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표준토론
78년 초에 이뤄졌던 토론. <광명일보>에 「실천이 진리 검증의 유일한 표준이다」라는 글이 실리며 토론이 촉발되었다. 처음에 이 글은 특정 세력을 도발할 의도가 없었지만, 마오쩌둥에게 임명받은 화궈펑 세력은 마오의 권위를 절대화하려 했는데 이 글을 자신들 권력의 합법성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고, 이에 토론으로 격화되었다. 토론 진영은 범시파, 실천파로 나뉘었다. 범시파는 마오가 생전에 행한 결정과 지시들이 옳은 것이라 보았고, 실천파는 마오의 권위보다 직접적인 실천을 통해 진리 여부를 검증해야 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그 둘의 진영이 어떤 사람들로 구성되었냐 하는 진영의 대립 구조가 직접적인 토론의 양상보다 더욱 주목할 만하다. 실질적인 토론의 양상보다, 한쪽 진영에는 문혁을 거치며 핵심 지위를 차지하게 된 세력과 다른 한쪽 진영에는 문혁 때 갖은 우여곡절을 거치며 겨우 살아남은 세력이 자리잡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 사건을 거치며 문혁에 대한 평가가 중국 공산당 내부에서 본격화되었다. 실제로 이후의 중요한 정치적 사건들은 모두 문혁에 대한 평가와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되어있다. 진리표준토론은 78년 11기 3중전회를 통해 공식적인 사상 해방으로 인정받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