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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秦刻石

태산각석

요약

진각석(秦刻石)은 중국의 오래된 비문(碑文)이다. 진시황은 서기 221년 육국을 통일한 후, 수차례 각지로 순시를 나갔다. 군신들은 황제의 공덕을 칭송하며 만대에 그 업적을 남기고자 돌에 글자를 새겼으니 이를 진칠각석(秦七刻石)이라 했다.
진 2세도 기원전 209년에 순시를 나갔는데, 기존의 각석 옆에 자신의 조서를 덧새기도록 하였다. 진 2대의 조서의 전문은 79자이며 글씨체는 칠각석과 같았다. 그것들은 모두 진의 이사가 육국을 통일한 후 보편적으로 유통한 진의 문자인 전서로 쓰여져 전서가 후대에 전수되게 하였다. 진각석은 진시황을 위한 공덕시이다. 개별 문구를 제외하고, 모두 사언 운문으로 되어있다. 대다수가 세 구句에 하나의 압운이지만, “낭야각석”만은 두 구句에 하나의 압운으로 되어있다. 진 2대의 조서는 압운이 없는 글이다. 진각석은 후대의 문학작품과 비지문(碑志文)에 모두 영향을 주었다. [1]

기본개론

진각석은 일반적으로 <<사기·진시황본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진시황은 서기 221년 전 육국을 통일한 후, 수차례 각지로 순시를 나갔다. 군신들은 칭송하며 그 공덕을 기렸고, 돌에 새김으로써 그것을 명시하였다. 이것이 바로 진각석이다. 총 일곱 곳에 있는데, “역산각석(기원전 219년)”, “태산각석(기원전 219년)”, “낭야각석(기원전 219년)”, “지부각석(기원전 218년)”, “동관각석(기원전 218년)”, “갈석각석(기원전 215년)”, 그리고 ”회계각석(기원전 210년)”이다. 따라서 이들을 “진칠각석”, 또는 “진칠비”라고도 부른다.

진시황이 죽은 이후, 진 2대 원년(기원전 209년)에 외부로 순시를 나갔는데, 진시황이 각석을 세운 옆에 대신과 종자의 이름을 새겼다. 그로써 진시황의 공덕을 기렸다. 그리고 조서를 그 옆에 중복해서 새겼다. 진 2대 조서의 전문은 79자로 되어있으며 이는 칠각석과도 같다.

진칠각석의 원석은 대부분이 훼손되어 존재하지 않지만 고증을 통해 진대의 원각자에 속하는, 간신히 남겨진 “태산각석”과 “낭야각석”의 잔석을 발견하였다. 그 중 “태산각석”은 겨우 남은 2대 조서의 10개의 글자가 있어 또한 “태산십자”라고 불리며 그것은 현재 태산 근처의 대묘 안에 있다. “낭야각석”또한 이미 대부분 풍파되었으며 12행 반, 84자만이 겨우 남았다. 이들은 현재 중국역사박물관에 있다. 칠각석의 비석문은 <<사기·진시황본기>>의 6편에 있는데, “역산각석”이 기록되어있으나 비석문은 없다. 각석은 대부분 탁본을 본 떠 세상에 전해졌는데 전해지는 각 탁본의 본문이 <<사기>>에 있는 것과 조금씩 다르다.

진칠각석

역산각석(기원전 219년)

역산각석

본문

皇帝立国, 维初在昔, 嗣世称王。

讨伐乱逆, 威动四极, 武义直方。

戎臣奉诏, 经时不久, 灭六暴强。

廿有六年, 上荐高号, 孝道显明。

既献泰成, 乃降专惠, 亲巡远方。

登于绎山, 群臣从者, 咸思攸长。

追念乱世, 分土建邦, 以开争理。

功战日作, 流血于野, 自泰古始。

世无万数, 陀及五帝, 莫能禁止。

乃今皇帝, 壹家天下, 兵不复起。

灾害灭除, 黔首康定, 利泽长久。

群臣诵略, 刻此乐石, 以箸经纪。

해설

진시황 22년(기원전 219년) 동쪽 군현으로 함양에서 출발해 함곡관, 낙양, 형양을 거쳐 동(東)노추현 역산(지금의 산동 추성시 동남역산)에 이르는 제 2차 순행을 나갔다. 역산의 높이는 5리이며 산정상에는 제 1각석이 세워져있어 "역산각석"이라고 불린다. <<사기·진시황본기>>에 그 이름이 언급되나 원문이 기재되어있지는 않다. 위의 각석문은 남당(南唐)시기 서현 탁본에 근거한다.

태산각석(기원전 219년)

태산각석

본문

皇帝临立, 作制明法, 臣下修饬。

廿有六年, 初并天下, 罔不宾服。

亲巡远黎, 登兹泰山, 周览东极。

从臣思迹, 本原事业, 祗诵功德。

治道运行, 者产得宜, 皆有法式。

大义箸明, 垂于后嗣, 顺承勿革。

皇帝躬听, 既平天下, 不懈于治。

夙兴夜寐, 建设长利, 专隆教诲。

训经宣达, 远近毕理, 咸承圣志。

贵贱分明, 男女礼顺, 慎遵职事。

昭隔内外, 靡不清净, 施于昆嗣。

化及无穷, 遵奉遗诏, 永承重戒。

해설

시황이 추역산을 내려온 뒤 바로 노제 유생들로 하여금 각석에 진의 공덕을 찬양하고 제왕이 태산에 올라가 하늘과 땅에 제사를 올리는 봉찬과 산천을 바라보며 제를 지내는 일에 대해 논하게 하였다. 그 후 곧 태산에 올라 비석을 세우고 사당에서 제사를 지냈다. 내려오는 길에 폭풍우를 만나 나무아래에서 쉬었다. 그리하여 그 나무를 "오대부"에 봉했다. 양부산을 칭송하며 태산에 있는 이 비석을 일컬어 "태산각석"이라고 하였다.

낭야각석(기원전 219년)

낭야각석

본문

维廿八年, 皇帝作始。 端平法度, 万物之纪。

以明人事, 合同父子。 圣智仁义, 显白道理。

东抚东土, 以省卒士。 事已大毕, 乃临于海。

皇帝之功, 勤劳本事。 上农除末, 黔首是富。

普天之下, 抟心揖志。 器械一量, 同书文字。

日月所照, 舟舆所载。 皆终其命, 莫不得意。

应时动事, 是维皇帝。 匡饬异俗, 陵水经地。

忧恤黔首, 朝夕不懈。 除疑定法, 咸知所辟。

方伯分职, 诸治经易。 举错必当, 莫不如画。

皇帝之明, 临察四方。 尊卑贵贱, 不逾次行。

奸邪不容, 皆务贞良。 细大尽力, 莫敢怠荒。

远迩辟隐, 专务肃庄。 端直敦忠, 事业有常。

皇帝之德, 存定四极。 诛乱除害, 兴利致福。

节事以时, 诸产繁殖。 黔首安宁, 不用兵革。

六亲相保, 终无寇贼。 欢欣奉教, 尽知法式。

六合之内, 皇帝之土。 西涉流沙, 南尽北户。

东有东海, 北过大夏。 人迹所至, 无不臣者。

功盖五帝, 泽及牛马。 莫不受德, 各安其宇。

해설

시황이 따르는 신하들과 함께 태산에서 내려와 발해를 따라 동행을 이어 낭야군 낭야현에 도착하였고, 낭야산에 올랐다. 시황제는 이곳을 아주 좋아했고 무려 3개월간 주필(임금이 행차하는 도중에 잠시 머무르거나 숙박하다)했다. 이에 백성들을 삼천가구 가량 강제 이주시키며, 그들의 부역을 면제하고 십이년간 낭야대를 짓게했다. 낭야대는 도합 3층이며, 3면이 바다와 접한다. 이에 이 곳의 각석을 "낭야각석"이라 칭했다.

지부각석(기원전 218년)

지부각석

본문

维廿九年, 时在中春, 阳和方起。

皇帝东游, 巡登之罘, 照临于海。

从臣嘉观, 原念休烈, 追诵本始。

大圣作治, 建定法度, 显著纲纪。

外教诸侯, 光施文惠, 明以义理。

六国回辟, 贪戾无厌, 虐杀不已。

皇帝哀众, 遂发讨师, 奋扬武德。

义诛信行, 威燀旁达, 莫不宾服。

烹灭强暴, 振救黔首, 周定四极。

普施明法, 经纬天下, 永为仪则。

大矣哉, 宇县之中, 承顺圣意。群臣诵功, 请刻于石。表垂于常式。

해설

진시황년간 29년(기원전 218년) 봄 제 2번째 월에 제 3차 동쪽 순행을 나갔다. 노선은 제 2차 순행 때와 동일했다. 제와 노(지금의 산동지역)지역을 지나 양무 박랑사에 다다랐을 때, 이전에 그곳에 매복해있었던 장양과 그에게 고용된 용병들의 기습을 당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실수로 두번째 수레를 공격해버려, 진시황에게 해를 입히지 못했다. 진시황은 무사히 지부까지 이르렀으며, 지부산에 올라 비석을 세웠는데 이를 "지부각석"이라고 한다.

동관각석(기원전 218년)

동관각석

본문

皇帝建国, 德并诸侯, 初平泰壹。

卅有二年, 巡登碣石, 照临四极。

从臣群作, 上颂高号。 爰念休烈,

戎臣奋威, 遂兴师旅, 大逆灭息。

武殄暴强, 文复无罪, 庶心咸服。

惠论功劳, 恩肥土域, 赏及牛马。

堕坏城郭, 决通川防, 夷去险阻。

地势既定, 黔首无繇, 天下咸抚。

男乐其畴, 女修其业, 事各有序。

惠被诸产, 久并来田, 莫不安所。

群臣诵略, 请刻此石, 垂箸仪矩。

해설

지부각석을 세운 후, 시황은 지부섬부터 동쪽으로 동관까지 순행을이었으며 비석을 하나 더 새겼다. 이를 "동관각석"이라고한다. 또한 "지부 동관 각석"이라고도 한다. "지부각석"과 "동관각석"은 한대에 이르러 "지부이비(之罘二碑)"라고 불렸다.

갈석각석(기원전 215년)

갈석각석

본문

皇帝建国, 德并诸侯, 初平泰壹。

卅有二年, 巡登碣石, 照临四极。

从臣群作, 上颂高号。 爰念休烈,

戎臣奋威, 遂兴师旅, 大逆灭息。

武殄暴强, 文复无罪, 庶心咸服。

惠论功劳, 恩肥土域, 赏及牛马。

堕坏城郭, 决通川防, 夷去险阻。

地势既定, 黔首无繇, 天下咸抚。

男乐其畴, 女修其业, 事各有序。

惠被诸产, 久并来田, 莫不安所。

群臣诵略, 请刻此石, 垂箸仪矩。

해설

진시황 32년(기원전 215년) 제 4차 순행을 나서게 된다. 목적지는 갈석과 동쪽 변방 지역이었다. 갈석에 이르러 시황은 그곳에서 주필한다. 연나라 사람 루생(卢生)과 한나라 점쟁이 한종, 석생, 후공으로 하여금 신선(선인) 흠문과 고맹의 불사약을 구하게하였다. 이에 갈석문에 새긴 것을 "갈석각석"이라고 하였다.

회계각석(기원전 210년)

회계각석

본문

皇帝休烈, 平一宇内, 德惠攸长。

卅有七年, 亲巡天下, 周览远方。

遂登会稽, 宣省习俗, 黔首齐庄。

群臣诵功, 本原事迹, 追道高明。

秦圣临国, 始定刑名, 显陈旧章。

初平法式, 审别职任, 以立恒常。

六王专倍, 贪戾慠猛, 率众自强。

暴虐恣行, 负力而骄, 数动甲兵。

阴通间使, 以事合从, 行为辟方。

内饰诈谋, 外来侵边, 遂起祸殃。

义威诛之, 殄息暴悖, 乱贼灭亡。

圣德广密, 六合之中, 被泽无疆。

皇帝并宇, 兼听万事, 远近毕清。

运理群物, 考验事实, 各载其名。

贵贱并通, 善否陈前, 靡有隐情。

饰省宣义, 有子而嫁, 倍死不贞。

防隔内外, 禁止淫泆, 男女絜诚。

夫为寄豭, 杀之无罪, 男秉义程。

妻为逃嫁, 子不得母, 咸化廉清。

大治濯俗, 天下承风, 蒙被休经。

皆遵轨度, 和安敦勉, 莫不顺令。

黔首修絜, 人乐同则, 嘉保太平。

后敬奉法, 常治无极, 舆舟不倾。

从臣诵烈, 请刻此石, 光陲休铭。

해설

진시황 37년(기원전 210년) 제 5차 순행을 나섰다. 한편으로는 승상 이사가 따르고 한편으로는 승상을 보내 수도를 지키게했다. 조나라의 고관들이 가까이 모셨으며, 태자 호해가 따르기를 청했고 시황은 이를 허했다. 함양으로부터 출발하여 무관(지금의 섬서성 낙현 서남단 강의 북쪽 연안)을 나가, 단수 및 한수를 따라 운몽(지금의 호북성 경내)에 이르렀다. 또 강의 동쪽 하부를 따라가 구의산을 바라보며 제사를 지냈다. 강을 표류하다 작은 섬으로 건너가 단양을 지난 뒤 전당에 닿아 절강과 밀접한 곳에서 사나운 물결을 헤치고 백이십리의 좁은 곳을 건넜다. 회계산(지금의 절강성 소흥시 동남쪽)에 올라, 우임금에게 제를 지내고 남해(지금의 동남해)를 바라보며 제를 지냈다. 이 때 새긴 각석을 "회계각석"이라고 한다.

<<사기·진시황본기>>

원문

二十八年,始皇东行郡县,上邹峄山。立石,与鲁诸儒生议,刻石颂秦德,议封禅望祭山川之事。乃遂上泰山,立石,封,祠祀。下,风雨暴至,休於树下,因封其树为五大夫。禅梁父。刻所立石,其辞曰:

皇帝临位,作制明法,臣下脩饬。二十有六年,初并天下,罔不宾服。亲巡远方黎民,登兹泰山,周览东极。从臣思迹,本原事业,祗诵功德。治道运行,诸产得宜,皆有法式。大义休明,垂于後世,顺承勿革。皇帝躬圣,既平天下,不懈於治。夙兴夜寐,建设长利,专隆教诲。训经宣达,远近毕理,咸承圣志。贵贱分明,男女礼顺,慎遵职事。昭隔内外,靡不清净,施于後嗣。化及无穷,遵奉遗诏,永承重戒。

於是乃并勃海以东,过黄、腄,穷成山,登之罘,立石颂秦德焉而去。

南登琅邪,大乐之,留三月。乃徙黔首三万户琅邪台下,复十二岁。作琅邪台,立石刻,颂秦德,明得意。曰:维二十八年,皇帝作始。端平法度,万物之纪。以明人事,合同父子。圣智仁义,显白道理。东抚东土,以省卒士。事已大毕,乃临于海。皇帝之功,劝劳本事。上农除末,黔首是富。普天之下,抟心揖志。器械一量,同书文字。日月所照,舟舆所载。皆终其命,莫不得意。应时动事,是维皇帝。匡饬异俗,陵水经地。忧恤黔首,朝夕不懈。除疑定法,咸知所辟。方伯分职,诸治经易。举错必当,莫不如画。皇帝之明,临察四方。尊卑贵贱,不逾次行。奸邪不容,皆务贞良。细大尽力,莫敢怠荒。远迩辟隐,专务肃庄。端直敦忠,事业有常。皇帝之德,存定四极。诛乱除害,兴利致福。节事以时,诸产繁殖。黔首安宁,不用兵革。六亲相保,终无寇贼。驩欣奉教,尽知法式。六合之内,皇帝之土。西涉流沙,南尽北户。东有东海,北过大夏。人迹所至,无不臣者。功盖五帝,泽及牛马。莫不受德,各安其宇。

维秦王兼有天下,立名为皇帝,乃抚东土,至于琅邪。列侯武城侯王离、列侯通武侯王贲、伦侯建成侯赵亥、伦侯昌武侯成、伦侯武信侯冯毋择、丞相隗林、丞相王绾、卿李斯、卿王戊、五大夫赵婴、五大夫杨樛从,与议於海上。曰:“古之帝者,地不过千里,诸侯各守其封域,或朝或否,相侵暴乱,残伐不止,犹刻金石,以自为纪。古之五帝三王,知教不同,法度不明,假威鬼神,以欺远方,实不称名,故不久长。其身未殁,诸侯倍叛,法令不行。今皇帝并一海内,以为郡县,天下和平。昭明宗庙,体道行德,尊号大成。群臣相与诵皇帝功德,刻于金石,以为表经。”

既已,齐人徐市等上书,言海中有三神山,名曰蓬莱、方丈、瀛洲,仙人居之。请得斋戒,与童男女求之。於是遣徐市发童男女数千人,入海求仙人。

始皇还,过彭城,斋戒祷祠,欲出周鼎泗水。使千人没水求之,弗得。乃西南渡淮水,之衡山、南郡。浮江,至湘山祠。逢大风,几不得渡。上问博士曰:“湘君神?”博士对曰:“闻之,尧女,舜之妻,而葬此。”於是始皇大怒,使刑徒三千人皆伐湘山树,赭其山。上自南郡由武关归。

二十九年,始皇东游。至阳武博狼沙中,为盗所惊。求弗得,乃令天下大索十日。

登之罘,刻石。其辞曰:

维二十九年,时在中春,阳和方起。皇帝东游,巡登之罘,临照于海。从臣嘉观,原念休烈,追诵本始。大圣作治,建定法度,显箸纲纪。外教诸侯,光施文惠,明以义理。六国回辟,贪戾无厌,虐杀不已。皇帝哀众,遂发讨师,奋扬武德。义诛信行,威燀旁达,莫不宾服。烹灭彊暴,振救黔首,周定四极。普施明法,经纬天下,永为仪则。大矣哉!宇县之中,承顺圣意。群臣诵功,请刻于石,表垂于常式。其东观曰:

维二十九年,皇帝春游,览省远方。逮于海隅,遂登之罘,昭临朝阳。观望广丽,从臣咸念,原道至明。圣法初兴,清理疆内,外诛暴彊。武威旁畅,振动四极,禽灭六王。阐并天下,甾害绝息,永偃戎兵。皇帝明德,经理宇内,视听不怠。作立大义,昭设备器,咸有章旗。职臣遵分,各知所行,事无嫌疑。黔首改化,远迩同度,临古绝尤。常职既定,後嗣循业,长承圣治。群臣嘉德,祗诵圣烈,请刻之罘。旋,遂之琅邪,道上党入。

(중략)

二世与赵高谋曰:“朕年少,初即位,黔首未集附。先帝巡行郡县,以示强,威服海内。今晏然不巡行,即见弱,毋以臣畜天下。”春,二世东行郡县,李斯从。到碣石,并海,南至会稽,而尽刻始皇所立刻石,石旁着大臣从者名,以章先帝成功盛德焉。

皇帝曰:“金石刻尽始皇帝所为也。今袭号而金石刻辞不称始皇帝,其于久远也如后嗣为之者,不称成功盛德。”丞相臣斯、臣去疾、御史大夫臣德昧死言:“臣请具刻诏书刻石,因明白矣。臣昧死请。”制曰:“可。”遂至辽东而还。[2]

해설

진시황 제2차 순행도(219). 태산과 역산, 낭야 및 지부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진시황제는 즉위한지 28년, 기원전 219년부터 총 다섯 차례에 걸쳐 전국을 순시했으며 명산을 찾을 때 마다 진제국의 위대함과 자신의 영명함을 찬송하며 비석을 세웠다. 순서대로 태산, 낭야, 지부, 동관, 갈석, 회계 각석비가 그것이다. 진시황제 각석문은 이사의 솜씨로 전해지는데, 기세등등하고 자신만만한 내용이 대부분 넉 자 구절로 단단하게 구성되어있다. 회계는 지금의 절강성 소흥시 남쪽.[3]

의의

비문이 무성히 숲을 이룬 대묘 안에서 가장 귀하고 가치가 있는 것은 진대의 이사가 쓴 소전이다. 그것은 기원전 209년에 새겨졌으며, 비록 숱한 세월을 겪었으나 우아한 자태는 변함이 없다.
이사소전에 대한 평가는 줄곧 높았다. 루쉰은 “汉晋碑铭所从出”라고 칭송했으며, 보배로 일컬어졌다. 그 힘은 마치 규룡이 날며 요동하는 것과 같으며, 그 수려함은 마치 물 위에 떠오르는 부용(연꽃)같다. 그 예술적인 매력을 보기에는 충분하다. 전세계적으로 주목을 받는 탓에 귀중품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그 비범한 경력으로 인해 시선을 끌고 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이 비석은 진승상 이사가 진 2세 호해의 명으로 새긴 것이다. 대정 옥녀못(岱顶玉女池)위에 세움으로써 그 공덕과 은덕을 찬양했다.
각석 또한 서예계에서는 이렇듯 칭송받는 이사가 새긴 전서체 명문으로 유명하다.
역사적, 문자학적 의의로는 "진의 이사가 육국을 통일한 후 보편적으로 유통한 진의 문자, 전서로 쓰여짐으로써 전서를 후대에 전수했다."는 의의가 있다. 갑골문, 금문, 각석은 기록된 내용보다 기록된 매체의 신성함과 영속성을 강조한 것이다. 각석은 자연의 일부인 암석이나, 자연을 배경으로 서있는 비석에 글자를 새겨 영원성을 더욱 강조했다.



  1. baidu "秦刻石" [2]
  2. baidu "秦始皇本纪"[1]
  3. 사마천 원저, 이인호 새로씀, <사기본기>, (주)사회평론, 2004, p.179-1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