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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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산(子產). 공손교(公孫僑)
춘추시대 말기에 활약한 당대 최고의 현신(賢臣)인 정(鄭)나라 재상 자산은 정목공(鄭穆公)의 후손인 자국(子國)의 아들이다. 자산이 활약할 때 제(齊)나라의 안영(晏嬰), 진(晋)나라의 숙향(叔向), 오(吳)나라의 계찰(季札) 등이 동시에 등장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를 소위 ‘현상시대’라고 부른다.
당시 정나라의 상황
춘추시대는 흔히 말하는 ‘중원’지역을 중심에 두고 동서의 축과 남북의 축이 서로 교차하면서 강대국 간의 끊임없는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된 시기였다.
하지만 춘추의 세계가 강대국 사이의 패권 쟁탈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진(晉), 초(楚) 등의 강대국들이 중원을 놓고 경합할 때 정나라뿐만 아니라 노, 진(陳), 채, 송, 위 등의 약소국들은 두 강대국의 눈치를 보며 국가의 안위와 존망을 염두에 두고 생존 방법을 모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특히 춘추 중기부터 북방의 진(晉)과 남방의 초(楚)가 패권을 다툴 때 중원의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던 정나라는 아침과 저녁마다 섬기는 나라가 바뀔 정도로 위태로웠으며 정나라의 처신에 따라 발생한 전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국가는 피폐해지고 백성들의 삶은 고단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다음은 『좌전』 ‘양공 9년’에 나오는 말로써 자사(子駟)가 정나라의 백성들을 대신하여 하소연하고 있는 내용이다.
"하늘이 정나라에 화를 내려 두 강대국의 사이에 끼여 있게 하였는데 , 大國 이 德을 베풀어주지는 않고 兵亂으로써 우리에게 항복을 강요하여 귀신이 된 우리의 조상님들에게 제사를 흠향하지 못하게 하며
, 백성들에게는 토지에서 생기는 이로움을 누리지 못하게 하며, 부부들이 힘들고 녹초가 되어도 하소연할 곳이 없으니.……"
-左傳 , 「襄公」, 9 年
이 내용대로라면 정나라는 두 강대국 사이에 끼여 제사도 지내지 못할 정도로 피폐한 상황에 처해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음은 자피(子皮)가 자산에게 정권을 물려주려고 하자 자산이 그것을 사양하는 내용이 담긴 글이다.
"나라는 작은데 대국에 핍박받고 있으며 公族은 강대하고 총애 받는 자들이 많으니 나라를 다스릴 수 없습니다."
-左傳 , 「襄公」, 9 年
이처럼 어려운 국내외 상황에서는 자신이 집정 되더라도 제대로 된 정치를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집정의 자리를 사양하고 있는 자산 모습으로 보아 자산은 당시 정나라의 실상을 제대로 인지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자피의 설득으로 자산은 결국 집정하게 되었고 국내의 정치적 개혁을 완수하고 국제무대에서 누구도 정나라를 얕보거나 희생양으로 삼을 수 없도록 작지만 강한 나라를 만들어 갔다.
자산의 개혁 목표
자산이 추구하였던 약소국 정나라의 전략적인 목표는 강대국이 되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자산은 정나라를 강소국(强訴國)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 즉, 국가의 생존을 기본 전제로 하여 제1목표는 강대국의 침략을 받지 않는 것이었고, 제2목표는 강대국의 착취를 최대한 줄이는 것이었다. 공물은 최대한 적게 내고, 최대한 적게 동원되어야 했다. 그러면서 공물과 동원의 대가로 무엇을 얻을지 계속 고민하여야 했다. 그리고 최종 목표는 기존의 진나라와 초나라가 양분하고 있던 거대한 구조에 파열을 내는 것이었다.
자산의 국내외 주요 정책
정치와 도덕의 분리
자산의 리더십이 보여준 가장 큰 의미 중 하나는 정치와 도덕을 분리한 데 있다. 자산이 정치를 도덕에서 분리한 대표적인 사례로 ‘형정(刑鼎)’의 주조를 들 수 있다. 『춘추좌전』에 따르면 이는 기원전 536년 3월에 빚어진 일이다. 그는 사상 처음으로 형벌조항을 백성에게 공개적으로 선포하였으며, 형정은 중국 최초의 성문법에 해당한다. 당시 그는 ‘형정’의 규정에 따라 엄격히 법을 시행하며 패도를 관철한 셈이다. 자산이 집정한 지 1년이 되자 백성들은 다음의 노래를 지어 그를 강하게 비판하였다.
내 의관을 빼앗아 가더니 처박아두고
우리 밭이랑을 빼았더니 오(伍)를 짜라고 하네
누가 자산을 죽이려 한다면 내가 그와 함께 하겠네
‘의관’이란 사치를 금지한 것을 말한다. 이로 인해 세족들은 사치품을 감추는 소동이 일어났고, ‘논밭’을 운운한 것은 대대적인 토지구획 정리와 세재의 개편을 의미하는데 이는 재정확충의 시도를 말한다. 고금을 막론하고 무력과 법치에 기초한 패도는 강압적인 데다가 각박하기 때문에 인기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노래의 내용에 ‘자산을 죽이면’이라는 구절을 보았을 때 당시 자산의 부국강병책이 매우 혹독하게 진행됐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효과는 매우 컸고 3년 후 정나라 백성들은 다음과 같은 노래를 지어 자산의 업적을 칭송하였다.
내게 자제가 있어 자산이 일깨워주고
내게 밭이랑이 있어 자산이 늘려주었네
자산이 죽으면 누가 그를 이으려나
이는 자산의 교육정책과 경제정책이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었음을 암시하는 구절이다. 자산이 패망위기의 정나라를 강소국으로 탈바꿈시킨 것은 아마도 당시의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패도에 근거한 강력한 부국강병책의 실시 덕분이다.
이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형정의 주조와 구부제(九賦制)의 실시, 봉혁(封洫)이다. 구부제는 농민들을 병사로 동원한 제도로 갑사(甲士)의 신분제한을 철폐했다는 점에서 매우 획기적인 조치로 평가되고 있다.
봉혁은 일종의 경지정비이다. 이는 이전의 전혁(田洫)을 계승한 것으로 농민을 5호(五호) 단위의 ‘오(伍)’로 편성한 조치를 말한다. 따라서 자산은 생산력의 향상과 군제 개편을 동시에 꾀했고 그 결과 식량증산에 커다란 공을 세웠다.
개방적인 언론 정책
자산은 언로 개방의 중요성을 통찰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제나라는 관중이 집정할 때 따로 ‘간의대부’을 둔 바 있었으나 자산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자산은 이미 언로를 활짝 개방해놓았기 때문이었다.
기원전 542년 겨울에 정나라 백성들이 향교(鄕校)에 모여 집정대부 자산이 취한 일련의 변법조치를 놓고 득실을 논하였다. 당시 정나라 사람들은 향교에 모여 정치를 평하였는데, 사람들의 입에 가장 오르내리는 사람은 당연히 자산이었다. 집정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자 대부 연명(然明)이 자산에게 향교의 폐지를 건의하였다.
다음은 자산과 연명의 대화의 일부분이다.
연명 : “향교를 헐어 버리면 어떻겠습니까?” 자산 : “사람들이 정사가 잘되었는지를 논하면 그들이 좋아하는 것은 실행하고 싫어하는 것은 개혁하면 되는 것이오. 그들의 논평이 곧 나의 스승인 셈인데 어찌 향교를 헐어 버린단 말이오? 나는 ‘선한 일에 충실하여 원망을 막는다’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소. 어찌 위세로 그들의 논평을 막을 수 있겠소. 이는 개울물의 흐름을 막는 것과 같소. 방죽을 크게 터서 한꺼번에 흐르게 하면 많은 사람이 상하게 되오. 그리되면 사람들을 구할 길이 없소. 방죽을 조금 터놓아 물을 서서히 흘려보내는 것만 못하오. 향교를 허무는 것은 내가 그들의 비판을 받아들여 약으로 삼는 것만 못하오.”
공자(孔子)는 이 말을 듣고 이같이 칭송하였다.
“나는 장차 어떤 사람이 자산을 두고 어질지 못하다고 말할지라도 절대 믿지 않을 것이다!”
자산은 여론의 향배를 정확히 헤아리기 위해 양측의 견해를 고루 경청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일찍이 깨닫고 언론의 이런 힘과 기능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산에 대한 공자의 평가
공자는 자산을 사표(師表)하였으며, 그를 존경하고 흠모하는 마음이 『논어』 곳곳에 나타나 있다. 먼저 공야장 편의 대목을 살펴보자.
子謂子産: "有君子之道四焉: 其行己也恭, 其事上也敬, 其養民也惠, 其使民也義." -『논어』「공야」 “자산에게는 군자의 도가 네 가지 있었다. 몸소 행하면서 공손했고, 윗사람을 섬기면서 공경스러웠으며, 백성을 양육하면서 은혜로웠고, 백성을 부리면서 의로웠다.”
공자는 자산이야말로 ‘신도’의 모든 덕목을 갖추었다고 칭송한 것이다.
또한 「헌문」편에 이를 뒷받침하는 공자의 평이 나온다.
子曰: "爲命, 裨諶草創之, 世叔討論之, 行人子羽修飾之, 東里子産潤色之." -『논어』「헌문」
비심과 유길 및 자우는 모두 자산이 천거한 사람들인데 공자는 인재를 고루 등용하여 나라를 다스린 자산을 칭송한 것이다.
또한 「헌문」편에는 자산을 관중과 비교한 내용이 실려있다.
或問子産, 子曰: "惠人也." 問子西, 曰: "彼哉! 彼哉!" 問管仲, 曰: "人也. 奪伯氏騈邑三百, 飯疏食, 沒齒無怨言." -『논어』「헌문」 어떤이가 자산을 여쭙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은혜로운 사람이다." 자서를 여쭙자, "저 쪽, 저 사람이지"라고 말씀하셨다. 관중을 여쭙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백씨의 병읍 삼백가를 빼앗았는데, 거친 밥을 먹고, 치아가 다 빠져도 원망하는 말이 없었다.
공자는 자산을 혜인(惠人), 즉 은혜로운 사람이라고 칭하였다. 공자가 자산을 ‘혜인’으로 평가한 데 이어 관중의 ‘탈취’를 언급한 것은 자산의 검박한 삶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이는 평소 공자가 자산을 크게 사숙했음을 뒷받침하는 대목이다. 공자는 관중의 패업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개인적인 덕행 면에서는 ‘비례’를 저질렀다며 ‘그릇이 작다’ 라고 혹평했다. 그러나 관중에게 ‘일포일폄’의 평을 내리면서 자산에 대해서는 칭송 일변도의 평을 내렸는데 이는 공자가 자산을 ‘신도’의 모델로 삼았음을 방증한다고 할 수 있다.
결론
자산은 관중처럼 ‘존왕양이(尊王攘夷)’의 대업을 이루지는 못하였으나 약소국의 재상으로써 ‘치국안민(治國安民)’ 차원에서는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정나라는 진나라와 초나라 사이에 끼어 늘 시달림을 받았으나 그가 재상으로 취임한 이후부터는 자주적인 행보를 보였고 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참고문헌
공원국, 『춘추전국이야기 - 약소국의 생존 전략』, 고양: 위즈덤하우스, 2017
신동준, 『臣의 한수 - 위기의 순간, 나라를 살린』, 북클래스, 2011,
박인수, 『춘추 전국의 패자와 책사들』, 석필, 2001
車鎭萬. 『春秋左氏傳』에 보이는 鄭子産의 외교정치에 관한 고찰, 東洋古典硏究, p239-272,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