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부시찰
목차
정의
덩샤오핑(邓小平)은 1992년 1월18일부터 2월21일까지 5주간 경제특구인 선전(深川)과 주하이(珠海)뿐만 아니라 광저우(廣州), 우창(武昌), 상하이(上海) 등 남부지방을 시찰하면서 일련의 담화들을 발표한다. 곧이어 중국정부가 덩샤오핑의 담화내용을 모아 「덩샤오핑 동지의 중요 담화 및 전파함에 관한 통지」를 작성하여 전국의 하급기관에 배포한다. 이 문서에 나타난 덩샤오핑의 담화를 일반적으로 ‘남순강화南巡讲话'라 부른다. 남순강화는 중국이 개혁의 새로운 단계로 진입했다는 것을 보여주며, 남순강화가 강조하는 것은 개혁의 가속화이다.[1]
남순강화의 배경
왜 남방지역인가?
왜 그곳에서 국가의 운명이 걸려있다고 할 수 있는 중대발언을 발표하였는가? 개방정책의 확대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전략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베이징에서는 천윈(陈云)을 중심으로 하는 보수파 세력들이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통제 당할 위험이 있다고 판단하였고, 이에 개혁‧개방의 물결이 크게 일고 있었던 남방의 경제특구를 중심으로 하여 시찰을 하게 된다. 또한 남방의 경제특구지역인 광동이나 복건성에서는 개혁‧개방정책을 통해 많은 이익을 얻었기 때문에 그들은 계속적인 개방정책의 확대를 요구하기에 이른다. 전국적으로는 주강삼각주(珠江三角洲)와 민강삼각주(閩江三角洲)의 모습과 홍콩, 대만 등 자본의 영향으로 역시 계속적인 개혁‧개방정책을 추구하고 있었다. 이처럼 중국은 개혁‧개방정책을 확대해야할 환경에 직면하였다. 따라서 덩샤오핑은 개혁‧개방 확대의 필요성을 중앙 보수파에게 피력해야만 했다.
부동산의 활성화
주강삼각주지역(珠江三角洲地区)이 경제적으로 발전함에 따라 외국의 자본이 복건성과 광동성에 집중적으로 투자되었고, 이에 따라 경제적 요건의 변화도 요구되었다. 즉 경제 개방정책에 따라 국내의 제조업이 크게 발전하였고, 토지사용권의 확대에 따른 서비스산업의 개방화를 촉구하고 있었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정책 이후 비교적 많은 외국자본이 중국에 투자되었으나 그 대부분이 제조업이나 서비스산업에 국한되었다. 호텔업이나 요식업, 오락시설 등이 활성화되어 토지임대업이 성행하였다. 홍콩, 대만, 싱가포르 등지의 화교 자본가들이나 외국자본가들은 광동성이나 상하이 등지에 토지를 임대하여 서비스업종에 투자하고 있다.
주식시장의 활성화
선전(深川)과 상하이에서는 주식시장이 개설되었다. 중국의 국영기업은 장기간의 관리과정에서 막대한 손실을 가져왔기 때문에 그 유지가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었다. 중국에서 주식시장을 개설하게 된 목적 중 하나는 국영기업의 이러한 경영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것이었다. 국영기업에 최대한의 자주권을 부여하고 비교적 운영실적인 좋은 국영기업에 대해서는 주식제도를 시행하도록 허용하여, 기업에서 독자적인 주식을 발행하여 자주적인 융자와 자본을 차관할 수 있도록 하였다. 주식시장이 개설되자 주가는 급상승한다. 이는 주식의 종목과 발행량이 한정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중국 내에 주식시장을 건전하게 관리할 수 있는 감독기관이 없었다는 것이다.
내용
1989년 이후 덩샤오핑은 당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을 내놓으며 공식 직책에서는 물러난다. 그러나 직책 없이도 덩샤오핑은 계속하여 정치적 지배력을 유지했다. 1992년 덩샤오핑은 1월18일 5주간의 남부시찰에 나선다. 경제특구인 선전(深川)과 주하이(珠海)뿐만 아니라 광저우(廣州), 우창(武昌), 상하이(上海)도 방문한다. 덩샤오핑은 각 방문지를 들를 때마다 지방관료들에게 경제발전을 가속화하고 시장지향적인 개혁을 심화해야하고, 선전 경제특구의 자본주의와 광동성의 자유시장정책을 본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덩샤오핑이 남부시찰 중 행한 논평과 연설은 1992년 5월 「중앙문건 제4호」로 취합되어 전국의 당과 관료들에게 배포된다. 경제발전과 함께 자본주의를 향한 움직임도 따르게 되는데, 국유기업은 자율권을 얻어 외국과의 무역을 자체적으로 진행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반(半)사유화의 실시로 일부 국유기업은 주식을 발행하여 소유 지분을 조절할 수 있었다. 이러한 주식은 상하이와 선전에 설립된 증권거래소에서 팔려나갔고, 이 주식 중 일부는 홍콩 증권거래소에서 가장 수요가 많아지기도 했다.
경제개혁
덩샤오핑은 국제정세가 어떻게 변화하더라도 중국은 모든 조건을 통제하고 안정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하는데, 사회적 안정은 곧 경제발전을 이룩하는 초석이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민생문제를 개선해야만 하고, 경제발전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 국민은 경제발전을 위해 전력을 기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덩샤오핑은 시장화의 확대로 중국의 완전한 자본주의화를 염려하는 사람들에게 공산주의 국가의 존재는 어떤 방식의 경제적 발전도 궁극적으로는 사회주의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말했다. 덩샤오핑은 이러한 염려를 단순히 진정시키는데 그치지 않고, 개혁‧개방에 관한 정책을 통제하였던 보수파들을 권력과 영향력 있는 자리에서 제거하기에 이른다. 이를 위해 덩샤오핑은 남부시찰 중 당이 직면한 가장 큰 위험은 더 이상 부르주아 자유화라는 우경화된 이단이 아니라 다시 ‘극좌주의’가 되었다고 선언한다. 중앙집권적인 경제계획과 국가의 공업에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부여하려했던 천윈을 중심으로 하는 보수파와의 사상적 투쟁. 이후 천윈의 사상적 항복은 중국공산당에서 ‘덩샤오핑주의’의 결정적인 승리를 의미한다.
개방정책
덩샤오핑은 1989년 천안문사건, 동유럽과 소련의 공산정권붕괴 등 급변의 사례를 들면서 만일 중국이 개방하지 않을 경우 현상유지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개방은 중국의 생존과 발전에 필수적인 것이고, 이를 반대한다면 지위를 막론하고 사퇴해야 한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인다. 개방정책만이 해결책은 아니겠지만, 만일 개방의 속도를 늦춘다면 멸망의 위기에 직면하기 쉽다는 것이다. 또한 중국의 개방정책은 1990년대 이후가 더욱 중요하기 때문에 보다 안정된 범위 내에서 정책을 형성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국식 사회주의를 위하여서는 더 다양한 경험이 필요하고, 이를 통해 중국만의 특성과 창조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덩샤오핑은 개방정책과 자본주의와의 관계를 문제점으로 제시한다. 사회주의적 계획경제체제에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체제로 변화하는 것이 사회주의의 소멸을 가져오고, 자본주의화를 촉구할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 그는 자본주의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해야 하지만 자본주의 자체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사회주의적 방법으로 사회주의국가의 국민의 생활을 향상시킨다는 보장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과감하게 외국의 자본과 선진국의 과학기술을 도입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계획경제가 사회주의만의 특성이 될 수는 없으며, 자본주의에서도 그것을 활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또한 시장경제 역시 자본주의의 독점물이 아니며 사회주의에서도 필요한 요소라고 주장한다. 즉 사회주의에도 시장이 있으며, 자본주의에도 계획에 의한 통제가 있다는 것이다. '자(资)’씨이냐 ‘사(社)’씨이냐의 판단의 기준은 사회주의 사회의 생산력 발전에 유리한 것인가, 사회주의 국가의 국 증대에 유리한지, 인민의 생활수준을 높이는데 유리한 것인가라고 주장한다. 사회주의나 자본주의 중 어느 하나만을 신봉하며 그것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장점만을 적절하게 활용하는 실용적 자세를 취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의식개혁문제
의식개혁은 고정관념이나 자신의 주관적 판단에 기준하여 독자적으로 결정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무조건 강요하지 않고, 국내외적 환경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의식을 개선하는 것을 말한다.
세대교체문제
덩샤오핑은 남순강화에서 사람의 문제를 제기한다. 중국식 사회주의를 견고하게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후세대의 인재를 양성하고 훈련시키는 것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방범문제
덩샤오핑은 현대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을 해치는 현상은 형식주의라고 말했다. 이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모든 일을 사실에 입각하여 처리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진실에 입각하여 말하고 일을 처리하는 것만이 실효성을 거둘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실질적인 문제점을 해결하기 못하는 관료주의의 청산을 피력하였다. 또한 청렴한 정치체제 건설을 강조하며, 부패현상을 제거해야 한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부패에 의한 경제적 범죄행위, 매춘 등의 범죄활동이 많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를 해결하지 않는 한 경제발전에 큰 위협을 가져오고 사회적 불안을 조성할 위험은 계속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리하여 덩샤오핑은 개방정책을 더욱 확대하는 동시에 정신(사상)도 확립시켜야 한다며, 한손에는 물질문명을, 다른 한손에는 정신문명을 붙들고 전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경제발전의 가속화
덩샤오핑은 “느린 속도의 발전은 정체, 더 나아가 후퇴와 마찬가지”라고 경고했다. 이는 1989년 천안문사태 이후의 정책이었던 연 6%로 경제성장을 제한한다는 정책의 종결을 의미했다. 덩샤오핑은 사회주의체제에서의 경제발전을 위해 필요하다면 자본주의의 장점을 최대한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야만 더욱 발전할 수 있으며, 장기적인 안목에서 봤을 때 중국식 사회주의체제를 견고하게 구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중국의 경제적 개혁‧개방정책이 시작된 것은 1980년대부터이다. 그동안 중국의 경제발전속도는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 특히 경제특구는 경제발전의 선구자로서 큰 발전을 이룩했다. 하지만 이에 따르는 여러 문제들도 발생된다. 국영기업과 개인기업 사이의 대립, 연해지역을 중심으로 한 한정적인 발전으로 인한 경제력 차이 등은 빠른 경제성장으로 인한 문제점으로 지적되는데, 이를 위한 해결책들도 마련되어야 한다.
역사적 의의
덩샤오핑의 남순강화는 국내외 생산 증대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 당시 중국이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중요한 시기에 직면해 있었는데, 개혁개방에 대한 기지를 고취시켜 중국의 발전을 가속화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당은 문건을 발행하여 덩샤오핑 남순강화에서 거론한 경제나 사상 등에 대한 담화들을 하나의 정책으로서 자리잡게 했고, 남부시찰은 개혁개방의 새로운 단계로의 진입을 의미하게 된다. 장쩌민 총서기는 제15대 보고에서 남순강화를 하나의 중요한 역사로 평가했다. 또한 개혁개방과 현대화 건설을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게 한 하나의 개혁사상, 실사구시의 선언이라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