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상군
맹상군[孟嘗君]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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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 시대 | 전국시대 |
개요
중국 전국시대 말기의 정치인으로 이른바 ‘전국사공자(戰國四公子)’ 가운데 하나이다. 제(齊)의 왕족으로서 진(秦), 제(齊), 위(魏)의 재상을 역임하였으며, 천하의 인재들을 모아 후하게 대접하여 이름이 높았다. 성은 규(嬀), 씨(氏)는 전(田), 휘(諱)는 문(文)이며, 맹상군은 그의 시호이다.
출생과 성장
맹상군, 즉 전문(田文)의 아버지 전영(田嬰)은 제의 선왕(宣王)의 이복 동생이었다. 전영에게는 40명이나 되는 아이가 있었고, 전문의 어머니는 신분이 낮았다. 게다가 전문이 태어난 날은 5월 5일로 이 날에 태어난 아이는 자라서 부모를 해칠 것이라 여겨졌기에, 전영은 전문을 죽이려 했으나 전문의 어머니는 몰래 전문을 숨겨 키웠다. 전문이 장성한 뒤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불려갔을 때, 전영은 “아아, 어째서 죽이지 않았더란 말인가!”라며 노하는 목소리를 냈다. 이에 전문이 “왜 죽여야 합니까?”라고 따지자, 전영은 “5월 5일에 태어난 아이는 문의 높이만큼 자라면, 부모를 죽일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했고, 전문은 “그럼 그 문을 높이면 되는 것 아닙니까?”라고 대답했다. 이 대답에 전영은 느낀 바가 있어 전문을 아들로 받아들였고, 전문은 전영의 저택에서 살게 되었지만, 예전까지의 경위도 있었기에 홀대 받았다. 어느 날 전문은 전영에게 “현손(玄孫)의 손자는 무엇이라고 합니까?”라고 물었다. 전영이 모르겠다고 대답하자 전문은 “제의 영토는 전혀 늘지 않는데, 우리 집안은 부를 얻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촌수가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는 친척이 많은데 그런 사람들 때문에 재산을 남긴다는 건 이상하지 않습니까?”라고 대답했다. 이에 전영은 식객(食客)을 집으로 불러 전문에게 그 대접을 맡겼다. 식객들 사이에서 전문의 평판은 매우 높아졌고 그것이 제후들에게까지 알려져, 전영은 전문을 후사로 세우기로 한 것이다.
아버지의 뒤를 이은 전문은 뭐든 한 가지라도 재주가 있으면 거부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식객을 받아들여 그 수가 수천에 이르렀다고 한다. 한 번은 전문이 식사하면서 식객들 사이에 칸막이를 쳤는데, 식객 한 사람이 “자신과 손님의 음식에 차이를 두니 숨기는 것이다”라고 말했고, 이를 들은 전문은 그 식객에게 음식은 똑같다고 말했다. 의심한 것을 부끄러워한 손님은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맹상군 관련 고사성어
계명구도(鷄鳴狗盜)
계명구도(鷄鳴狗盜)란 닭의 울음소리를 잘 내는 사람과 개의 흉내를 잘 내는 좀도둑 이라는 뜻으로, 천한 재주를 가진 사람도 때로는 요긴하게 쓸모가 있음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이 사자성어는 맹상군의 일화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유명한데, 그 유래는 이러하다.
전국 각지의 식객들을 대접하던 전문은 날로 그 명성은 높아져, 기원전 299년에 진(秦)의 소양왕(昭襄王)이 전문을 재상으로 영입하고자 했다. 전문은 이에 호응해 진으로 들어갔으나, 어떤 사람이 소양왕에게 “전문이 이 시대의 일류 인재임은 분명합니다만 제의 사람으로 진의 재상이 되어도 제의 이익을 앞세울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돌려보낸다 해도 진의 위협이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고, 소양왕은 이를 받아들여 전문이 머무르던 저택을 포위하여 전문의 목숨이 위태롭게 되었다.
전문은 식객을 시켜 소양왕의 총희인 연희에게 목숨을 구걸했지만, 연희는 전문이 가지고 있던 보물 “호백구(狐白裘)”를 준다면 소양왕에게 구명을 부탁해 보겠다고 했다. 호백구는 여우의 겨드랑이 흰 털만 모아서 만든 옷으로 한 벌에 여우가 1만 마리는 필요할 정도로 희귀한 것이었고, 전문은 이미 진에 들어오면서 소양왕에게 이를 바쳐버린 뒤였던 것이다. 고민하던 중, 전문의 식객 중 한 명인 구도(狗盜, 개처럼 재빠른 도둑)가 나서서 소양왕의 곳간에 들어가 호백구를 훔쳐 왔다. 이를 총희에게 바쳤고, 그 중재에 따라 저택의 포위가 풀려 전문은 일단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소양왕의 마음이 언제 바뀔지 모르는 상황에서 전문은 서둘러 귀국길에 나섰고 한밤중에 국경 함곡관(函谷關)까지 당도했다. 그러나 관문은 밤이라 닫혀 있었고, 아침이 되어 닭이 울 때까지는 열지 않는 것이 규칙이었다. 이미 마음이 바뀐 소양왕은 추격자를 보낸 상태였다. 전문이 다시 곤란해하는 와중에, 식객 가운데 흉내 잘 하는 명인이 나섰다. 그리고 그가 닭의 울음소리를 흉내내자 그에 이끌려 진짜 닭들도 울기 시작했고, 닭 울음소리를 따라 열린 함곡관을 빠져나와 마침내 전문은 진을 탈출할 수 있었다. 소양왕의 추격자는 새벽녘에야 함곡관에 도착했지만, 전문이 밤중에 관문을 통과한 것을 알고 돌아서야 했다.
평소 학자와 무예가 등의 식객들은 전문이 도둑질, 흉내의 재주밖에 없는 같은 사람까지 식객으로 받아들이는 전문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지만, 이때만은 “역시 사람은 쓸모가 있다”라며 전문의 선견지명에 감탄했다.
교토삼굴(狡兎三窟)
교토삼굴(鷄鳴狗盜)은 꾀 많은 토끼가 굴을 세 개나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는 뜻으로, 교묘한 지혜로 위기를 피하거나 재난이 발생하기 전에 미리 준비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 또한 맹상군의 일화에서 비롯되었는데, 그 유래는 이러하다.
제나라에 풍훤(馮諼)이란 사람은 집이 매우 가난해서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맹상군에게 사람을 보내어 식객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청했고 맹상군은 두말없이 그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다른 식객들은 아무 재주도 없는 사람이라고 얕보며 잡곡밥에 푸성귀만 주면서 음식 대접을 소홀히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풍훤은 대청 기둥에 기대어 앉아 검을 박자에 맞춰 두드리면서 노래를 불렀다.
“장검아, 장검아, 이제는 돌아가자. 물고기도 먹을 수 없으니 돌아가지 않고 뭐하겠느냐.”
그것을 본 맹상군은 아랫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에게도 물고기를 대접하게. 다른 식객들처럼 잘 대접해 주게.”
그러던 어느 날, 밖에 나갔다가 돌아온 풍훤은 또 기둥에 기대어 앉아 노래를 불렀다. “장검아, 장검아, 돌아가자. 밖에 나가는데 수레가 없으니 돌아가지 않고 뭐하겠느냐.”
그 말을 들은 맹상군은 아랫사람들에게 말했다. “풍원도 다른 식객들과 똑같이 대우해 주게. 그가 밖으로 나갈 때 수레를 내주게.”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풍훤은 또 노래를 불렀다. “장검아, 장검아, 돌아가자. 여기서는 노인을 봉양할 수 없으니 돌아가지 않고 뭐하겠느냐.”
그 노래를 들은 맹상군은 아랫사람들에게 분부해 그의 어머니에게 매일 세 끼의 음식을 보내게 했다. 그 다음부터는 풍훤의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맹상군은 풍훤에게 설읍(薛邑)에 가서 빚을 받아오라고 했다. 떠날 때 풍훤이 물었다. “빚을 다 받으면 무엇을 사올까요?”
“우리 집에 무엇이 부족한가를 보고, 부족한 것을 사오게.”
설읍에 도착한 풍훤은 빚을 진 사람들을 모두 불러모아서 채무를 하나하나 대조해 보게 했다. 그러고는 맹상군이 빚을 탕감해 주기로 했다며 선포하고는, 빚 문서들을 사람들이 보는 데서 불태워버렸다. 백성들이 맹상군에게 감사해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이튿날 풍훤은 도성으로 돌아왔다. 맹상군은 빨리 돌아온 것을 보고 매우 놀라워하며 이렇게 물었다.
“빚은 다 받아왔는가?”
“예, 다 받았습니다.”
“그럼 무엇을 사왔는가?”
“분부대로 공자님의 댁에 없는 것을 사왔습니다. 소인이 보건대 공자님의 댁에는 다른 것은 다 있는데 오직 ‘의(義)’가 부족한 것 같아서 ‘의’를 사가지고 돌아왔습니다.”
맹상군이 어리둥절해하자 풍훤이 말을 보탰다. “소인은 공자님의 허락도 없이 사사로이 공자님의 결정이라고 꾸며, 그들의 빚을 모두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빚 문서도 전부 다 태워버렸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하나같이 공자님의 은덕을 잊지 않겠다고 소리쳤습니다. 이렇게 소인은 공자님에게 ‘의’를 사왔습니다.”
맹상군은 속으로는 몹시 언짢게 생각했지만 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1년 후에 제나라 민왕(泯王)이 맹상군의 직위를 파면시키자, 그는 어쩔 수 없이 봉읍지인 설읍으로 내려가야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설읍의 백성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1백 리 밖까지 나와서 그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 광경을 본 맹상군은 크게 감동했으며 풍훤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오늘에야 비로소 자네가 사왔다는 ‘의’를 이 눈으로 보게 되었네.”
그러자 풍훤은 이렇게 대답했다. “꾀 있는 토끼들은 굴을 세 개씩 파놓는다고 합니다. 그래야 생명을 보존할 수 있지요. 지금 이 설읍은 굴 하나에 불과합니다. 이 굴 하나로는 안심할 수 없습니다. 소인이 굴 두 개를 더 파놓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물론 맹상군은 찬성했다. 풍훤은 양(梁)나라로 가서 혜왕(慧王)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제나라 대신 맹상군은 임금에게 쫓겨나 국외에 있습니다. 맹상군은 재능 있고 덕이 높은 분입니다. 그를 등용하는 나라는 반드시 강성해질 것입니다.”
혜왕은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맹상군을 재상으로 삼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사신더러 수레 1백 대와 황금 1천 근을 갖고 설읍으로 가서 맹상군을 데리고 오도록 했다. 그 소식을 들은 민왕은 무척 놀랐으며, 자신의 경솔함을 후회했다. 그는 즉시 태자의 스승에게 황금 1천 근과 화려하게 장식한 수레, 자신의 보검, 잘못을 사과하는 문서를 가지고 설읍으로 가서 맹상군을 데리고 오도록 했다. 맹상군은 재상 일을 보겠다고 하면서, 풍훤의 조언을 따라 선조 때부터 내려오는 제사 기물들을 설읍에도 얼마간 나눠주어 종묘를 세우게 해 달라고 했다. 민왕은 그 요구를 즉시 들어주었다. 이리하여 맹상군은 수십 년 동안 아무런 위협이나 화액을 당하지 않고 순조롭게 제나라 재상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