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양공
송양공은 송의 19번째 군주이다. 그는 서형에게 태자 자리를 양보한 적이있어 덕망 높은 군주로 알려진다. 송나라는 중화 문화권에 속하는 나라였지만 별로 강한 나라는 아니었는데, 제환공이 죽고 중원의 자리가 비자 송양공은 맹주가 되고자 하는 야심을 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명예욕이 지나쳐서 재상인 목이의 권고도 듣지 않고 어리석은 일들을 저질렀다. 그는 패자가 돼기 위해 약한 제후들을 불러 단합을 과시하려 하였으나, 증나라가 회맹에 늦어, 증나라 제후를 제사의 희생물로 삼는다. 그는 도가 지나친 행동으로 다른 제후들의 비난을 받고 망신을 당한다. 이후에 그럼에도 패자의 꿈을 포기하지 않아, 먼저 강국 초나라의 힘을 빌려 목적을 달성한 뒤 제후들을 모아 초나라를 굴복시키려 하였다. 그는 초나라에 먼저 뇌물을 주는 작전이 성공하여 녹상에서 회맹을 가졌고, 송양공은 허울뿐인 패자의 지위를 얻는다. 하지만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초나라에 의해 패자 자리를 빼앗기고 망신을 당한다. 송양공은 초나라에 대한 설욕전을 감행하려 했고, 강한 초나라 대신 정나라를 공격하는데, 정나라는 초나라에 원병을 요청하여 홍수 전투가 벌어진다. 여기서 유명한 송양지인의 유래가 나오는데, 송양공은 초나라 군대가 군열을 갖추고 난 후까지 기다려 정정당당하게 붙고자 했고, 부상당한 군사도, 노인도 공격하지 않았다. 초나라의 군세보다 열세였던 송군은 대패하였고, 그의 어리석고 위선적인 면모를 알 수 있다.
개요(생애)
성은 자, 이름은 자보, 송의 19대 군주인 송환공의 둘째아들로 송의 20대 군주로 기원전 650년부터 기원전 637년까지 재위했으며 일부 사료에서는 춘추오패의 하나로 여겨진다. (子姓,名兹甫,宋桓公次子,在部分史料中被认定为春秋五霸之一,為春秋时期宋國君主,在位十四年(前650年—前637年)。)
서형에게 황위를 양보하다
송양공이 태자이던 시절, 그는 태자 지명을 서형인 목이에게 양보했으나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았다. 이러한 미담은 여러 제후들의 귀에 들어갔고 이러한 그의 덕성을 배경으로 제환공은 후에 태자 소를 후계자로 세우고 송양공에게 그의 보필을 부탁했다. 이러한 제환공의 부탁으로 그는 정쟁을 끝내고 태자 소는 제효공이 되었다.
제환공을 이어 패자가 되고자 하다
제효공의 옹립을 마친 송양공은 제2의 패자가 되고자 등·조·주·증 등의 소국들을 불러 회맹하고자 했다. 기원전 641년 기일에 맞춰 회맹 장소에 등장한 사람은 조와 주 두 나라의 군주뿐이었고 등성공 영제는 참석을 망설이다 늦게 나타났다. 이에 화가 난 송양공은 증의 군주를 차수의 토지신에게 바치려했으나 목이는 그에 반대했다. 그러나 그는 목이의 말을 듣지 않고 결국 그해 여름 증의 군주를 제물로 제단에 올렸다. 이에 대해 증 군주를 삶아 바쳤다는 설과 그의 코에서 피를 내어 그것을 제물로 바쳤다는 설 등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그를 희생으로 사용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인의를 중요시했던 그동안의 송양공의 행적에 비해 이러한 일을 행했다는 것은 상당히 역설적이라고 볼 수 있다.
녹상회맹으로 맹주가 되다
기원전 639년 송, 제, 초의 제후가 녹상에 모여 회맹을 이루었고 이 회맹으로 송양공은 맹주 지위를 얻게 되었다. 이후 7월 송양공은 우땅에서 대회를 열어 각국에 참석을 바라는 격문을 보냈다. 목이는 송양공에게 병거를 거느리고 갈 것을 간했으나 양공을 그 말을 따르지 않았고 그에 목이는 3리 밖에 군사를 거느리고 매복해있겠다고 했으나 송양공은 이 또한 제지하고 몇몇 호위만 대동하고 대회에 참석하였다. 회맹 당일, 초성왕과 초의 대부 성득신과 투발이 단에 오르고, 왼쪽 계단으로는 송양공과 목이가 올라갔다. 삽혈 후 하늘에 맹세한 뒤 맹주를 추대하고 인사를 나누면 맹회는 끝이 나는데 초성왕은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침묵만이 흘렀다. 이에 송양공은 “오늘날 대회를 연 것은 과인이 백주 제환공이 남기고 간 그 업적을 계승하여 주왕을 높이고 백성을 편안케 하고 싸움을 없애어 군대를 쉬게 하고 천하와 함께 태평을 누리기 위함이요. 모든 군후께선 어떻게 생각들 하시는지요.”라고 입을 열었고 모든 군후들이 대답을 주저하는 사이 초성왕은 “군후는 참 좋은 말씀을 하였소. 그럼 누가 맹주가 되어야 하겠소?” 라고 물었다. 이렇게 송양공과 초성왕은 대화로 대치했고 당연히 자신을 맹주로 여겼던 송양공은 화가 나고 당황해 이 장소를 어서 벗어나야겠다고 여겨 좌석에서 내려오려던 순간 성득신과 투발이 예복을 벗자 그들의 옷 안에 있던 갑옷이 드러났다. 그들은 각기 허리에서 작은 붉은 기를 꺼내 단 아래를 향해 휘저었고 초성왕의 신하는 수천 명이나 되었다. 송양공은 목이에게 “내 그대의 말을 듣지 않다가 이 꼴을 당하는구나. 그대는 내 생각일랑 말고 속히 돌아가서 나라를 지키라.” 고 말하고 목이는 속히 그 자리를 벗어나 도성으로 돌아간다. 그렇게 송양공은 초에 붙잡히게 되고 후에 초성왕은 그를 노에 가둬두었다 노희공의 애걸로 못 이기는 척 양공을 풀어주었다.
홍수 전투와 송양지인
송양공이 풀려나 송으로 돌아왔을 때는 목이가 송의 군주를 계승하고 있었으나 목이는 다시 재위를 양공에게 넘겨주고 그는 다시 군주에 올랐다. 다시 군주 자리에 오른 송양공은 초에 설욕전을 감행하려 했으나 강국인 초나라를 바로 칠 수 없었기 때문에 우선 정을 목표로 삼았다. 기원전 638년 송양공은 위·허·등의 제후들과 함께 힘을 합쳐 정을 공격했고 정은 초에 도움을 청했다. 초의 군대와 송의 군대는 홍수에서 대치하게 되었고 송의 군대는 홍수에서 전열을 가다듬고 일전을 각오하고 있었지만 미처 강을 다 건너오지 못한 초나라 군대는 전투할 준비를 다 갖추지 못한 상황이었다. 목이는 이에 송양공에게 초의 군대는 강하고 수도 많은데 반해 우리는 인원도 적고 힘도 약하니 적이 완전히 강을 건너기 전에 공격하자고 진언했으나 송양공은 이번에도 그의 말을 거절했다. 그는 적이 준비되지 않았을 때 공격하는 것은 비열한 방법이며 초의 군대가 전열을 갖추고 난 후 군자답게 정정당당하게 붙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연하게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초의 군대는 몰려왔고 송의 군대는 참패하고 송양공 역시 부상을 입었다. 송양공을 비난하는 소리에 그는 “군자는 부상당한 적을 죽이지 않고 이모(늙은 적군)는 포획하지 않는 법이다. 옛날 용병은 적이 불리한 처지에 처한 것으로 승리를 도모하지 않았다. 과인은 비록 망국의 후손이기는 하나 대열을 다 이루지 못한 적을 향해 진격을 명할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이에 목이는 “주군은 전쟁이 무엇인지 그 근본을 모르십니다. 눈앞의 적이 어려움에 처해 있다고 공격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늘이 준 기회를 마다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전쟁은 이기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적군들이 아무리 부상을 입었다 해도 그들은 우리를 죽이러 온 자들입니다. 적군 중에 아무리 늙은 노인이 있더라도 그들 역시 우리를 죽이러 온 사람입니다. 하늘이 준 절호의 기회를 이용하지 않겠다면 차라리 부상당한 적의 군사와 노병들이 전열을 갖추기를 기다렸다가 항복하는 편이 현명할 것입니다.”라고 한숨을 지으며 말했다. 이 사건으로 ‘송양지인’이라는 고사가 생겨났고 그의 이러한 행위는 후세에 헛된 명분을 좇다가 이길 수 있는 전쟁에서 패한 어리석은 행위라 일컬어진다.
<참고문헌>
동주 열국지4, 민음사, 풍몽룡, 김구용 역, 2012
춘추전국의 영웅들1, 한길사, 신동준, 2011
춘추 전국의 패자와 책사들, 석필, 박인수, 2001
춘추좌전, 풀빛, 좌구명, 2009
중국 위키피디아 송양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