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십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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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오대십국시대.jpg

당이 멸망한 907년부터 송나라가 건국된 960년까지 약 60년간 화북의 중하 유역 중원에서 흥망한 5개 왕조와 양자강 중하 유역을 중심으로 한 대표적인 10개 지방정권을 가리켜 오대십국이라 부른다.

오대(五代)

오대는 번진의 통치구조를 확대시켜 그대로 이어받은 군벌정권이었고, 후량을 제외하면 산서군벌 내부의 정권 교대적 성격이 짙었다. 그러나 정권의 세력범위는 한정되어 있었고 지방에 할거하던 절도사의 세력이 강했다. 따라서 이 시대는 무인적인 기풍이 강했지만, 말단의 지배에는 문관을 등용하지 않을 수 없었고, 신흥세력이 관계에 진출하게 되었다. 이들이 송대 이래의 사대부와 연결되는 존재이다.

후량

875년에서 844년까지 지속된 ((황소의 난]] 이후 당조에는 각지에서 할거하던 번진만이 아니라 난 중에 각지에서 새로운 세력들이 흥기하였다. 이 새로운 세력을 대표하는 것이 황소의 부장 출신인 주전충과 사타족 출신인 이극용이었다. 반란 후 양인의 세력 다툼에서 주전충이 승리한 후 이극용은 근거지였던 산서지역으로 물러가고, 당의 정치는 주전충에 의하여 좌우되었다. 907년 주전충은 소선제로부터 양위의 형식을 받아 당조를 멸망시키고 후량을 건국했다.
주전충은 찬탈자인데다 황소 봉기의 배반자여서 평판이 좋지 않았지만 부패한 귀족관료와 환관에 대해 철저한 탄압을 가한 혁신정치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주전충의 업적 중 주요한 것은 수도를 변주로 옮긴 것이다. 이곳은 자신의 근거지이기도 했지만, 경제 중심이 남쪽으로 이동함에 따라 대운하로 운반된 물자가 수송되어 집하되는 지역이었다. 당대까지의 수도였던 장안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방어에 편리하다는 군사적 있었던 데 반해, 평원에 위치해 경제적 이점이 많은 변주로 수도를 옮긴 것은 단순한 수도의 이동이 아니라 국가정책이 이제 경제에 주안점을 두기 시작했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주전충의 후량은 이후 이극용의 뒤를 이은 이존욱에게 293년 멸망당했다.

후당

후당왕조를 건립한 이씨는 투르크 계통의 사타족 출신이었는데, 오대의 각 왕조는 하남군벌 출신인 후량과 산서군벌 계통인 나머지 4왕조로 구분된다. 후당의 이씨는 당조로부터 성을 하사받았기때문에 철저히 당의 후계자를 자임해 수도를 낙양으로 정하고, 당조 귀족의 자손을 수소문해 정권을 맡기는 등 복고적인 성격이 강했다.후당은 거란과 손을 잡은 석경당에 의해 멸망한다.

후진

후당을 멸망시킨 석경당 또한 사타족 출신으로 장성 내에 위치한 연운십육주의 할양과 매년의 공납 약속을 대가로 거란의 군사원조를 받아 후진을 건립했다.
석경당 이후 거란과의 약속을 충실히 이행하지 않았기 대문에 거란은 화북에 침입하여 후진을 멸망시켰다. 거란의 태종은 그대로 화북에 머물러 국호도 요라고 고쳐 직접 지배하려 했다. 그러나 한족의 저항이 강해 만주로 물러났다.

후한

사타족 출신의 유지원이 후한을 건국하였다. 후한은 불과 4년을 유지한 중국 역사상 최단명 왕조로서, 그 영역도 오대 가운데 가장 협소했다.

후주

951년 각위는 쿠데타를 통해 후주를 건립했다. 곽위는 하북의 군벌이었지만 한족이었다. 이에 대항해 유지원의 동생 유승은 진양에서 후한의 후계자를 칭하며 산서성의 중부를 장악하고 북한(北漢)을 건립했다. 북한은 십국의 하나로서 거란의 원조를 받아 후주ㅘ 그 뒤를 이은 송에 저항했고, 979년 십국 중에서 최후로 송조에 의해 멸망되기까지 송의 두통거리였다.
곽위의 뒤를 이은것은 양자인 시영인데, 그는 오대의 영주라 칭해지며 실제 통일의 기반을 다진 군주 세종(世宗)이다. 세종은 통일정쟁을 시작했으며, 그 과정에서 중앙의 금군을 재편·강화했다. 세종은 또 불교와 사원에 대한 탄압 으로도 유명하다. 이어 남방의 강국 남당에 승리를 거두어 중요한 소금 산지였던 양자강 하류지역을 장악했으며, 거란을 공격하여 연운십육주 중 2개 주를 회복하였다. 그러나 959년 세종이 급사한 후 친위대장이었던 조광윤이 옹립되었는데, 이가 바로 송의 태조이다.

십국(十國)

전촉, 후촉, 북한, 형남, 초, 오, 오월, 민, 남한, 남당을 가리킨다.
십국은 북한을 제외하면 모두 양자강 중하류에 위치한다. 이것은 당 중기 이후 이 지역의 경제적 발전이 독립정권의 존재를 가능케 했음을 보여주며, 현재의 성 경계와도 상당부분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십국정권의 의의는 무엇보다도 지역의 개발에 있다. 부국강병이 정책목표였기 때문에 농경지의 개간과 관개·수리시설의 보강과 확충에 진력했다. 오월의 경우 수천명의 군대를 동원해 태호(太湖) 주변의 수리전을 개간했고, 방조사업과 배수사업을 각지에서 행해 농업생산력의 확충을 꾀했다.
또한 전란이 계속된 오대정권에 비해 비교적 평화롭고 안정적인 상태가 유지되었기 때문에 십국의 지배영역 내에서는 뛰어난 당대의 문화가 계승되었다. 남당과 촉의 경우 전란을 피해 도망온 당조의 귀족과 문인이 많이 유입되었다.
회화 분야에 있어 남당에서는 산수화와 화조돠 유명하며, 이 강남화단의 화풍은 송대의 회화로 이어졌다. 촉에서는 수묵화가 유행하였다. 한편 문하게서도 당대 후반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운문체의 사(詞)가 남당과 촉에서 발달했다. 송대에 『태평어람』을 필두로 국가적 편찬사업이 행해질 때 강남 출신자가 많이 참여했다. 물론 이것은 피정복지역에 대한 대책이라는 정치적 측면도 있지만 문화적 전통이 중원지역보다 뛰어났다고 하는 객관적 현실도 작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