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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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홍콩 반환(香港回归, Hong Kong reunification)은 1997년 7월 1일, 중국이 영국령이었던 홍콩특별행정구에 대한 주권을 회복하게 된 것을 말한다. 홍콩에서는 7월 1일을 홍콩특별행정구설립기념일로 지정하였다.
역사적 배경
아편전쟁
홍콩이 식민지화되기 전 19세기 청나라 시대, 1840년~1842년 1차 *아편전쟁이 일어났다. 이 아편전쟁을 종결시키기 위해서 청나라는 1842년 8월, 영국 함대의 갑판에서 남경조약을 체결해야만 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홍콩은 홍콩 섬, 구룡반도, 신계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영국은 아시아와 서방 국가들 간에 무역을 할 수 있는 항구가 있는 홍콩을 아시아 침략의 발판으로 삼기를 원했다. 결국 청나라는 남경조약으로 인해서 홍콩 섬을 영국에 넘겨주어야만 했다. 남경조약의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홍콩을 영국에 할양한다.
2. 광저우(廣州)·샤먼(廈門)·푸저우(福州)·닝보(寧波)·상하이(上海) 등 5개 항구를 개항한다.
3. 개항장에 영사를 설치한다.
4. 전쟁 배상금으로 1,200만 달러와 몰수당한 아편의 보상금으로 600만 달러를 영국에 지불한다.
5. 행상(行商) 즉, 공행(公行)과 같은 독점상인을 폐지한다.
6. 수출입 상품에 대한 관세를 제한한다.
7. 청나라와 영국 두 나라 관리의 대등한 교섭을 한다.
1857년 제 2차 아편전쟁이 일어났다. 영국은 애로호 사건을 구실로 하여 광저우로 쳐들어 가 톈진까지 위협했다. 결국 청나라는 다시 한 번 불평등조약을 맺게 되었는데, 이 톈진조약의 체결 이후 1860년 또 다시 영국과 프랑스가 베이징으로 쳐들어오면서 청나라 공친왕과의 협상 끝에 베이징 조약을체결하게 되었다. 이 때 홍콩은 영국에 구룡반도마저 할양했다.
홍콩의 세 지역 중 두 지역이 할양되고, 1895년에 일어난 청일전쟁 이후 중국이 일본에게 패해서 위태로워지자 영국은 자신들이 가진 홍콩의 두 지역을 지키기를 원했다. 두 지역 외에 홍콩의 신계 지역은 중국과 외국을 이어주는 길목 역할을 하였고 예전 아편 무역의 경유지이기도 했으므로 아주 중요했다. 결국 1898년 영국은 중국을 압박하여 신계 지역을 99년 동안 조차하게 되었다.
제 2차 세계대전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1941년에 일본군이 홍콩으로 쳐들어왔다. 그리고 1945년 8월까지 홍콩을 점령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게 되자 영국은 다시 홍콩을 귀속시키고자 홍콩 총독부를 재건하였다. 이 때부터 조금씩 홍콩의 소유권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했는데, 영국은 전쟁 후에도 본인들의 식민지를 유지하기를 원했고, 중국은 홍콩을 다시 돌려 받고 싶어 했지만 국공내전이 격화되면서 남쪽은 돌볼 겨를이 없었다. 이 때 국공내전으로 인해서 많은 중국 본토의 난민들이 홍콩으로 유입되었다.
1949년 이후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1980년대까지 홍콩은 눈부신 성장을 보였다. 국공내전으로 인해 홍콩으로 건너간 중국 본토인들은 기술과 자본을 가지고 홍콩에서 공장을 설립했다. 그렇기 때문에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홍콩 공업이 성장하기 시작했는데, 먼저 방직과 의류 제조업이 나타나고, 그 후 플라스틱과 가발 제조업이 출현했다. 특히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전자제품, 시계 등 홍콩 제품의 중소제조업이 발달하면서 산업의 급속적인 발전이 이루어졌다.
홍콩 반환 협정
1980년대 초반,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정책을 시행하면서 홍콩 전 지역에 대한 주권의 회복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중국 측은 영국이 홍콩 섬과 구룡반도를 할양 받을 때 불평등조약을 체결하여 영토를 점령했기 때문에 영국은 이 두 지역을 반환해야 하며, 신계 지역은 조차가 끝나는 즉시 반환해야 한다고 말했다. 회담이 오고 간 후 1984년 12월 19일, 마침내 중국과 영국은 <홍콩 문제에 관한 중화인민공화국과 영국의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이 공동성명에서 중국은 홍콩에 대해 50년 동안 *일국양제의 원칙에 따라 통치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일국양제는 하나의 국가를 두 가지의 제도로 통치하는, 즉 중국 대륙은 사회주의 제도를 견지하며 홍콩에는 자본주의 제도를 시행하는 것을 말한다. 덩샤오핑이 제안한 이 일국양제는 홍콩이 중국에게 안전하게 반환되는 데에 큰 공이 되었다. 홍콩 반환에 대한 중영공동선언에 나타난 주요 내용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홍콩특별행정구는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에 직속된다. 외교와 국방 사무는 중앙인민정부가 관리하며 그 이외는 홍콩특별행정구가 고도의 자치권을 가진다. 홍콩특별행정구는 행정관리권, 입법권, 독립적인 사법권과 종심권을 소유하며 현행 법률은 기본적으로 불변한다. 홍콩특별행정구의 사회, 경제 제도와 생활방식은 변하지 않는다. 언론, 출판, 집회, 이주, 파업, 학술연구, 종교의 자유를 법적으로 보장한다. 홍콩특별행정구는 자유항과 독립관세구역, 국제금융중심질서의 지위를 유지하며 거래시장을 계속 열어둔다. 홍콩 달러가 계속해서 통용된다. 홍콩특별행정구는 ‘중국 홍콩’의 이름으로 세계 국가와 지역, 국제기구와의 경제, 문화적 관계를 계속 발전시킬 수 있다. 여행증명서를 자체로 발급할 수 있다.
1997년 7월 1일, 전세계적인 주목을 받으며 홍콩 컨벤션센터 그랜드 홀에서 중국의 오성홍기와 홍콩 특별행정구기가 게양되어 마침내 홍콩이 중국의 품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홍콩 반환 협정에 대한 평가
중국 측에서 제안한 ‘일국양제’와 ‘홍콩인에 의한 홍콩 통치 원칙’ 은 고도자치제에 속하는데, 이는 홍콩에 대한 중국과 영국의 문제를 현명하게 해결하는 데에는 도움을 줬지만, 일국양제에 대한 평가와 그것이 미친 영향들은 다소 상반되는 경향이 있다.
우선 일국양제가 미친 긍정적인 영향은 일국양제로 인해 홍콩은 자본주의를 계속해서 유지해 나갈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홍콩과 중국 대륙 둘다에게 이로운 점이었다. 홍콩인들은 그들의 시장 경제에 있어서 전반적으로 큰 변화를 느끼지 않아도 되었고, 중국은 자본주의가 발달되어 있던 홍콩을 특별행정자치구로 만듦으로써 홍콩의 자본과 국제 금융 시장, 기술, 경제적인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홍콩 측에서는 일국양제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경제적으로 중국이 발전할 수 있었던 큰 요인 중 하나인 홍콩의 경제가 반환 이후 갈수록 중국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고 경제 성장이 둔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정치적인 측면에 있어서는 홍콩인들은 중국이 겉으로만 ‘일국양제’ 제도를 시행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생각했다. 또한 2014년에 들어서는 홍콩의 행정 장관을 선출하는 방식에 있어서 ‘홍콩인에 의한 홍콩 통치 제도’가 모순적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홍콩인들이 원하는 민주주의에 어긋나는 것이었고, 직접 선거 방식의 도입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홍콩인들에 의해 *우산혁명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홍콩 반환의 영향
홍콩 반환에 대한 협상이 한창 진행 중이었던 1980년대, 홍콩인들은 홍콩의 중국 반환에 대해 다소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홍콩인들의 80%는 영국이 계속 홍콩을 통치하기를 바랐으며 4퍼센트의 홍콩인들만이 중국 본토에 의해 통치되기를 원했다. 홍콩인들은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고 난 이후의 자신들의 정체성 그리고 주체성에 대해서 걱정했다.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되는 날인 1997년 7월 1일이 점점 다가올 수록 홍콩인들의 불안감은 커져만 갔다. 그 영향으로 1980년부터 1996년까지 홍콩인들 65만명이 해외로 이주했다. 이후에도 중국이 제대로 지키지 않는 일국양제 원칙에 반기를 드는 홍콩인들은 결국 홍콩을 포기하고 계속해서 해외로 이주하였다.
우산혁명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기 전 홍콩인들이 우려했던 대로 중국 공산당은 친중파 인사를 홍콩 정부에 심으려고 했다. 또한 홍콩 행정 장관 직선제의 방식에 제한을 두며 계속해서 홍콩의 내정에 간섭하였다. 마침내 2014년, 홍콩 시민들이 *우산혁명이라고도 불리는 민주화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우산혁명이 일어난 까닭이 정치적인 민주화에 대한 갈망 때문만은 아니라는 견해가 다수이다. 사실 홍콩은 영국 식민지였을 때에도 완전한 자유를 가졌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전체 선거에 있어서 완전한 직선제 선출 제도를 가지지도 않았다.
홍콩의 중국 반환 이후 많은 중국 본토인들은 홍콩으로 건너갔다. 크게 늘어난 인구와 함께 극심한 빈부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홍콩 청년들의 실업난과 같은 경제적 어려움이 청년들로 하여금 울분을 토해내도록 했다. 문화적인 갈등 또한 혁명의 촉발에 한 몫을 했다. 홍콩인들에게 있어서 홍콩으로 유입된 본토인들은 그리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본토인들은 경제적으로 홍콩인들에게 뒤쳐지며, 문화적 시민의식 또한 뒤쳐진다고 여겨졌다. 그런데 이들이 홍콩에 자리를 잡고 분유나 각종 생필품들을 쓸어가자 중국 본토인들에 대한 경멸감이 반중 정서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홍콩 전체를 들썩이게 만든 민주화운동은 딱 한 가지의 요인 때문이 아니라 여러 복합적인 요인이 한데 쌓이고 얽히면서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영화 산업
홍콩인들의 불안감은 영화 산업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아비정전, 중경삼림, 해피투게더, 화양연화, 2046 등의 많은 대표작을 가진 홍콩의 저명한 영화 감독인 *왕가위 감독은 영화에서 홍콩 반환에 대한 이야기를 은유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 속에서의 주인공들은 방황하기도 하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과 사랑, 헤어짐 속에서 혼란스러워 할 때도 있다. 특히 1980년대와 1990년대 초의 영화에서는 반환 예정일인 1997년이 오기를 마냥 손 놓고 바라 봐야만 하는 홍콩인들의 심리가 영화에 잘 반영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1995년에 개봉한 영화 《중경삼림》에서 특히 그 심리가 잘 나타나 있는데, 두 가지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옴니버스 형식에서 특히 첫 번째로 구성된 이야기에서는 유통기한이 5월 1일인 파인애플 통조림이 이야기의 큰 흐름을 차지한다. 홍콩의 반환 날로 해석될 수 있는 기한인 5월 1일이라는 날짜에 얽매여 있는 주인공의 모습이 마치 1997년 7월 1일에 대한 홍콩인들의 압박감과도 같다고 볼 수 있다.
또한 2004년에 개봉한 영화 《2046》의 제목은 홍콩의 일국양제 원칙의 의거한 정치가 끝나는 해를 의미한다. 이 또한 2046년 이후 홍콩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 우려하는 홍콩인의 심리가 내재되어 있다.
참고자료
박광득, 『홍콩반환 20년의 회고와 전망에 관한 연구』, 대한정치학회, 대한정치학회보 25권4호, 2017.
김진호, 『홍콩 반환 10년 후 홍콩사회의 중국화 현상』,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연구소, 2007
김하림, 『홍콩 반환과 왕자웨이(王家衛)의 《중경삼림(重慶森林)》』, 중국인문학회, 2006.
이병태, 「중국과 대만의 통일정책 비교연구」, 충남대학교, 석사 학위 논문, 2001.
류영하, 「중국 민족주의와 홍콩 본토주의: 홍콩 역사박물관의 스토리텔링을 중심으로」, 산지니, 2014.
외부 링크
중국 위키백과 香港回归
아편전쟁 (서울시립대학교 위키)
우산혁명 (서울시립대학교 위키)
네이버 지식백과 홍콩의 역사
위키백과 홍콩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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