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무
손무(孫武)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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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B.C 545 제(齊)나라 낙안(樂安, 山東省 惠民縣) |
사망 |
B.C 470 |
생존시기 | 춘추시대 |
주요 작품 | 손자병법(孫子兵法) |
개요
중국 춘추시대 군사 전문가. 주요 활동시기는 오(吳)나라 합려(闔廬, B.C 514 ~ B.C 496) 시대부터 그의 아들 부차(夫差, B.C 495 ~ B.C 473)의 재위 전기(前期)에 이르고 있다. 주요한 공헌은 먼저 『손자병법』을 남긴 것이고, 다음으로는 협려를 도와 초를 격파한 것이다.
생애
자는 장경(長卿)이다. 손자(孫子)는 경칭이며, 한국에서는 이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춘추시대 제(齊)나라 낙안(樂安, 山東省) 사람으로 전완(田完)의 후예다. 성장과정에서 제나라 시조인 강상(姜商, 즉 姜太公)의 용병모략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손무는 병법에 큰 관심을 보였고 검술도 잘 했다. 기원전 532년, 제나라에 전(田)·포(鮑)·난(欒)·고(高) '4성의 반란'이 터졌고, 손무의 집안도 이 정치투쟁에 휘말렸다. 이때 손무는 가족을 따라 오(吳)나라로 이주했다. 이후 20년동안 은거하며 춘추시대 2백여 년 동안 계속된 전쟁의 경험과 교훈을 연구하고 그것에 기초하여 『손자병법』 13편을 저술하였다. 그뒤 오대부 오자서의 추천을 받아 "병법으로 오왕 합려(闔閭)를 만났고, 이어 장군에 임명되어 오가 초를 격파하는 전쟁에서 중대한 공을 세웠다." 기원전 496년 합려는 월나라를 공략하던 중에 전사하고 그의 아들 부차가 즉위했다. 손무는 계속하여 부차를 보좌하고 월나라를 굴복시키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나이가 든 후 손무는 관직에서 은퇴하여 여생을 군사학 연구와 저술에 전념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손무, 오왕 합려를 만나다
당시 오나라는 서쪽의 초(楚)나라와 원수지간의 관계에 있어 두 나라 사이에는 전쟁이 그칠 날이 없었다. 초나라가 오나라를 침공하고 실패하면 이듬해는 반대로 오나라가 초나라에 쳐들어갔으며, 이러한 공방은 오랫동안 되풀이되었다. 그러던 중 기원전 514년 오나라에서는 정변으로 왕요가 암살되고 새로운 왕으로 합려가 즉위했다. 먼저 합려는 크게 약화된 군사력을 강화시킬 적임자를 찾던 중 마침 손무가 저술한 《손자병법》을 입수하여 탐독하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합려는 손무를 초빙하여 실력을 테스트하고 기용했다. 이때 손무가 궁녀들을 대상으로 하여 병법의 효험을 시범 보인 일화는 유명하다.
손무는 180명의 궁녀들을 두 부대로 나누어 집합시키고 그 가운데서 왕의 총애를 받는 두 사람을 지휘자로 임명하여 지휘하도록 했다. 명령에 따라 전후좌우로 방향전환 동작을 취하는 시험이었다. 사전에 동작 요령을 충분히 알려주고 복종하지 않을 때는 도끼로 처형한다는 규칙을 충분히 설명했다. 그러나 궁녀들은 폭소를 터뜨리며 명령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손무는 다시 설명하고 명령을 내렸다. 그래도 궁녀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손무는 "명령이 불명확할 때는 장수가 책임을 지지만 반복하여 명확히 설명했는데도 명령이 지켜지지 않는 것은 지휘자의 책임이다"라고 말하고, 형수를 시켜 두 지휘자의 목을 쳤다. 그리고 다른 두 사람을 새 지휘자로 임명하고 명령을 내렸더니 궁녀들은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오자서와 함께 초나라를 정벌하다
손무는 전군에 대한 지휘권을 위임받은 후 엄격한 훈련을 통해 오나라 군대를 4년 만에 막강한 군대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기원전 512년 오나라는 숙적 초나라와의 전쟁을 재개했다. 손무는 단계적 교란작전을 통해 초나라 국력을 피폐시키고 6년 후 정예병 3만 명을 직접 이끌고 기습침공, 적의 수도 70km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집결된 20만 명의 적 병력을 보자, 그 대병력을 분산 격파하기 위하여 다시 200km 후퇴하여 적을 유인하는 계략을 사용했다. 손무 군을 무작정 추격하던 초나라 군대는 결국 함정에 빠지고 여러 지역에서 역습을 받아 큰 타격을 입었다. 오자서와 함께 초나라를 정벌하여 ‘오전오승’한 손무는 이번에는 승세를 몰아 초의 수도 영도를 공격하려 함락시켰다. 그 결과 오왕 합려로 하여금 패자(覇者)가 되게 하였다. 약소국 오나라는 일약 강국으로 등장하고, 초나라로부터의 위협을 제거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 다른 인접국인 제 · 진 · 월나라 등에 대해 위협을 가하기에 이르렀다.
시공을 초월한 병법서 <<손자병법>>
손자병법(孫子兵法)은 최고의 군사 지침서로, 단순한 국지적인 전투의 작전서가 아니라 국가경영의 요지, 승패의 기미와 인사의 성패 등에 이르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손자병법은 손무의 군사 이론서로 손무가 오나라 장군에 임명되기 전에 완성되었다. 문장이 간결하고 생동감 넘치며, 내용은 넓고 깊다.분량은 6천 400백여 자에 지나지 않지만 총 열 세편으로 군사과학 각 분야의 내용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 첫 번째 편은 전쟁을 하기 전 깊이 생각해야 할 원칙과 계획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 두 번째 편은 작전편으로 전쟁에서 車費문제와 동원, 보충 등의 계획에 대하여 논하였고, * 세 번째 편은 모공편으로 싸우지 않고 승리하는 방법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 네 번째 편은 攻守의 태세에 관하여, 다섯 번째 편은 軍勢에 대하여, 여섯 번째 편은 전쟁의 주도성을 파악하는 데 대하여 논하고 있다. * 일곱 번째 편부터 열한 번째 편 軍爭, 九變, 行軍, 地形, 九地들은 모두 실전에서 유리한 상태를 확보하기 위한 전술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 나머지 열두 번째 편은 화공에 대한 논의를 하고있고, 열세 번째 편은 간첩에 관한 문제를 논하며 끝을 맺고 있다.
손자병법의 전체적인 내용상으로 볼 때, 그 특색은 결코 호전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
“ “싸우지 않고도 남의 군사를 굴복시키는 것이 최고의 장군”
”
손자병법의 내용은 실전에서 얻어진 전술의 결과물임은 당연한 것이지만, 그 내용과 전술이 전쟁에만 국한 되는 기술로서 끝나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 인생의 처세 문제 까지도 살펴볼 수 있게 하는 활용도가 높다. 제나라는 관중의 실용주의 노선으로 강력한 국가가 되었고, 이러한 제나라의 실용주의적 분위기는 그대로 손자에게 영향을 끼쳤다. 따라서 손자의 전쟁철학은 기본 노선이 실용주의에 기초를 하고 있다. 손자는 명분보다는 실리를, 상처뿐인 승리보다는 상처 없는 이익을, 원칙보다는 변칙을 더욱 중요시 한다. 손자는 단순히 이기기 위한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 무조건 상대방을 쓰러뜨리려고만 하는 전쟁이 아니며, 명분은 강할 때 지킬 수 있다는 교훈도 주고있다. 승리만을 통해 자신의 자신의 명분을 확립하려는 손자 이전의 전쟁 목적과는 전혀 다른 놀리를 펼치고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큰 존경을 받는 손무와 그의 저서『손자병법』은 중국은 물론 세계 군사사에서 아주 중요한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2천 년 넘게 손자병법은 ‘병경(兵經)’으로 존중되어 오면서 뛰어난 장수를 기르고 전쟁에서 승리를 이끌었을 뿐 아니라 일본과 유럽 등지로 전파되어 세계 군사과학의 발전에 굉장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1970년대 이후로는 더욱 넓게 세계의 주목을 끌었다. 일본과 미국 등지에서는 손자병법이 밝힌 전쟁 지도 원칙을 국가전략과 군사정책 수립 등에 운용하고 있을 뿐 아니라 기업관리에도 활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