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카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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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호 (토론 | 기여)님의 2016년 6월 25일 (토) 17:29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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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카이거 (陈凯歌)

출생 1952년 8월 12일
중국 베이징
학력 베이징영화학원 연출 학사
경력 로카르노영화제 은표범상 <황토지>(1984), 몬트리올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대열병>(1986),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국제비평가협회 대상 <패왕별희>(1992)
직업 영화 감독
주요 작품 <황토지>(1984), <현 위의 인생>(1991), <패왕별희>(1992)

요약

중국의 5세대 영화감독이다. 영화 <황토지>(1984)로 데뷔해 국제영화제에서 조명을 받았다. 현대 중국의 모순과 혼란을 날카롭게 조명한다는 평을 받고 있다.

생애

영화감독인 아버지와 시나리오 작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966년 베이징 4중학교 1학년을 마치자 문화대혁명이 일어나 홍위병이 되었다. 1969년 봄에 윈난성으로 하방되어 벌목과 군인 생활을 하며 낙후된 중국의 현실을 목격했다. 1975년 다시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3년 동안 필름노동자 생활을 하였고, 1978년 베이징영화학교 감독과에 들어가 4년 동안 장쥔자오, 장이머우 등과 함께 배웠다. 1982년 베이징영화촬영소에 배속되었으나 관료적인 분위기가 싫어 2년 뒤 광시영화촬영소로 옮겨갔다. 이곳에서 장이머우(張藝謀)가 촬영하고 자신이 감독한 첫번째 작품 <황토지>(1984)를 만들어 국제영화제에서 찬사를 받으며 중국영화 제5세대의 출현을 알렸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정부의 정책을 비판 했다는 이유로 중국내에 상영금지 처분을 내렸다. 두 번째 작품인 <대열병>(1986)도 몬트리올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하지만 중국 내에서는 대중을 만날 기회는 얻지 못했다. 1988년에는 자신의 자전적 영화인 <아이들의 왕>(1988)으로 깐느 영화제 황금 종려상에 노미네이트 되기도 했다. 1988년 미국 뉴욕대학에서 중국영화를 강의하였는데 톈안먼사건을 맞아 1990년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 중국정부와의 심한 마찰 때문에 외국과 합작영화를 만들며 활동하고 있다.


천카이거의 홍위병 경험 중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천카이거의 아버지는 국민당에 가입한 전적이 있었는데, 홍위병이었던 천카이거는 자신의 아버지를 문책의 구렁텅이로 밀어넘긴 전적이 있다. 천카이거는 그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나는 많은 사람의 시선을 받으며 앞으로 나왔다. 내가 무엇을 지껄였는지 기억이 없다. 그러나 그때 아버지는 내 쪽을 힐끗 보았다. 나는 아버지의 어깨를 손으로 내질렀다. 
어느 정도 힘을 넣었는지 확실치 않으나 그렇게 세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아버지를 밀어 넘겼다. …(중략)… 아버지는 피하려 했으나 도중에 그만 두고 허리를 더욱 깊이
꺾을 뿐이었다. 나를 둘러싸고 있던 것은 쾌감으로 달아오른 불길 같은 시선이었다. …(중략)… 그렇지만 열네 살 나이에도 내가 아버지를 배신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찌 된 일일까. 나는 억지로 눈물을 삼켰다.』


작품 성향

그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미학만을 신봉하던 기존의 감독들과는 달리 작가주의 영화로 중국 영화를 새롭게 해석해 나갔다.

대표작 <황토지>(1984)와 인민해방군 병사들이 나오는 <대열병(大閱兵)>(1985), 교사의 눈을 통해 중국 사회주의 현실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해자왕(孩子王)>(1987)은 16세에 홍위병으로 문화대혁명을 겪었던 경험이 동기가 되어 만든 작품이다. <현 위의 인생 邊走邊唱>(1991)은 돈 외에는 아무것도 믿을 수 없다는 현대 중국인들의 현실을 장님 예술인을 통해 은유적으로 조명한 작품이다. 1993년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패왕별희>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치부를 드러냈다는 이유로 중국에서는 상영이 금지되었다. 1996년에는 상하이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 <풍월>을, 1999년에는 중국 진시황 때의 이야기를 다룬 <시황제암살>을 발표하였다.

즉, 그는 데뷔작부터 차기 작품들까지 일관되게 문화혁명이 가져 온 변화와 사회주의 이념에 대한 의미심장한 상징구조를 변용했다. 그러므로 그의 영화는 중국 사회주의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알레고리로 가득 차 있다. 이러한 그의 영화는 중국정부와는 끊임없는 마찰을 해야만 했다.

천카이거는 5세대 영화감독의 대표격이다. 5세대 영화감독들의 공통된 세대적 경험은 영화에 독특한 주제의식을 형성시켰다. 그들의 영화가 대체로 자신들이 겪었던 역사적 경험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는 리얼리즘적이지만, 그들이 묘사하는 것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적인) 인민의 사상 개조와 교육을 위한 것이 아닌 현실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모순들이었다. 그들의 영화는 한편으로는 사회주의적 현실에 대한 신랄한 고발의 목소리가 드러나고 있기에 풍자적으로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들의 영화는 인간의 이상을 향한 투쟁이 거대한 자연의 힘 앞에 패배하는 것을 그리기 때문에 자주 비극적으로 끝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영화에는 끝까지 한 가닥의 희망이 사라지지 않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지치지 않는 불굴의 정신이 드러난다.

평가

천카이거 감독의 데뷔작 <황토지(1984)>는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은사자상을 수상하며 세계 영화계의 관심을 중국으로 쏠리게 했다는 평을 받는다. 천카이거를 통해, 중국영화는 유럽이 ‘새로운 발견’이라 부르며 중국영화를 발견해 낸 것에 스스로를 대견스러워 할 만큼 인정을 받게 되며, 세계 영화계가 주시하는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세계 영화계 뿐 아니라 국내 영화계도 그를 주시했다. 그 중 천카이거에게 특히 감동한 것은 어린 시절의 지아장커 감독으로 보인다. 지아장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첸카이거가 찍은 <황토지>는 내 고향과 비슷했고, 특별한 느낌이 들었다. 영화를 보며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난다. 내가 왜 그렇게 감동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영화를 보고 난 뒤 결심했다. “영화를
찍을거야, 딴 건 필요없어.” -<지아장커, 중국영화의 미래 중에서>-


이렇듯 천카이거는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만, 부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천카이거가 <패왕별희> 이후로 계속 추락했다는 것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찌감치 장이모가 비난과 찬양의 혼란스러운 대상이었던 것과 달리 첸카이거는 일정하게 믿음의 신봉자들을 거느렸다. 그러나 <패왕별희>로 칸의 황금종려상을 받으면서 첸카이거에 대한 논란이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풍월>은 실족이라 불릴만큼 실망스런 작품이며 5세대 몰락의 신호라는 혹평이 불거졌다. 이후 그의 작품은 비평적 주목을 전혀 받지 못한데다 그나마 국내엔 소개조차 되지 않아, 첸카이거는 어이없게도 과거의 감독으로만 기억됐다.

그동안 첸카이거에게 가해진 비판의 요지는 두 가지였다. 오리엔탈리즘과 형식주의. 첸카이거가 국제영화제용 영화를 만든다는 비판은 귀에 못이 박힐 만큼 지겹게 들려왔다. 그리고 눈으로 직접 확인까지 해왔다. 또한 그의 형식주의는 <풍월>에 이르러 정점에 이르렀었다.

그러나 영화 <투게더>를 통해 다시 비판을 잠재웠다는 평이 있다. <투게더>에서 첸카이거는, 적어도 영화적 텍스트에서만큼은, 오리엔탈리즘과 형식주의를 모두 비켜갔다는 것이다.


참고자료

http://www.hynews.ac.kr/news/articleView.html?idxno=5504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69232&cid=40942&categoryId=34405 http://movie.naver.com/movie/bi/pi/basic.nhn?code=2000 http://www.wk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478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179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