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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칠각석의 원석은 대부분이 훼손되어 존재하지 않지만 고증을 통해 진대의 원각자에 속하는, 간신히 남겨진 “태산각석”과 “낭서각석”의 잔석을 발견하였다. 그 중 “태산각석”은 겨우 남은 2대 조서의 10개의 글자가 있어 또한 “태산십자”라고 불리며 그것은 현재 태산 근처의 대묘 안에 있다. “낭서각석”또한 이미 대부분 풍파되었으며 12행 반, 84자만이 겨우 남았다. 이들은 현재 중국역사박물관에 있다.
 
진칠각석의 원석은 대부분이 훼손되어 존재하지 않지만 고증을 통해 진대의 원각자에 속하는, 간신히 남겨진 “태산각석”과 “낭서각석”의 잔석을 발견하였다. 그 중 “태산각석”은 겨우 남은 2대 조서의 10개의 글자가 있어 또한 “태산십자”라고 불리며 그것은 현재 태산 근처의 대묘 안에 있다. “낭서각석”또한 이미 대부분 풍파되었으며 12행 반, 84자만이 겨우 남았다. 이들은 현재 중국역사박물관에 있다.
칠각석의 비석문은 <<사기-진시황본기>>의 6편에 있는데, “역산각석”이 기록되어있으나 비석문은 없다. 각석은 대부분 탁본을 본 떠 세상에 전해졌는데 전해지는 각 탁본의 본문이 <<사기>>에 있는 것과 조금씩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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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각석의 비석문은 <<사기-진시황본기>>의 6편에 있는데, “역산각석”이 기록되어있으나 비석문은 없다. 각석은 대부분 탁본을 본 떠 세상에 전해졌는데 전해지는 각 탁본의 본문이 <<사기>>에 있는 것과 조금씩 다르다.
  
 
비문이 무성히 숲을 이룬 대묘 안에서 가장 귀하고 가치가 있는 것은 진대의 이사소전이다. 그것은 기원전 209년에 새겨졌으며, 비록 숱한 세월을 겪었으나 우아한 자태는 변함이 없다.
 
비문이 무성히 숲을 이룬 대묘 안에서 가장 귀하고 가치가 있는 것은 진대의 이사소전이다. 그것은 기원전 209년에 새겨졌으며, 비록 숱한 세월을 겪었으나 우아한 자태는 변함이 없다.

2016년 12월 25일 (일) 12:21 판

秦刻石

요약

진각석은 중국의 오래된 비문(碑文)이다. 진시황은 서기 221년 전 육국을 통일한 후, 수차례 각지로 순시를 나갔다. 군신들은 칭송하며 그 공덕을 기렸고, 돌에 새김으로써 그것을 명시하였다. 총 일곱개가 있는데, 즉 “진칠각석秦七刻石”이다. 진시황이 돌아가신 후, 진 2대의 원년에(기원전 209년에) 외부로 순시를 나갔는데, 그 옆(각석 여)에 천자가 발포한 조서를 덧새기도록 하였다. 진 2대의 조서의 전문은 79자이다. 글씨체는 칠각석과 같다. 它们相传均由秦相李斯以秦统一六国后通行的秦文(秦篆体)篆写而成。그들은 모두 진의 이사가 육국을 통일한 후 보편적으로 유통한 진의 문자, 전서로 쓰여짐으로써 전서를 후대에 전수했다.(?) 진각석은 진시황을 위한 공덕시이다. 개별 문구를 제외하고, 모두 사언운문으로 되어있다. : 대다수가 세 구句에 하나의 압운이라면, “낭서각석(?)”은 두 구句에 하나의 압운으로 되어있다. 진 2대의 조서는 압운이 없는 글이다. 진각석은 후대의 문학작품과 비지문 碑志文에 모두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

기본개론

진각석은 일반적으로 <<사기/진시황본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진시황은 서기 221년 전 육국을 통일한 후, 수차례 각지로 순시를 나갔다. 군신들은 칭송하며 그 공덕을 기렸고, 돌에 새김으로써 그것을 명시하였다. 이것이 바로 진각석이다. 총 일곱 곳에 있는데, “역산각석(기원전 219년)”, “태산각석(기원전 219년)”, “낭서각석(기원전 219년)”, “지부각석(기원전 218년)”, “동관각석(기원전 218년)”, “갈석각석(기원전 215년)”, 그리고 ”회계각석(기원전 210년)”이다. 따라서 이들을 “진칠각석”, 또는 “진칠비”라고도 부른다.

진시황이 죽은 이후, 진 2대 원년(기원전 209년)에 외부로 순시를 나갔는데, 진시황이 각석을 세운 옆에 대신과 종자의 이름을 새겼다. 그로써 진시황의 공덕을 기렸다. 그리고 조서를 그 옆에 중복해서 새겼다. 진 2대 조서의 전문은 79자로 되어있으며 이는 칠각석과도 같다.

진칠각석의 원석은 대부분이 훼손되어 존재하지 않지만 고증을 통해 진대의 원각자에 속하는, 간신히 남겨진 “태산각석”과 “낭서각석”의 잔석을 발견하였다. 그 중 “태산각석”은 겨우 남은 2대 조서의 10개의 글자가 있어 또한 “태산십자”라고 불리며 그것은 현재 태산 근처의 대묘 안에 있다. “낭서각석”또한 이미 대부분 풍파되었으며 12행 반, 84자만이 겨우 남았다. 이들은 현재 중국역사박물관에 있다. 칠각석의 비석문은 <<사기-진시황본기>>의 6편에 있는데, “역산각석”이 기록되어있으나 비석문은 없다. 각석은 대부분 탁본을 본 떠 세상에 전해졌는데 전해지는 각 탁본의 본문이 <<사기>>에 있는 것과 조금씩 다르다.

비문이 무성히 숲을 이룬 대묘 안에서 가장 귀하고 가치가 있는 것은 진대의 이사소전이다. 그것은 기원전 209년에 새겨졌으며, 비록 숱한 세월을 겪었으나 우아한 자태는 변함이 없다.

이사소전에 대한 평가는 줄곧 높았다. 루쉰은 “汉晋碑铭所从出”라고 칭송했으며, 보배로 일컬어졌다. 그 힘은 마치 규룡이 날며 요동하는 것과 같으며, 그 수려함은 마치 물 위에 떠오르는 부용(연꽃)같다. 그 예술적인 매력을 보기에는 충분하다. 전세계적으로 주목을 받는 탓에 귀중품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그 비범한 경력으로 인해 시선을 끌고 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이 비석은 진승상 이사가 진 2세 호해의 명으로 새긴 것이다. 대정 옥녀못(岱顶玉女池)위에 세움으로써 그 공덕과 은덕을 찬양했다.

진칠각석

1. “역산각석(기원전 219년)”

2. “태산각석(기원전 219년)”

3. “낭서각석(기원전 219년)”

4. “지부각석(기원전 218년)”

5. “동관각석(기원전 218년)”

6. “갈석각석(기원전 215년)”

7. ”회계각석(기원전 210년)”

释文:

皇帝休烈, 平一宇内, 德惠攸长。

卅有七年, 亲巡天下, 周览远方。

遂登会稽, 宣省习俗, 黔首齐庄。

群臣诵功, 本原事迹, 追道高明。

秦圣临国, 始定刑名, 显陈旧章。

初平法式, 审别职任, 以立恒常。

六王专倍, 贪戾慠猛, 率众自强。

暴虐恣行, 负力而骄, 数动甲兵。

阴通间使, 以事合从, 行为辟方。

内饰诈谋, 外来侵边, 遂起祸殃。

义威诛之, 殄息暴悖, 乱贼灭亡。

圣德广密, 六合之中, 被泽无疆。

皇帝并宇, 兼听万事, 远近毕清。

运理群物, 考验事实, 各载其名。

贵贱并通, 善否陈前, 靡有隐情。

饰省宣义, 有子而嫁, 倍死不贞。

防隔内外, 禁止淫泆, 男女絜诚。

夫为寄豭, 杀之无罪, 男秉义程。

妻为逃嫁, 子不得母, 咸化廉清。

大治濯俗, 天下承风, 蒙被休经。

皆遵轨度, 和安敦勉, 莫不顺令。

黔首修絜, 人乐同则, 嘉保太平。

后敬奉法, 常治无极, 舆舟不倾。

从臣诵烈, 请刻此石, 光陲休铭。

注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