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십국
오대는 화북의 중하 유역 중원에서 후량, 후당, 후진, 후한, 후주의 다섯 왕조가 흥망하다가, 정통왕조인 당의 뒤를 이은 송으로 이어졌다. 또한 전국적으로 보면 양자강 중하 유역을 중심으로 많은 지방정권이 존재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10개였기 때문에 오대십국이라고 불렸다. 이 시기는 당과 송의 과도기이지만 단순히 여기에 그치지는 않는다.
황소의 난이 종결된 후 당조에는 번진과 함께 새로운 세력이 흥기하였다. 이후 당의 정치는 황소의 부장 출신이자 새로운 세력의 대표적 인물인 주전충에 의해 좌우되었다. 주전충은 후량을 건국했고 수도를 변주로 옮겼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방어에 편리한 장안에 반해 평원에 위치하여 경제적 이점이 많은 변주로 수도를 옮긴것은 국가 정책이 경제에 주안점을 두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후당을 멸망시킨 석경당은 장성 내에 위치한 연운십육주의 할양과 매년 공납 약속을 대가로 거란의 군사원조를 받아 후진을 건립했다. 연운십육주는 지금의 북경 부근을 중심으로 한 16개 주이다. 이후 송과 영토분쟁이 자주 일어났으며 장성 이남에 위치한 관계로 한족들의 영토적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혔다. 이후 400년간에 걸쳐 화북의 한족에 대한 이민족의 지배가 여기서 비롯되었다. 거란의 연운십육주 영유는 이미 비한족 지역에서 성립해 있던 정권이 한인 거주지역에까지 지배를 확대했닥 하는 점에서 전례 없는 일이었다.
석경당 이후 거란과의 약속을 충실히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란은 후진을 멸망시켰다.
951년 곽위가 후주를 건립하였다. 이에 대항해 유승은 후한의 후계자를 칭하며 산서성 중부를 장악하고 북한(北漢)을 건립하였다. 북한은 십국의 하나로서 거란의 원조를 받아 후주와 그 뒤를 이은 송에 저항했고, 979년 십국 중 최후로 송조에 의해 멸망되기까지 송의 두통거리였다.
곽위의 양자인 시영이 뒤를 이었는데, 그는 오대의 영주라 칭해지며 실제 통일의 기반을 다진 군주 세종(世宗)이다. 세종은 통일전쟁을 시작했으며 금군을 재편하고 강화하였다. 또한 불교를 탄압하여 사원의 재산을 국가로 회수하고 비과세 대상인 승니를 환속시켰다. 이어 남방의 남당(南唐)에게서 승리하여 주요 소금 산지인 양자강 하류지역을 장악했으며 거란을 공격해 연운십육주 중 2개 주를 회복하였다. 그러나 929년 세종이 급사한 후 조광윤이 옹립되는데 이가 바로 송의 태조이다.
오대는 번진의 통치구조를 확대시켜 그대로 이어받은 군벌정권이었고, 후량을 제외하면 산서군벌 내부의 정권 교대적 성격이 짙었다. 그러나 정권의 세력범위는 한정되어 있었고 지방에 할거하던 절도사의 세력이 강했다. 따라서 이 시대는 무인적 기풍이 강했지만 말단의 지배에는 문관을 등용하지 않을 수 없었고 신흥세력이 관계에 진출하게 되었다. 이들이 송대 이래의 사대부와 연결되는 존재이다.
십국은 북한을 제외하면 모두 양자강 중하류에 위치한다. 이것은 당 중기 이후 이 지역의 경제적 발전이 독립정권의 존재를 가능케 했음을 보여주며, 현재의 성 경계와도 상당부분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십국정권은 부국강병이 정책목표였기때문에 지역의 개발에 영향을 주었다. 또한 오대정권에 비해 평화로웠기 때문에 십국의 지배영역 내에서는 뛰어난 당대의 문화가 계승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