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존
하존(何尊)
서주(西周) 초기의 청동 예기(禮器)이며, 제사 중 술을 담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1963년, 산시성(陕西省) 바오지시(宝鸡市) 자춘진(贾村镇)에서 출토되었다. 현재는 금지출국전람문물[1]로 지정되어 바오지시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발견 비화
1963년, 어느 진(陈)씨 집안의 둘째 아들이 집 뒤편에 있던 절벽에서 산사태가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하여 그곳을 파내던 중 하존(何尊)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을 미쳐 알아보지 못하고, 그저 깨끗이 세척하여 식기로 사용한다. 그러던 중 1965년 8월 진씨는 생계를 위하여 바오지시의 어느 폐품 수집상에게 하존을 처분한다. 그해 9월 바오지시박물관에 근무하던 한 직원이 폐품 수집상의 수집품 더미에서 이것을 발견하게 되어, 박물관에 ‘도철문청동존(饕餮纹青铜尊)’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하게 되었다. 1975년에 베이징으로 옮겨져 전시되었는데, 이때 그곳에 있던 직원이 안쪽 아래에 있는 명문(铭文) 122자를 발견하는 덕분에 국보급 문물로까지 인정받게 되었다.
의의
정교하고 아름다운 조형과 더불어 하존의 바닥 부분에는 명문(铭文) 122자가 부조(浮彫)되어있는데, 이 명문의 내용에는 최초로 '중국(中國)'이라는 용어가 등장하여 상당한 의의를 갖는다. 한편 사료(史料)로써의 가치 역시도 인정받는다. 하존의 명문에는 성주(成周)로의 천도(遷都)와 관련된 내용이 언급되어 있어서 관련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해주었다. 또한 기존 학계에서는 성주로의 천도 시기를 성왕(成王) 5년 혹은 7년으로 보며 그 분석이 엇갈려 있었다. 그러나 하존의 제작년대는 '王五年'으로 명시되어 있어서, 이 덕분에 성왕 5년에 천도한 것으로 새롭게 밝혀질 수 있었다.
하존의 명문(铭文)
원문
隹王初遷宅(居)于成周,復禀武王豊(禮),福自天.
才(在)三月丙戌,王誥宗小子于京室,
曰:「昔才(在)爾考公氏,克弼文王,肆文王受玆[大命].
隹武王旣克大邑商,則筵告于天,曰:‘余其宅玆中國,自之乂民.’
烏虖! 爾有唯(雖)小子亡戠(識),視于公氏,又(有)毖于天,徹令. 苟(敬)享哉!」
惠王龍(+廾)德谷(裕)天,順(訓)我不每(敏).
王咸誥,何易(賜)貝卅朋,用作[□]公寶尊彝, 隹(惟)王五祀.
독음
유왕초천택우성주, 복품무왕례, 복자천.
재삼월병술, 왕고종소자우경실,
왈:「시재이고공씨, 극필문왕, 사문왕수자대령.
유무왕기극대읍상,즉정고우천, 왈:‘여기택자중국, 자지예민.’
오호! 이유수소자망식,시우공씨, 유비우천, 철령, 경향재!」
혜왕용덕유천, 순아불민.
왕함고, 하사패삼십붕, 용작[□]공보존이, 유왕오사.
해석
왕이 처음에 (백성들을) 옮겨 성주(成周)에 거하게 하였으며, 또한 무왕(武王)의 제례(祭禮)를 계속 잘 지켜 행해, 하늘로부터 복(福)을 받았다.
삼월병술일에, 王이 경실(京室)[2]에서 종소자(宗小子)[3]에게 훈계하여,
왕이 말하길:「예전에 너희 부모들의 때에 그들은 문왕(文王)을 잘 보좌할수 있었으며, 문왕은 이 큰 명을 받았다.
무왕(武王)이 이미 상(商)나라를 이기고, 바로(혹은 그래서) 하늘에 점을 쳐 제사를 지내, (무)왕이 말하길:‘내가 이 곳 中國에 머물며, 스스로 백성을 다스리겠습니다.’라고 했다.
오호라! 너희들이 비록 어려서 지식이 부족하기는하나, 너희들은 부친을 본받아, 하늘을 위해 공을 세워서 그 명을 완성해야한다. 정성스럽게 제사를 받들어라!」
왕은 덕을 숭상해 하늘에 풍성하게 제사를 지냈고, 나같은 지혜롭지 못한 자를 훈계하였다.
왕은 훈계를 마치고 하(何)는 보물 삼십 붕(朋)을하사받았다. 그래서 이것을 만들어 보배로운 예기(禮器)로 사용하려 한다, 왕 5년에 적는다.
참고자료
이선정,「하존 명문 고석 및 전제연구」, 한국중국언어학회,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