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불위
여불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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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 ??(한나라 사람임) |
사망 |
?? 진시황 10년 권력에서 물러난 뒤, 자살한 것으로 기록됨. |
생존시기 | 전국시대 |
주요 작품 | 여씨춘추 |
목차
개요
여불위 그는 누구인가?
그는 시대의 흐름을 꿰뚫어 보고 투자할 가치가 있는 대상에 아낌없이 투자하는 거상(巨商)이었다.
그러나 그는 물건만을 사고파는 상인이 아니었다. 그는 사람에게서도 가치를 찾아내 사람마저도 투자대상으로 판단하는 비범한 상인이었고, 더 나아가 킹메이커이자 한 나라의 실세로 군림한 권신이었다.
그가 없었다면 이인(異人)은 장양왕(莊襄王)이 되지 못했을 테고, 진시황(秦始皇)은 세상의 빛을 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즉, 그가 없었다면 중국 최초의 통일 국가인 진(秦)나라 또한 없었다. 이 정도로 그는 중국 역사에 영향력이 큰 존재이다.
그러나 그의 최후는 처절하다. 주변인의 실수를 말미암아 여불위는 진시황에게 협박을 받아 끝내 자결하고 말았다.
여불위 관련 인물관계도
생애
불분명한 출생연도와 출신
그의 출생연도는 불분명하다. 한중교류 채널 봉황망(凤凰网)에서는 여불위가 B.C.292년에 태어났다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신빙성이 그다지 크지는 않다. 그리고 출생지는 명확하게 밝혀지진 않았다. 그의 출생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한다.
첫 번째로 그가 한(韓)나라 사람이라는 설이 있다. 이는 사마천 사기(史記)의 여불위 열전에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그를 “양적(陽翟)의 대고인(大賈人)”이라고 설명한다. 이때, ‘양적’은 한나라에 있는 큰 읍이고, ‘대고인’은 점포를 가지고 장사를 크게 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두 번째로 그가 위(衛)나라 사람이라는 설이 있다. 이는 유향의 전국책(戰國策)에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복양(濮陽) 사람 여불위 한단(邯鄲)에서 장사를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복양(濮陽)’은 위(衛)나라의 도시 중 하나이고, ‘한단(邯鄲)’은 조(趙)나라의 수도이다. 또, 봉황망(凤凰网)에서 “그(여불위)의 아버지 여충의(呂忠义)는 위나라 성내에서 진귀한 한약재를 파는 유명한 상인이었다.”라는 설명이 있는데, 이는 간접적으로 여불위 집안이 위(衛)나라 상인 집안이고 그로 인해 여불위가 위(衛)나라 사람임을 암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