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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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주장 이유

전세계가 민족국가 체제로 재편되었고, 구국을 위해 민족주의 필요하게 되었다. 중국인은 4천여년의 문명을 가졌다는 점에서 서구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중국인은 가족과 종교적 단체만 가지고 있을 뿐, 민족정신이 결여되어 있어 국제사회에서 낮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민족주의를 제창하여 4억인을 결합시키지 않으면 중국은 결국 멸망하여 민족이 멸종될 수 있다.

내용

패도에 의해 성립될 경우에는 국가가 되는 것이고, 왕도인 자연력에 의해 성립될 경우에는 민족이 되는 것이다.
한 민족이 다른민족을 정복하게 되면 피정복민족의 독자적 사상을 배격하게 되는데, 만주족은 한족의 민족사상을 소멸시켰다. 세계주의란 이적과 화하를 구분하지 않는 것이다. 중국인의 대다수가 세계주의만 외치고 민족주의는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만주족에게 정복당했다. 청대 만주족의 통치와 세계주의로 인해 잃어버렸던 민족사상을 되찾아야 한다.
명조의 후예들이 회당을 조직하고, 한족 통치계급이 버린 민족사상을 하층 사회에서 구전으로 선전하는 방식으로 보존해왔다.
중국민족의 인구는 총 4억명인데, 그 중 외래인의 수는 총 1천만명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중국의 4억 인구 대다수가 한족으로 혈통, 언어, 문자, 종교, 습관 등을 같이하는 완전한 민족이다.

대아시아주의

중화인민공화국에서의 민권주의

마오쩌뚱은 1924년 1차 국공합작 이후 신민주주의 이론과 삼민주의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민족주의는 반제국주의로, 민권주의는 무산계급의 인민민주 독재로, 민생주의는 「토지는 경작자에게」라는 내용으로 바뀌어 신민주주의 기본이념으로 그대로 쓰여졌다. 그러나 현실은 전국인민대표는 오로지 공산당원들만 만 투표에 참여하며 일반 인민은 기본적인 참정권조차 없다가 1970년대에 들어와 지방선거에 제한적으로 참정권이 주어졌다.

중화민국에서의 민권주의

대만은 세계에서 가장 긴 계엄령 기록을 세운 나라다. 1949년 부터 1987년 까지 무려 38년 간 전시에 준하는 계엄령 상태였다. 참정권과 집회, 결사, 표현의 자유는 허용되지 않았고 장개석은 1975년 죽을때까지 사실상 대만의 황제였다.[1]

부총통이 남은 잔여 임기를 채운 후에 그의 아들 장경국이 그 뒤를 이어 받았다.

강압적인 무력 통치 사회가 이완될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건 한국과 마찬가지로 최고 지도자의 사망이었고 한국의 5.18과 비슷한 민주화 운동이었던 "메이리따오"사건 등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 속에 1987년 계엄령이 해제된다. 이후 정당활동과 보도,집회의 자유가 부분적이나마 허용되게 되고 1996년 첫 총통 직선제 선거가 열리고 2000년에 두번째 직선 총통선거에서 민진당으로 정권교체가 이뤄지게 된다.

결론적으로 양안 모두 쑨원의 삼민주의를 자신들이 이어받았다고 하지만 중국은 많은 인구, 정치의식이 희박한 절대다수의 농민, 교통문제 등의 이유를 핑계로 인민의 권리를 제한하고 공산당 일당 독재를 실시해오고 있으며 대만 국민당은 반공 등 안보상의 이유를 핑계로 폭압적인 군사독재 정권을 이어오다 국민들의 저항에 의해 90년대 후반에야 비로소 민권 이 보장되는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다.

참조

쑨원지음/김승일(외)옮김『삼민주의』범우사,2000년
펄S.벅/은하랑옮김『청년쑨원』길산,2011년

김승일 옮김『모택동선집1,2』범우사,1991

  1. 장개석이 죽었을때 대만정부는 공식적으로 붕조(崩殂)라고 하였고 장개석 기념관 남북으로 있는 거대한 전각의 기와는 황제만이 쓸수있다는 황색 기와로 도배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