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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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수영 (토론 | 기여)님의 2018년 12월 21일 (금) 12:17 판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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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전

출생 1814년 1월 1일
광동성(廣東省[广东省]) 화셴(花縣)
사망 1964년 6월 1일
생존시기 태평천국 시기
관련 활동 정치


개요

중국 태평천국의 창시자이자 태평천국 건국 이후 청조 타도, 반만주의를 외치며 태평천국 운동,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킨 주도자였다. 그는 “하늘이 사명을 주었다”고 주장하며 기독교를 나름대로 해석하여 이를 바탕으로 한 배상제회를 창립한 인물이다.

생애

출생과 성장배경

1814년 광동성에서 중농(中農)의 3남으로 1814년 1월 1일에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객가출신-원래는 황하 북부에 거주하였으나, 푸젠성, 광시장족자치구, 장시성 등지의 산간지역으로 이주하여 고향을 떠나 생활하는 외래이주자들을 부르는 명칭이다-으로 출세를 위해서는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아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홍수전도 어린시절부터 서당에서 과거시험을 준비하여 유교 교육을 받았다. 24세 때 광저우에서 세번째까지 연이어 낙방한 뒤 민족주의 중국 지배에 대해서 울분을 터뜨리게 되었다. 그리고 과거를 보지 않고 스스로 인재를 뽑겠다는 결심을 하게 하고, 여호와의 정의로운 분노를 강조한 기독교 책자들을 읽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귀향하여 분노로 열병을 앓으며 환몽을 자주 꾸게 된다.

배상제회 설립

과거에 번번이 떨어진 홍수전은 이전엔 관심이 없었던 기독교 서적《권세양언(勸世良言)》을 읽고, 깊이 매료되었다. 그래서 환몽 속에서 체험한 것을 책의 내용에 맞추어 해석하였다. 1840~50년대 홍콩에서 선교활동을 했던 선교사 테오도르 햄버그는 홍수전 전기를 쓰면서 1837년 즈음 홍수전이 겪었던 환몽 경험을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홍수전은 꿈 속에서 금발의 노인을 만났다. 노인은 홍수전에게 “용기를 내어라, 맡은 일을 다하여라, 어떤 곤란한 경우에도 나는 너를 도와줄 것이다”라고 말했다. 홍수전은 또 때때로 중년의 사내를 만나 그와 힘을 합쳐 악령을 물리치기도 하였는데, 홍수전은 그를 장형이라고 불렀다. 홍수전은 노인을‘상제(上帝)’로, 장형을 예수 그리스도로, 악마들은 책에서 비판하고 있는 유교 불교 도교와 민간신앙이라고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홍수전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동생이라는 결론에 가 닿아 자신이 인간을 구원할 사명감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여겼다.
결국 그는 과거시험을 포기하고 배상제회(拜上帝會)라는 종교결사를 창립하여 포교활동에 나섰다. 하나님인 상제를 믿으면 살아서 행복하고 죽어서 천국으로 갈 것이라고 말이다.

태평천국 선언

단순히 종교적 색채를 띠던 배상제회는 점점 정치적이고 혁명적으로 변해갔다. 1850년 광서성은 아편 밀수업자와 영국 해군 등이 활개를 치고 다니는 바람에 무질서한 상황이었다. 무질서의 증가는 단련과 도적집단에게 자위를 위한 훈련을 하였고, 이는 배상제회의 소모임도 마찬가지였다. 청나라를 멸망시키고 싶었던 홍수전은 정치와 사회, 문화 등에 관심을 가졌고 1850년 말에 2만 명의 신도들이 홍수전의 부름에 동원되어 그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파견된 청조 군대와 전투를 벌였다. 그리고 1851년 1월 11일, 38세의 생일을 맞은 홍수전은 배상제회의 탄생지였던 광서성 금전촌에서 자신이 새로운 왕조인 태평천국의 천왕임을 선언했다.

건국 이후의 행보 : 태평천국운동

홍수전은 배상제회 활동 초창기부터 함께 해 온 5명의 사람들과 의형제를 맺고 그들을 '노형제'라 불렀다. 태평천국 건국 후 홍수전은 이들을 각각의 왕으로 임명했는데, 동왕은 양수청, 서왕은 소조귀, 남왕은 풍운산, 북왕은 위정휘, 익(翼)왕은 석달개로. 태평천국의 신도들은 '만주족을 멸하고 한족을 부흥시키자'는 멸망흥한의 슬로건을 내세워 청조 타도를 외쳤다. 목적을 위해 출정한 태평천국군은 1851년에 무한, 53년에는 중국 남부 최대 요충지였던 남경을 함락시킨 뒤 천경이라 이름을 바꾸고 남경을 수도로 삼았다. 중국의 절반을 차지하게 된 그들은 근대적이고 진취적인 개혁을 주장하며 대외적으로는 청조와의 대립했다.

태평천국의 몰락

태평천국은 비도덕적이라고 생각하는 도박, 아편, 담배, 우상숭배, 전족 등과 같은 것들을 반대하고, 신분제도 폐지했다. 궁정을 운영하던 여성들에게 특별한 활동 범위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누구나 평등한 세상을 만들자'고 외쳤던 태평천국의 개혁운동은 겉으로는 그럴 듯 해 보였지만 실행력이 부족하고 끊임없는 모순에 시달려 대한 태평천국 정부에 대한 민심은 돌아서기 시작했다. 게다가 1856년 태평천국 내에서 노형제끼리 내전이 일어나며 군사적, 재산적 손실이 막대했다. 이러한 시기 태평천국군에 대항한 사람은 신사층 증국번이홍장 등이었다. 증국번은 호남 출신의 정통 한족으로 유교적 질서 전반에 대한 태평천국의 폭력적인 공격성을 비판했다. 증국번의 제자였던 이홍장은 안휘성에서 회군을 이끌고, 상하이에서는 증국번이 상군을 데리고 태평천국군을 압박했다. 태평천국군 진압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지만, 결국 태평천국의 수도였던 남경은 함락당했다. 홍수전은 1864년 남경이 함락되기 한 달 전에 사망하였다. 일각에서는 홍수전이 자살했다는 설도 있다. 1864년까지의 태평천국 14년 동안 인명과 재산의 피해는 기하급수적이었고, 그 세력들은 농촌을 장악하지 못하고 한족 신사층을 적대시하여 결국 태평천국은 1860년대 청조의 중흥 시기에 진압되고 만다. 서태후의 섭정 아래 있었던 북경의 새 지도층은 태평천국군 진압이라는 임무를 성공시켜 왕조에 새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었다.

평가

태평천국 혁명을 연구한 고지마 신지는 홍수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광기와 종이 한 장 차이 혹은 오히려 광기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정력적인 신념과 이에 기초한 유토피아에 대한 꿈은 초기에 큰 힘을 발휘했다. 그러나 그것이 유효한 건설의 에너지가 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의 신앙과 유토피아는 너무나 주관적이고 현실과의 합리적인 통로를 갖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신화가 하나의 권력으로 바뀌었을 때, 이 권력은 매우 비능률적이고 억압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이 신앙에 고집하고 있는 한 태평천국 운동의 패배는 피하기 어려운 필연이었다.”

비록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지만 홍수전은 무능하고 책임감 없는 청조 정부의 지배를 견디지 못한 농민들과 노동자, 객가들을 한 단체로 규합하여 청조 정부를 위협할 정도의 세력을 키울 수 있도록 그 발판을 만들어주었다. 최초로 만주족에 저항한 대규모 반만 봉기였기에 후대 사람들은 홍수전을 재조명하기도 한다.

참고자료

「홍수전과 최제우 사상 비교 연구」, Zhao, Bing, 서울大學校 國際大學院,[2005] [국내석사]
[네이버 지식백과] 홍수전[洪秀全] (인물세계사)
신중국사, 존 킹 페어뱅크,중국사연구회 번역
신중국사(수정증보판), 존 킹 페어뱅크, 멀골드만, 역자 : 김형종, 신성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