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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성자다. 水가 의미부이고 則이 소리부이다. 물의 깊이를 잰다는 뜻에서부터 ‘측정’의 뜻이 나왔다. 후에 추측하다, 알다, 방문하다의 뜻이 나왔다.<ref>하영삼, 『한자어원사전』, 도서출판 3, 2014</ref> 또 다른 학설로는 測이 ‘물의 평평함을 측량하는 규범으로 삼다.’에서 나왔다는 주장이 있다.<ref>廖文豪,『汉字树5 : 汉字中的建筑与器皿』,中国商业出版社</ref>  또는 測의 갑골문과 금문을 보고, 갑골문에서는 한 사람이 절벽 옆에 비스듬히 선 옆 모양을 표현한 것이며, 금문에서는 두 사람이 鼎을 필사적으로 들어올리려는 모습을 나타낸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ref>熊国英, 图释古汉字, 齐鲁书社</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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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성자다. 水가 의미부이고 [[則]]이 소리부이다. 물의 깊이를 잰다는 뜻에서부터 ‘측정’의 뜻이 나왔다. 후에 추측하다, 알다, 방문하다의 뜻이 나왔다.<ref>하영삼, 『한자어원사전』, 도서출판 3, 2014</ref> 또 다른 학설로는 測이 ‘물의 평평함을 측량하는 규범으로 삼다.’에서 나왔다는 주장이 있다.<ref>廖文豪,『汉字树5 : 汉字中的建筑与器皿』,中国商业出版社</ref>  또는 測의 갑골문과 금문을 보고, 갑골문에서는 한 사람이 절벽 옆에 비스듬히 선 옆 모양을 표현한 것이며, 금문에서는 두 사람이 [[鼎]]을 필사적으로 들어올리려는 모습을 나타낸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ref>熊国英, 图释古汉字, 齐鲁书社</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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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사회 최초의 측량은 주로 신체를 통해서 이뤄졌다. 최초의 도량형 기원지로는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가 언급되고 있다. 현재 기록으로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단위는 큐빗(cubit)이라는 길이 단위다. 큐빗은 1 야드(91.44 cm)의 원형으로, 1 큐빗은 약 45.8 cm의 길이이다. 이는 신체를 이용한 측량으로, 팔을 구부렸을 때 팔꿈치에서부터 손가락 중지 끝까지의 길이를 뜻했다. 고대에만 사용된 게 아니라 근대까지 쓰일만큼 중요한 기준이다.<br>중국의 도량형 통일은 진나라의 진시황 때 만들어진다. 진시황은 도량형 제도를 만들어 공표하고, 표준이 되는 자와 저울, 되를 대량으로 만들어 백성들에게 나눠주었다. 필요성은 세금을 정확하게 걷고, 성 등을 정확하게 쌓기 위한 데에서 나왔다. 도량형이 통일되기 전까지는 비단이나 모시 같은 천으로 세금을 냈는데, 각자 기준이 달라서 과도하게 측정되어 수급되는 경우가 많았다. 중국 도량형 제도의 체계적인 정비는 한나라 때 이루어진다. 중국의 측정 기술은 기원전 3∼4세기 무렵 황하 유역에 이주해 온 한족이 최초로 개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ref> 김명수, 『단위를 알면 세상이 보인다』, 한국표준과학연구원, 2009</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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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사회 최초의 측량은 주로 신체를 통해서 이뤄졌다. 최초의 도량형 기원지로는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가 언급되고 있다. 현재 기록으로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단위는 큐빗(cubit)이라는 길이 단위다. 큐빗은 1 야드(91.44 cm)의 원형으로, 1 큐빗은 약 45.8 cm의 길이이다. 이는 신체를 이용한 측량으로, 팔을 구부렸을 때 팔꿈치에서부터 손가락 중지 끝까지의 길이를 뜻했다. 고대에만 사용된 게 아니라 근대까지 쓰일만큼 중요한 기준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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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도량형 통일은 진나라의 [[진시황]] 때 만들어진다. 진시황은 도량형 제도를 만들어 공표하고, 표준이 되는 자와 저울, 되를 대량으로 만들어 백성들에게 나눠주었다. 필요성은 세금을 정확하게 걷고, 성 등을 정확하게 쌓기 위한 데에서 나왔다. 도량형이 통일되기 전까지는 비단이나 모시 같은 천으로 세금을 냈는데, 각자 기준이 달라서 과도하게 측정되어 수급되는 경우가 많았다. 중국 도량형 제도의 체계적인 정비는 한나라 때 이루어진다. 중국의 측정 기술은 기원전 3∼4세기 무렵 황하 유역에 이주해 온 한족이 최초로 개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ref> 김명수, 『단위를 알면 세상이 보인다』, 한국표준과학연구원, 2009</ref> 이처럼 고대사회에서부터 측정은 이루어졌고, 그 기준은 신체와 같이 주변에서 접할 수 잇는 것들임을 알 수 있다. 測의 기원도 이러한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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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참고문헌==

2018년 12월 25일 (화) 22:41 기준 최신판

헤아릴측.JPG

語源

형성자다. 水가 의미부이고 이 소리부이다. 물의 깊이를 잰다는 뜻에서부터 ‘측정’의 뜻이 나왔다. 후에 추측하다, 알다, 방문하다의 뜻이 나왔다.[1] 또 다른 학설로는 測이 ‘물의 평평함을 측량하는 규범으로 삼다.’에서 나왔다는 주장이 있다.[2] 또는 測의 갑골문과 금문을 보고, 갑골문에서는 한 사람이 절벽 옆에 비스듬히 선 옆 모양을 표현한 것이며, 금문에서는 두 사람이 을 필사적으로 들어올리려는 모습을 나타낸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3]


文化

고대 사회 최초의 측량은 주로 신체를 통해서 이뤄졌다. 최초의 도량형 기원지로는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가 언급되고 있다. 현재 기록으로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단위는 큐빗(cubit)이라는 길이 단위다. 큐빗은 1 야드(91.44 cm)의 원형으로, 1 큐빗은 약 45.8 cm의 길이이다. 이는 신체를 이용한 측량으로, 팔을 구부렸을 때 팔꿈치에서부터 손가락 중지 끝까지의 길이를 뜻했다. 고대에만 사용된 게 아니라 근대까지 쓰일만큼 중요한 기준이다.
중국의 도량형 통일은 진나라의 진시황 때 만들어진다. 진시황은 도량형 제도를 만들어 공표하고, 표준이 되는 자와 저울, 되를 대량으로 만들어 백성들에게 나눠주었다. 필요성은 세금을 정확하게 걷고, 성 등을 정확하게 쌓기 위한 데에서 나왔다. 도량형이 통일되기 전까지는 비단이나 모시 같은 천으로 세금을 냈는데, 각자 기준이 달라서 과도하게 측정되어 수급되는 경우가 많았다. 중국 도량형 제도의 체계적인 정비는 한나라 때 이루어진다. 중국의 측정 기술은 기원전 3∼4세기 무렵 황하 유역에 이주해 온 한족이 최초로 개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4] 이처럼 고대사회에서부터 측정은 이루어졌고, 그 기준은 신체와 같이 주변에서 접할 수 잇는 것들임을 알 수 있다. 測의 기원도 이러한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다.


참고문헌

  1. 하영삼, 『한자어원사전』, 도서출판 3, 2014
  2. 廖文豪,『汉字树5 : 汉字中的建筑与器皿』,中国商业出版社
  3. 熊国英, 图释古汉字, 齐鲁书社
  4. 김명수, 『단위를 알면 세상이 보인다』, 한국표준과학연구원,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