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신군
춘신군 (春申君)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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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황헐 (黃歇) |
출생 |
기원전314년 |
사망 |
기원전238년 |
생존시기 | 전국시대 |
춘신군(春申君)은 전국시대 후기 초楚나라 인물로 이름은 헐(歇), 성은 황(黃)이며 제齊나라의 맹상군(孟嘗君), 조趙 나라의 평원군(平原君), 위魏나라의 신릉군(信陵君)과 함께 전국사군(戰國四君) 가운데 한 사람이다.
개요
춘신군春申君, 그는 누구인가
춘신군(春申君)은 여러 나라를 유학하며 보고 들은 바가 넓어 박학하고, 대담한 성격과 함께 변설에도 능했다. 진秦나라의 소왕이 초나라를 공격하려 하자 황헐(黃歇)은 소왕(昭王)을 달래 진군을 멈추게 하였으며, 초나라 태자(고열왕)와 함께 진나라의 볼모로 들어갔다. 초나라 왕의 건강악화에도 불구하고, 진나라 소왕이 태자를 돌려보내지 않으려하자 황헐은 목숨을 내놓고 태자를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태자가 즉위하자 그는 춘신군으로 봉해졌고 그가 재상으로 있는 동안 초나라는 예전의 강성함을 되찾았다. 하지만 말년에 권신 이원(李園)에게 일복이 몰살당하는 화를 당하고 말았다.
주요 사건
변설에 능한 황헐, 초나라를 구하다
진秦나라 소왕(昭王)은 장군 백기(白起)를 내세워 한漢나라와 위魏나라를 회양에서 격파하고, 진나라를 섬기도록 하였다. 그 후 소왕은 한나라‧위나라와 연합하여 초나라를 치게 하고는 군사를 일으키려 했다. 마침 황헐이 조趙나라 사신으로 가던 중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진나라는 이미 백기를 보내 초나라에 진군하였다. 과거 초나라 회왕이 진나라의 꼬임에 빠져 억류당해 결국에는 진나라에서 객사한 전적이 있고, 더불어 경양왕은 회왕의 아들인 까닭에 진나라가 그를 업신여기는 것은 당연했다. 황헐은 진나라가 군사를 일으키기만 하면 초나라를 쳐부술 것으로 여겨 두려워했고, 직접 글을 올려 진나라 소왕을 회유했다.
“ ‘천하에 진나라와 초나라보다 강한 나라는 없습니다. 신이 듣자니 폐하께서는 초나라를 치려고 하신다는데, 이는 호랑이 두 마리가 싸우는 것과 같습니다. 그에는 힘없는 개가 이득을 취할 것이니 차라리 친선을 도모하는 것이 낫습니다.…폐하께서 사람들이 많고 병력이 강한 것만을 믿고 위나라를 격파한 위세를 몰아 힘으로써 제후들을 신하로 삼으려고 한다면 후환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멀리 있는 초나라는 진나라 편이고, 가까이 있는 한나라와 위나라는 진나라의 적입니다.… 실상은 진나라를 속이려는 것이 아닐까 신은 염려됩니다. 이는 폐하께서 한나라와 위나라에 덕을 베푼 일이 없이 대대로 원한만을 사왔기 때문입니다. 한나라와 위나라가 멸망하지 않는 것은 진나라에게는 근심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폐하께서는 그들의 힘을 빌려 초나라를 치려고 하시 니, 어찌 실책이 아니겠습니까?’
”
“과연 옳은 말이군.” 진나라 소왕이 말했다. 따라서 소왕은 백기의 출병을 중지시켰으며 초나라는 황헐과 태자 완(完)을 진나라의 볼모로 들여보냈다. 태자 완과 황헐이 진나라에 볼모로 있는 동안 초나라의 경양왕이 병석에 눕게 되었다. 경양왕의 건강 악화에도 불구하고 초나라에 돌아가지 못하는 태자를 대신해 황헐은 태자의 귀국을 설득하였다. 논리는 이러하다.
“ "태자가 귀국하여 왕위에 오르게 되면 진나라를 진심으로 섬기게 될 것이고, 재상의 은덕 또한 잊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동맹국과 가까워지고 만승의 나라에 덕을 베푸는 일입니다. 그러나 만약 돌려보내지 않는다면 태자는 함양의 한 평민에 불과할 것이며, 초나라가 새 태자를 옹립하게 되면 틀림없이 진나라를 섬기지 않을 것입니다. 무릇 동맹국을 잃고 만승의 나라와 화친을 끊는 것은 결코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
이에 소왕은 태자를 돌려보냈다. 태자가 돌아가자 황헐은 죽겠다며 목숨을 내놓았지만, 태자가 즉위하면 황헐이 등용될 것은 명백하기에 초나라로 그를 돌려보내 화친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황헐은 초나라로 돌아가 춘신군(春申君)으로 봉해졌다.
배신을 당한 춘신군 春申君
춘신군이 초나라의 재상으로 머문 지 수년 후, 초나라는 예전의 강성함을 다시 되찾았다. 진나라에서는 장양왕이 즉위했고, 친선 정도는 예전 같지 않았다. 천하의 제후들은 진나라의 계속된 침략을 우려해 서로 힘을 합하여 서쪽의 진나라를 치기로 했다. 초나라 왕이 수장이 되고 춘신군이 그 일을 담당했다. 하지만 함곡관에 이르러서 진나라 군에 크게 패하고 말았다. 초나라 고열왕은 그 책임을 춘신군에게 돌렸고, 이를 계기로 춘신군과 왕은 사이가 벌어졌다.
초나라 고열왕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춘신군은 후대를 걱정하여 아이를 낳을 만한 부인을 여럿 구하였으나 끝내 아들을 보지 못했다. 그 무렵 조나라의 이원(李園)이란 자가 자신의 여동생을 초나라 왕에게 바치려고 했다. 그러나 춘신군은 이원의 누이동생(姜后)을 보고 그녀를 총애했다. 누이는 춘신군의 아이를 갖게 되었고, 이에 이원은 모의를 꾀했다. 아들이 없는 고열왕이 죽고 나면 그 뒤를 잇는 것은 고열왕의 형제나 가까운 친인척일 것이며, 춘신군은 세력을 잃고 말 것이다. 따라서 이원의 누이는 고열왕에 바쳐지기를 원했고, 입궁하게 되어 왕후가 되었다. 후에 아들을 낳았으며 그 아이는 태자가 되었다. (후대의 유왕幽王)
춘신군의 빈객 중 관진 출신의 주영(朱英)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춘신군에게 이원을 경계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이원은 춘신군 때문에 자신이 권력을 잡지 못한다고 여겨 춘신군을 원수로 보고 결사대를 길러왔고, 초나라 왕이 죽고나면 틀림없이 궁에 들어가 권력을 장악할 것이라고 주영은 말했다. 또한 태자의 출생에 대한 비밀의 누설을 완전히 차단하기 위해 그를 죽일 것을 염려했다. 하지만 춘신군은 이원이 자신을 잘 대해줄 뿐만 아니라 그럴 만한 성격이 아니라며 주영의 충고를 가볍게 넘겼다. 하지만 고열왕이 죽자 이원이 먼저 궁으로 들어갔으며, 결사대를 매복시켜 춘신군을 죽인 후 그의 머리를 극문 밖으로 내던지기까지 했다. 이어 춘신군 일가를 모조리 죽였다.
평가
• 태사공 (太史公) : '처음에 춘신군이 진나라 소왕을 설득한 것이나 자신의 몸을 던져 초나라 태자를 귀국시킨 일은 참으로 밝은 행동이라 이를 만하다. 후에 이원에게 잡혀 죽게 된 것은 늙어 무능해진 탓이리라. 속담에 “끊어야 할 때 끊지 않으면 오히려 그로 인해 화를 당한다.”는 말이 있다. 이는 춘신군이 주영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겠는가.'
출처
• 사마천,『사기열전』,연변대학 고전연구소 역,서해문집(2006)
• 바이두백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