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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성]]자. [[广]](집 엄, 의미부)와 [[占]](차지할 점, 소리부)로 구성되었으며 '가게'를 뜻하는데, 어떤 고정된 위치를 차지한(占) 곳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건물(广)이라는 뜻이다.<ref>하영삼, 『한자어원사전』, 도서출판3, 2014, p565</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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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성]]자. [[广]](집 엄, 의미부)와 [[占]](차지할 점, 소리부)로 구성되었으며 '가게'를 뜻하는데, 어떤 고정된 위치를 차지한(占) 곳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건물(广)이라는 뜻이다.<ref>하영삼, 『한자어원사전』, 도서출판3, 2014, p565</ref><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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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막(屋棚) 아래에서 사람들에게 점치던 곳이라는 의미에서 지금의 '가게'라는 의미가 파생되었다는 주장도 있다.<ref>廖文豪,『汉字树 5-汉字中的建築與器皿』,中国商业出版社, p.48</ref>
한편 『汉字树』에서는 '집 막(屋棚) 아래에서 사람들에게 점치던 곳' 지금의 '가게'라는 의미를 낳았다고 해석하고 있다.<ref>廖文豪,『汉字树 5-汉字中的建築與器皿』,中国商业出版社, p.48</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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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 사람들 중 ‘점쟁이’는 점치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는데, 《[[사기]](史记)》에는 [[전국시대]] [[제]]()나라 재상이 점쟁이를 이용해서 대장군 전기(田忌)를 모함했던 고사가 기재되어있다.<ref>위의 책, 같은 페이지</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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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 사람들 중 ‘점쟁이’는 점치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는데, 《[[사기]](史記)》에는 [[전국시대]] [[제]]()나라 재상이 점쟁이를 이용해서 대장군 [[전기]](田忌)를 모함했던 고사가 기재되어있다.<ref>위의 책, 같은 페이지</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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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나라 재상 성후 추기(邹忌)와 대장군 전기는 불화가 있었고, 그는 수하에 책사 공손한(公孙闲)을 두었는데, 거듭 전기를 모함하는 계책을 올렸다. 한 번은 공손한이 전기의 부하인 척 사칭하는 사람을 보냈는데, 2백냥의 은을 가지고 가 점쟁이 집에서 말했다.  
제나라 재상 성후 추기(邹忌)와 대장군 전기는 불화가 있었고, 그는 수하에 책사 공손한(公孙闲)을 두었는데, 거듭 전기를 모함하는 계책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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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군 전기가 [[위]]나라를 공격해서, 삼전삼승을 거뒀는데, 천하에 위세를 떨쳤다. 나는 그의 측근이니, 현재 우리가 왕위를 도모하는데 네가 우리를 위해 점을 쳐보게나. 길한가, 길하지 않은가?”<ref>위의 책, 같은 페이지</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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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지나지 않아, 재상 성후 추기는 즉시 사람을 보내 점쟁이를 붙잡아 제나라 왕 앞에서 대장군 전기가 역모를 꾀했다고 무고하게 하니, 대장군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한 번은 공손한이 전기의 부하인 척 사칭하는 사람을 보냈는데, 2백냥의 은을 가지고 가 점쟁이 집에서 말했다.  
 
 
 
 
 
“대장군 전기가 위나라를 공격해서, 삼전삼승을 거뒀는데, 천하에 위세를 떨쳤다. 나는 그의 측근이니, 현재 우리가 왕위를 도모하는데 네가 우리를 위해 점을 쳐보게나. 길한가, 길하지 않은가?”
 
 
 
 
 
오래 지나지 않아, 재상 성후 추기는 즉시 사람을 보내 점쟁이를 붙잡아 제나라 왕 앞에서 대장군 전기가 역모를 꾀했다고 무고하게 하니, 대장군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글자 店이 지금의 '가게'라는 의미를 가지게 된 이유는 분명하지 않지만, 《사기(史记)》에서 언급된 것처럼 점치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음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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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店이 지금의 '가게'라는 의미를 가지게 된 이유는 분명하지 않지만, 《사기(史記)》에서 언급된 것처럼 점치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음을 수 있다.<br>
  
店이 '가게'라는 뜻으로 쓰인 것은 [[당]](唐)나라에 방문했던 승려 엔닌(円仁)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엔닌은 당에서 머무는 동안 숙식을 해결했던 여러 시설에 관해 기록했는데, 구법승이라는 개인적 신분으로 엔닌은 보통원(普通院), 일반 가택(家宅), 그리고 점(店)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또한 당(唐)나라 때는 店이 창고, 상점, 여관 등 복합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고, 소규모 향촌이나 초시(草市, 시골 장터)에도 店이 있었기에 엔인은 시장과 마을을 지나면서 店을 숙박시설로 이용했다.<ref>이유진, 「唐代 求法僧의 숙박시설」, 『숭실사학』, vol.22, 2009, 초록 인용</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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店이 '가게'라는 뜻으로 쓰인 것은 [[당]](唐)나라에 방문했던 승려 엔닌(円仁)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엔닌은 [[당]]에서 머무는 동안 숙식을 해결했던 여러 시설에 관해 기록했는데, 구법승이라는 개인적 신분으로 엔닌은 보통원(普通院), 일반 가택(家宅), 그리고 점(店)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또한 당(唐)나라 때는 店이 창고, 상점, 여관 등 복합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고, 소규모 향촌이나 초시(草市, 시골 장터)에도 店이 있었기에 엔닌은 시장과 마을을 지나면서 店을 숙박시설로 이용했다.<ref>이유진, 「唐代 求法僧의 숙박시설」, 『숭실사학』, vol.22, 2009, 초록 인용</ref>
  
 
==주석==
 
==주석==

2018년 12월 25일 (화) 22:54 기준 최신판

語源

가게 점(店).png

형성자. 广(집 엄, 의미부)와 (차지할 점, 소리부)로 구성되었으며 '가게'를 뜻하는데, 어떤 고정된 위치를 차지한(占) 곳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건물(广)이라는 뜻이다.[1]
집 막(屋棚) 아래에서 사람들에게 점치던 곳이라는 의미에서 지금의 '가게'라는 의미가 파생되었다는 주장도 있다.[2]

文化

중국 고대 사람들 중 ‘점쟁이’는 점치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는데, 《사기(史記)》에는 전국시대 (齊)나라 재상이 점쟁이를 이용해서 대장군 전기(田忌)를 모함했던 고사가 기재되어있다.[3]

제나라 재상 성후 추기(邹忌)와 대장군 전기는 불화가 있었고, 그는 수하에 책사 공손한(公孙闲)을 두었는데, 거듭 전기를 모함하는 계책을 올렸다. 한 번은 공손한이 전기의 부하인 척 사칭하는 사람을 보냈는데, 2백냥의 은을 가지고 가 점쟁이 집에서 말했다.
대장군 전기가 나라를 공격해서, 삼전삼승을 거뒀는데, 천하에 위세를 떨쳤다. 나는 그의 측근이니, 현재 우리가 왕위를 도모하는데 네가 우리를 위해 점을 쳐보게나. 길한가, 길하지 않은가?”[4]
오래 지나지 않아, 재상 성후 추기는 즉시 사람을 보내 점쟁이를 붙잡아 제나라 왕 앞에서 대장군 전기가 역모를 꾀했다고 무고하게 하니, 대장군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글자 店이 지금의 '가게'라는 의미를 가지게 된 이유는 분명하지 않지만, 《사기(史記)》에서 언급된 것처럼 점치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음을 수 있다.

店이 '가게'라는 뜻으로 쓰인 것은 (唐)나라에 방문했던 승려 엔닌(円仁)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엔닌은 에서 머무는 동안 숙식을 해결했던 여러 시설에 관해 기록했는데, 구법승이라는 개인적 신분으로 엔닌은 보통원(普通院), 일반 가택(家宅), 그리고 점(店)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또한 당(唐)나라 때는 店이 창고, 상점, 여관 등 복합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고, 소규모 향촌이나 초시(草市, 시골 장터)에도 店이 있었기에 엔닌은 시장과 마을을 지나면서 店을 숙박시설로 이용했다.[5]

주석

  1. 하영삼, 『한자어원사전』, 도서출판3, 2014, p565
  2. 廖文豪,『汉字树 5-汉字中的建築與器皿』,中国商业出版社, 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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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위의 책, 같은 페이지
  5. 이유진, 「唐代 求法僧의 숙박시설」, 『숭실사학』, vol.22, 2009, 초록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