도망을 가게 되고 이를 계기로 둘의 갈등이 해결된다. 샤오홍이 샤오천과 행복하게 살고 있을 무렵, 샤오윈의 뒤를 밟아 이들을 추적한 주인에게로부터 샤오홍을 지키려다 언니인 샤오윈은 칼에 찔리고 결국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시대적 상황
1930년대의 상하이
- 1893년 상하이 거류 민회 개항 50주년 기념식에 즈음하여 상하이 조계는 이미 모든 공공 설비에 당시 서구 과학 기술의 수준이 담겨 있었다. 당시 외국 민회들은 상하이를‘서양 생활 및 과학 기술과 동등한 수준’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그러면서 1930․40년대에 유럽의 대도시를 개조하면서 뒤따랐던 부정적 사회 현상이 상하이에서도 속출하였다. 그래서 쓰레기 청소, 유행 질병 소멸, 매음 억제 등은 상하이, 런던, 파리가 직면한 동일한 골칫거리였다. 동시에 청조 당국의 관할에서 벗어난 중국인들은 외국인들의 쾌적한 생활을 동경하면서 서양 사람에 대한 편견을 줄여가며 이질 문명 간의 대화 가능성을 열어간다. 이런 정황에서 라오상하이 엘리트들의 현대화와 민족중흥에 대한 중첩된 갈망은 개량운동과 1911년 신해혁명으로 분출되었다. 청조가 막을 내리고 1912년 중화민국이 성립되지만 중국은 다시 군벌 혼전의 국면으로 접어든다. 1907년 러시아 10월 혁명의 성공은 921년 7월 23일 상하이 프랑스 租界에서 중국공산당 창당을 이끌어 낸다. 19세기 말, 이미 초기 자본주의의 싹이 움텄던 라오상하이에 공산주의 유토피아를 꿈꾸는 정당이 결성되었던 것이다. 비록 정치 정당으로서 공산당의 출범은 그 형세가 미미하였지만 상하이는 잠시나마 이데올로기의 해방구로서 대립되는 이념적 요인이 공존하는 공간이 된다. 미완의 봉건 잔재인 군벌의 혼전, 근대 국가로서 중화민국의 성립, 새로운 구망의 대안으로서 공산당 창당 등의 역사적 변화는 상하이 조계의 문화 공간에서 결정적 변화요인으로 작동되지는 않았다. 관료자본주의로 경제의 틀이 잡히면서 상하이는 노동자 계층이 조직되고 공산당의 활동과 연계하여 1925년 상하이 남경로의 시위에서 13명이 영국 순경의 총탄에 쓰러지면서 전국적인 반제反帝 운동으로 확산된다.(5․30운동) 이때까지만해도 상하이는 1924년 국공합작의 실천적 결실이 이루어진 듯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북벌전쟁(1926년~1927년)의 승리로 군벌 시대는 종결되지만 1927년 장개석의 반공정변(4/12)으로 국민당과 공산당의 이념적 갈등은 더욱 거세진다. 자국의 영토 안에 외국인이 거주하고 그런 시공간에서 민족 전쟁을 치루고, 다시 공산당에 대한 정치적 탄압이 자행되던 공간 환경에서 상하이는 다양한 역사문화적 요소가 뒤섞여서 풍요로운 근대 도시 문화를 꽃 피운다. 1927년 4월 18일 남경을 수도로 국민정부가 수립되지만, 남경 정부에서는 공산당 수뇌부를 지명수배하고, 왕정위의 무한 국민정부는 공산당과의 결별을 공식적으로 선언한다. 이런 정치 형세에서 1934년 말부터 공산당은 대장정을 시작하고 상하이 공산당원은 더욱 고립 분산된다. 1931년 9월 18일 일본군이 동북을 침공하고, 이듬해 1월 28일 상하이 閘北 華界를 침공한다. 일본군은 제국주의 침략의 고삐를 다그쳐 1935년에는 북방의 여러 개 성을 침략하고, 1937년 7월 7일에는 중일전쟁이 전면전으로 확산된다.
- 이런 상황에서 1930년대 이전에 상하이의 영화붐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한 것은 할리우드 영화였다. 중국영화로는 전통희곡과 탐정모험물, 코미디물, 윤리설교 류의 대중적인 오락작품이 상연되었으나 큰 반향을 얻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외국영화가 주도한 상하이에서 이뤄진 영화 관람 형태는 1930년대 들어 변화의 조짐을 보인다. 이는 1930년 설립된 롄화영화사(聯華影業公司)가 ‘국산영화 부흥(復興國片)’ 슬로건을 내걸고 제작한 국산영화의 흥행 성공이 밑거름이 되었다. 그리고 1931년 일본의 1.28 상하이 침공 이후 상하이에 애국주의 정서가 미만하자 기존의 거대영화사였던 스타영화사(明星影業公司)가 좌익작가를 극작가로 영입하면서 이러한 경향은 강화된다. 이 두 영화사를 중심으로 제작된 영화들은 할리우드 영화와 오락물 일색의 중국 관객의 관람 형태를 바꿔놓기 시작하며 영화 내역에 좌익적인 색채를 부여한다.
작품 창작의 배경
- 영화 <거리의 천사>의 소재는 대도시 생활에서 기원한다. 위안무즈, 정쥔리(鄭君里), 니얼, 자오단(趙丹), 웨이허링(魏鶴齡) 등은 상하이의 성모원길(聖母院路)이라는 작은 술집에서 자주 술을 마셨다. 그들은 그곳에서 예술창작에 대해 토론하고, 사회저층에서 생활하는 대중과 접촉하기도 하면서 대중의 비참한 운명에 대한 창작의욕에 대해 토로하기도 했다. <거리의 천사>의 주인공을 연기한 자오단은 “이 술집에서 우리는 다양한 사람을 만났다. 삯품 파는 사람, 목이 쉬어버린 신문 판매원, 가녀, 삼류기녀 등이다. 모두가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하등인(下等人)’이다. 우리는 당시 사회에 대한 불만과 ‘하등인에 대한 동정심’으로 그들을 표현하고자 <거리의 천사>를 창작했다.”고 말했다. <거리의 천사>를 창작하는 과정에서 위안무즈는 상하이의 바시엔교(八仙橋)와 대세계 부근 그리고 스마거리(四馬路) 일대의 기생집, 찻집, 대중목욕탕, 이발소를 두루 다니며 인물관찰과 생활체험을 했다. 영화 속 기녀, 가수, 취고수, 신문판매원, 실업자, 이발사, 소매상인 등을 사회 하층계급의 비참한 운명을 묘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한 체험으로 그려낸 인물들을 통해 시대의 암흑을 날카롭게 비난하였다. 환경을 진실 되게 표현하기 위해 골목, 술집, 거리, 목욕탕, 다락방 등은 모두 실제 운영하고 있는 곳을 선택하여 촬영을 하였다. 복잡한 도로, 좁은 골목, 시끄러운 이발소, 낮은 다락방, 낡은 신문지가 붙어 있는 목재 벽과 마주한 옥상 창문 등이 <거리의 천사>만이 가진 독특한 배경을 만들어내었다. 이러한 배경은 소인물의 생활배경과 신분, 생활방식, 성격, 비극적인 운명을 더욱더 돋보이게 만들었다. 영화는 주제부터 배경, 인물까지 모두 창작자의 실제 목격과 현실을 기초로 구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