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희지
왕희지(王羲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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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자가 일소(逸少) 호가 담재(澹齋)이다. 왕희지가 우군(右君)장군과 회계내사(會稽內史)를 지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왕우군이라 부르기도 했는데, 『세설신어(世說新語)』에 그와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종요(鍾繇)에게서 해서를 배우고, 장지(張芝)에게서 초서를 배웠으며, 이 외에도 이사와 채옹 등을 좇아 학문을 갈고 닦아 학식을 풍부히 하였다. 왕희지의 글씨는 조용하면서 아름다운 느낌을 주고 예서의 필법과는 전혀 달라 아름다우면서도 유창한 금체(今體)서풍을 창조하여 사람들은 그를 '서성(書聖)이라고 부르며 존경하였다. 왕희지의 서법은 후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일곱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중 왕헌지(王獻之)가 가장 유명하여 사람들은 왕희지와 왕헌지를 합쳐 '이왕(二王)'이라고 불렀다.
주요 작품
왕희지 글씨의 주요 성과는 행서와 초서로, 세상에 전해지는 작품이 가장 많은데, 예를 들면 『난정서(蘭亭序)』,『이모첩(姨母帖)』,『평안삼첩(平安三帖)』,『십칠첩(十七帖)』,『악의론(樂毅論)』,『쾌설시청첩(快雪時晴帖)』,『초월첩(初月帖)』,『행양첩(行穰帖)』등과 같은 것들이 있다. 그중 『난정서』는 후세에 영향이 가장 큰 것으로 '천하제일의 행서'라고 불린다. 『난정서』의 원본은 이미 사라지고 지금은 그 모방본이 전해지는데, 풍승소(馮承素)의 '신룡본(神龍本)'이 가장 유명하다.
참고문헌
- 금문 저, 박흥수역 『漢字地圖』 (2009,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