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궤
개요
리궤는 중국국가박물관에 소장되고 있는 청동기로써, 국가 차원에서 출국을 금지한 64점의 귀중한 문물 중 하나다. 높이는 28센치미터이며 지름은 22센치미터이다. 윗부분은 원형에 크게 벌어진 입구에 통통한 배처럼 볼룩한 모양을 지니고 있으며, 양쪽에는 짐승의 귀와 그 귀에 귀고리가 두 개 달려 있는 모양을 가지고 있다. 아랫부분은 네모난 받침대가 있어 듬직하고 위엄이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현존하는 서주 청동기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기물이다.
궤(簋)란?
궤簋는 상나라에서 춘추전국시대까지 유행한 청동기 중 하나다. 주로 음식을 담는 데 사용되었으며, 벼와 수수 등을 삶아 익혀서 담았던 옛날 그릇이다. 상주商周시대에는 궤簋는 음식을 담는 그릇의 용도 이외에 중요한 예기로서 향응과 제사를 지낼 때 짝수로 배열되어 鼎정과 함께 사용되었다.
출토
1976년 3월 상순에 섬서성陝西省 임동현臨潼県의 영구공사서단대대零口公社西段大隊가 경작하던 중 동기 여러 점을 발견하였다. 보고를 받은 임동현의 문화관 관원이 현장에 도착해서 보니 출토 지점이 2만 여 제곱미터에 걸친 주나라 유적의 한 구획이었으며, 이미 출토된 뒤여서 발굴된 당시 상황은 분명하지 않지만 절벽 위에 동기가 매장되어 있던 깊이 2미터, 너비 70센치미터 크기의 움막이 있었다. 출토된 동기는 60여 점이었는데, 그 가운데 네모 반듯한 대좌台座 위에 녹청으로 뒤덮인 궤로 불리는 제기 하나가 있었다, 그릇 안쪽 바닥에는 4행 32자의 명문이 주조되어 있었으며, 이후 명문의 보이는 그릇을 제작한 사람의 이름을 따서, 이 동기는 리궤로 불린 것이다.[1]
리궤의 특징
외관
리궤의 가운데 부분과 대좌台座 부분에는 모두 뇌문무늬로 되어있고, 그 위에는 짐승의 얼굴로 장식되어 있으며, 대좌 부분에도 흡사한 짐승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큰 눈으로 응시하고 있는 짐승의 모습이 장엄함을 보여 준다. 자세히 보면 리궤의 원형의 다리부분에는 두루 한 바퀴 용 모양의 무늬로 되어 있으며 대좌의 네 구석에 매미무늬를 장식하였다.
명문(銘文)
원문
珷征商, 隹甲子朝, 歲
鼎, 克䎽, 夙又商. 辛未
王在闌師錫又事利
金. 用作檀公寶尊彝.[2]
해석
무왕(武王)께서 상商나라를 정벌하였을 때는 갑자일 아침 목성이 나타날 때 쯤이였다. 승리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며, 신속하게 상商나라 땅을 점령하였다. 신미일에 무왕武王께서는 ‘간’ 땅에 머무시면서 왕을 모시고 참전했던 ‘리(利)’에게 청동을 상으로 하사하셨다. 이를 기념하여 ‘리(利)’는 ‘단공檀公’의 제사에 사용할 진귀한 제기를 만들었다.[3]
의의
서주(西周) 왕조의 토대가 된 역사적 전쟁인 목야전투(牧野戰鬪)가 있다. 사기(史記) 주본기(周本紀)는 서주의 역사를 잘 정리한 거의 유일한 문헌 자료인데 사마천은 사료로서 상서를 많이 참고하여, 목야전투 부분에 대해서도 상서 목서(牧誓) 편을 거의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하지만 목서의 날짜 표시법이나 관직명 등 후대에 쓰인 용어가 눈에 띄는 것으로 보면 상나라가 멸망하고 600년 넘게 경과한 전국시대에 이르러서야 완성된 문장으로 보인다. 따라서 목서에 근거한 사기 주본기에 기술된 목야 전투의 내용이 얼마나 역사적 사실을 담아냈는지 의문시 되어왔다. 하지만 리궤가 발굴되므로, 목서의 기술이 역사상 사실이었음을 증명한 것이다.
리궤의 명문을 보면 상商나라 토벌 이후 무왕武王이 공로를 세운 리(利)에게 부상으로 동을 하사하자, 리(利)가 제작한 제기祭器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목서의 기록된 상의 토벌(목야전투)이 벌어진 날 역시 ‘갑자일 미명’으로 기록되며 이 기술이 리궤의 명문을 통해 역사상 사실이었음을 증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참고문헌
단행본
- 후쿠다 데쓰유키,『문자의 발견 역사를 흔들다』, 너머북스, 2016.
- 張光直,『중국 청동기 시대 』, 학고방, 2013.
- 리펑 『중국고대사』, (주)사회평론아카데미,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