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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두 백과사전‘官僚资本主义’항목에 의하면, 관료자본주의의 필요충분조건으로 다음의 5가지 조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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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두 백과사전‘官僚资本主义’항목에 의하면, 관료자본주의의 필요충분조건으로 다음의 5가지 조건이 있다.<ref>바이두 백과사전 ‘官僚资本主义’ 항목.</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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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을 통해 얻은 자본은 보통 다시 만들어질 수 없는 희소 자원이며, 이러한 행위의 목표는 한정적이거나 독점적인 상업의 진출 허가를 받는 것이다. 따라서 [[시장 경쟁]]은 관료자본주의의 천성적인 적이다.
 
권력을 통해 얻은 자본은 보통 다시 만들어질 수 없는 희소 자원이며, 이러한 행위의 목표는 한정적이거나 독점적인 상업의 진출 허가를 받는 것이다. 따라서 [[시장 경쟁]]은 관료자본주의의 천성적인 적이다.
 
  
 
==공산주의 국가 중국에서의 관료자본주의==
 
==공산주의 국가 중국에서의 관료자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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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특구에서의 활동====
 
====경제특구에서의 활동====
  
공산당 간부들의 자녀들은 특히 개혁 개방 시 지정된 [[경제 특구]]와 해안도시에서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외국 자본과 중국 시장을 이어주는 매판의 역할을 수행하며 그 과정에서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이들은 곧 1980년대 말 부정부패의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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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 간부들의 자녀들은 특히 개혁 개방 시 지정된 [[경제특구]]와 해안도시에서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외국 자본과 중국 시장을 이어주는 매판의 역할을 수행하며 그 과정에서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이들은 곧 1980년대 말 부정부패의 상징이 되었다.
경제특구의 개방 도시 중 하나인 [[산터우시]]는 대만, 홍콩과 가깝다는 지리적 특성에도 불구하고 다른 개방 도시들에 비해 외국 자본과 산업이 부족했던 곳이었다. 그러나 부정부패로 인해 중국의 대표적인 밀수항으로 변모한 이후, 산터우시는 크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밤이 되면 상공엔 헬리콥터와 항공기가 날아다니고 해상엔 구축함이 다니는 등 산터우시를 중심으로 밀수 작전을 벌어졌으며, 그 내부엔 [[대만]]과 [[홍콩]] 등 전 세계에서 들여온 밀수품들이 가득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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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특구의 개방 도시 중 하나인 [[산터우시]]는 대만, 홍콩과 가깝다는 지리적 특성에도 불구하고 다른 개방 도시들에 비해 외국 자본과 산업이 부족했던 곳이었다. 그러나 부정부패로 인해 중국의 대표적인 밀수항으로 변모한 이후, 산터우시는 크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밤이 되면 상공엔 헬리콥터와 항공기가 날아다니고 해상엔 구축함이 다니는 등 산터우시를 중심으로 밀수 작전을 벌어졌으며, 그 내부엔 [[대만]]과 [[홍콩]] 등 전 세계에서 들여온 밀수품들이 가득했다고 한다.<ref>최재선 지음, 『불멸의 이노베이터 덩샤오핑』, 청림출판사.</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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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분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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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의 비약적인 경제성장으로 인해 농촌에서의 당과 국가의 권위는 쇠퇴했다. 이는 자발적인 시장체제를 위해 중앙 정부의 역할을 축소시키는 대신, 지방의 결정권을 확대했기 때문이다. 특히 지방 관료와 상인의 결탁은 지방 분권화를 더욱 가속시켰는데, 그들은 때때로 중앙 정부의 지시가 자신들과의 이해관계와 맞지 않으면 그것을 무시하거나 저항하기도 했다. 중앙 정부가 부패와 노동착취, 과다징수에 대해 금지시켜도 이는 소용없는 일이었다. 결국 관료와 기업 간의 동맹은 중앙 정부의 권위를 더욱 약화시키며 관료자본주의를 부추겼다. 한편, [[자오쯔양]]의 [[연해전략]]은 남부 해안 지대와 양쯔 강 델타에서 지방 분권화를 심화시키며 동시에 중국의 관료자본주의를 더욱 부추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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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의 비약적인 경제성장으로 인해 농촌에서의 [[당]]과 국가의 권위는 쇠퇴했다. 이는 자발적인 시장체제를 위해 중앙 정부의 역할을 축소시키는 대신, 지방의 결정권을 확대했기 때문이다. 특히 지방 관료와 상인의 결탁은 지방 분권화를 더욱 가속시켰는데, 그들은 때때로 중앙 정부의 지시가 자신들과의 이해관계와 맞지 않으면 그것을 무시하거나 저항하기도 했다. 중앙 정부가 부패와 노동착취, 과다징수에 대해 금지시켜도 이는 소용없는 일이었다. 결국 관료와 기업 간의 동맹은 중앙 정부의 권위를 더욱 약화시키며 관료자본주의를 부추겼다. 한편, [[자오쯔양]]의 [[연해전략]]은 남부 해안 지대와 양쯔 강 델타에서 지방 분권화를 심화시키며 동시에 중국의 관료자본주의를 더욱 부추겼다.
  
 
====정치개혁의 부재====
 
====정치개혁의 부재====
  
중국은 경제개혁 후의 경제적 역동성을 받아들이기에 마땅한 [[정치개혁]]을 실행하지 않았다. 이렇듯 경제개혁으로 인해 나타난 각종 부작용을 규제할 수 있는 충분한 법규의 부재는 중국에 부패와 불평등, 지역 격차 등의 문제를 불러왔다. [[후야오방]] 해임 후 새롭게 당 총서기 자리에 오른 자오쯔양은 공정한 관료제를 위한 몇 가지 정치개혁을 실시한다. 그 중 하나인 [[행정소송법]]은 1989년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승인되어 1990년 10월부터 시행된 법으로, 이를 통해 일반 대중에게 독단적인 관료에 대해 소송을 걸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여 부패의 만연을 줄이고자 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이러한 노력에도 행정소송법은 큰 효과를 보여주지 못했다. 행정소송법을 비롯해 부패를 막기 위한 법률들은 모두 법을 강제하는 제도와 강력한 중앙정부, 독립적인 사법기구가 결여된 체제 내에서 시행되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법을 집행하는 관료조차도 부패에 관련된 경우가 아주 많았고, 이는 오히려 당과 국가의 권위를 약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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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경제개혁 후의 경제적 역동성을 받아들이기에 마땅한 [[정치개혁]]을 실행하지 않았다. 이렇듯 경제개혁으로 인해 나타난 각종 부작용을 규제할 수 있는 충분한 법규의 부재는 중국에 부패와 불평등, 지역 격차 등의 문제를 불러왔다. [[후야오방]] 해임 후 새롭게 당 총서기 자리에 오른 자오쯔양은 공정한 관료제를 위한 몇 가지 정치개혁을 실시한다. 그 중 하나인 [[행정소송법]]은 1989년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승인되어 1990년 10월부터 시행된 법으로, 이를 통해 일반 대중에게 독단적인 관료에 대해 소송을 걸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여 부패의 만연을 줄이고자 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이러한 노력에도 행정소송법은 큰 효과를 보여주지 못했다. 행정소송법을 비롯해 부패를 막기 위한 법률들은 모두 법을 강제하는 제도와 강력한 중앙정부, 독립적인 사법기구가 결여된 체제 내에서 시행되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법을 집행하는 관료조차도 부패에 관련된 경우가 아주 많았고, 이는 오히려 당과 국가의 권위를 약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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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관료주의의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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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료자본주의의 결과===
  
 
====고속성장의 기반====
 
====고속성장의 기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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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의 비판====
 
====좌파의 비판====
  
중국의 사회주의 발전에 있어 좌파는 시장개혁 노선에 관해 당이 갖고 있는 우편향적이며 시장만능주의적 시각을 비판하였다. 이와 더불어 중국사회주의의 관료자본주의를 비판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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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사회주의]] 발전에 있어 좌파는 시장개혁 노선에 관해 당이 갖고 있는 우편향적이며 시장만능주의적 시각을 비판하였다. 이와 더불어 중국사회주의의 관료자본주의를 비판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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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중국===
 
===현재의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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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중국정치협상회의]]에서 칭화대 인문사회과학학원 차이지밍 위원은 중국 인구의 0.4%가 전체 부의 70%를 소유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통계자료====
 
====통계자료====
  
 
국제투명성기구(Transparency International)가 발표한 2014년 기준 세계부정부패 현황에 따르면 중국은 다소 높은 부정부패지수를 보여준다.
 
국제투명성기구(Transparency International)가 발표한 2014년 기준 세계부정부패 현황에 따르면 중국은 다소 높은 부정부패지수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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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text-align:right; width:auto; margin-left:auto; margin-right:auto;"><u>왼쪽 하단의 수치가 높을수록 부정부패지수가 낮음.</u></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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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왼쪽 하단의 수치가 높을수록 부정부패지수가 낮음.</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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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투명성기구(TI)가 발표한 2017년 부패인식조사에 따르면, 중국은 최근 부패가 늘어났다고 인식하는 사람이 가장 많은 국가였으며, 기본 서비스를 이용할 때 뇌물을 준 적이 있다고 응답한 사람의 비율이 26%로, 한국(3%)과 일본(0.2%)에 비해 높은 응답 비율을 보여준다.<ref>국민권익위원회, 「중국의 반부패 동향」(2018년 4월호), http://acrc.go.kr/acrc/briefs/201804/sub6.html.</ref>
  
 
====우려의 목소리====
 
====우려의 목소리====
  
현재 중국 GDP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부유층은 당의 기득권층으로, 그들의 정치적·경제적인 특권은 당 주도형 경제성장 방식에서 보장받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성장 발전 모델로의 전환에 쉽사리 찬성하지 않는다. 특히나 [[6·4 사태]] 이후 국가와 밀접한 관계를 맺는 것이 그들에게 경제적으로 유리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 그들은 당에 반하는 정치적 요구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중국의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서는 경제개혁과 더불어 정치개혁도 실시되어야 한다. 현재의 중국은 과거와 같이 고속성장을 바라기엔 현실적인 무리가 있다.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발전을 위해서 사회보장 제도 등의 정치 개혁과 새로운 성장 방식 모델을 모색해야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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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중국 GDP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부유층은 당의 기득권층으로, 그들의 정치적·경제적인 특권은 당 주도형 경제성장 방식에서 보장받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성장 발전 모델로의 전환에 쉽사리 찬성하지 않는다. 특히나 [[1989천안문사건]] 이후 국가와 밀접한 관계를 맺는 것이 그들에게 경제적으로 유리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 그들은 당에 반하는 정치적 요구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중국의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서는 경제개혁과 더불어 정치개혁도 실시되어야 한다. 현재의 중국은 과거와 같이 고속성장을 바라기엔 현실적인 무리가 있다.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발전을 위해서 사회보장 제도 등의 정치 개혁과 새로운 성장 방식 모델을 모색해야할 필요가 있다.
{{인용문|중국의 개혁은 전기를 맞고 있다. 중국이 ‘관료 자본주의’의 두꺼운 껍질을 벗어버리지 못하는 한 진정한 ‘발전모델의 전환’을 이루기는 어려울 것이다. 중국 경제는 성장기에 있으나, 여전히 지속가능한 바람직한 발전모델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통일한국』 (2012년 4월 통권 34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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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중국의 개혁은 전기를 맞고 있다. 중국이 ‘관료 자본주의’의 두꺼운 껍질을 벗어버리지 못하는 한 진정한 ‘발전모델의 전환’을 이루기는 어려울 것이다. 중국 경제는 성장기에 있으나, 여전히 지속가능한 바람직한 발전모델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통일한국』 (2012년 4월 통권 34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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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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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老虎和蒼蠅打一起(호랑이와 파리를 함께 때려잡겠다.)|시진핑(2013년 1월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전체회의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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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은 2012년 [[중국공산당]] 총서기로 집권하자마자 ‘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시진핑은 2012년 제 18차 당대회 개막식에서 ‘부정부패를 다스리지 못하면 국가와 공산당이 함께 망할 수 있다’며 부정부패 척결 의지를 보였다. 시진핑을 포함한 상무위원 7명이 재산 신고를 했으며, 2013년 12월에는 부패척결 5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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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의 부패척결 소식에 중국 국민들은 기대를 보였다. 2012년 11월 25일 [[《중국청년보》]]는 전국 31개 성급도시 1만 219명 네티즌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했는데, 약 77.8%가 시진핑 부패척결에 대해 매우 큰 기대를 걸고 있다는 결과를 발표했다.<ref>김남성, 「[시진핑 시대의 중국] 중국의 ‘부패’ 해결할까」, 월간조선(2013년 3월호), https://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D&nNewsNumb=201303100028&page=10.</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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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일각에서는 시진핑 주석이 자신의 정치적 권력을 위해 숙적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부정부패 척결을 이용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저우융캉]] 구속사건을 두고 시진핑이 장쩌민계를 저격했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또한 시진핑 일가의 재산이 재벌급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시진핑의 친인척들에게서도 부정부패 혐의 의혹이 나왔다. 독점자본을 능가하는 천문학적인 자금을 축적에 분명 뇌물과 비리가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ref>「시진핑도 뜨끔한 중국의 부정부패」, 2016년 5월 13일, http://jajusibo.com/27529(2019년 6월 23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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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망]]과 [[CCTV]] 보도에 따르면. 2017년 9월 17일 기준으로 시진핑 집권 출범 후 부정부패로 처벌당한 공산당은 119만여 명이다. 여기엔 저우융캉, [[보시라이]], [[궈보슝]], [[쉬차이허우]], [[링지화]]와 같은 정치국원급 이상의 공산당원들도 포함되었다. 이들은 부정부패로 낙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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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무위원 저우융캉은 2015년 그의 부인과 아들, 측근 등이 약 232억 원에 달하는 뇌물을 받은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최종 판결에서 16년으로 감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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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라이 전 충칭시 당서기는 1500명의 부패사범을 적발하는 등 부정부패 척결에 앞장서며 인기를 끌었지만, 보시라이 역시 불법 자금을 조성하고 100명이 넘는 내연녀를 두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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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장중성 전 뤼량시 부시장이 부정부패 혐의로 사형 판결을 받았다. 장중성은 탄광 인허가권을 빌미로 약 1억 774억원에 상당하는 10억 4만 위안의 뇌물을 받았다. 산시성 린펀시 중급인민법원은 그의 정치권리를 박탈하고, 개인 재산을 전부 몰수하도록 했다. 이번 조사에서 장중성 전 부시장은 2003년 부임한 후 탄광업자 사업 승인을 대가로 지속적인 뇌물을 받아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법원은 뇌물 액이 크고, 약 100억 위안에 달하는 재산의 출처를 명확히 밝히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에게 사형 판결을 내렸다.<ref>「'1천700억대 뇌물' 中 부패간부, 시진핑 집권후 첫 사형판결」, 2018년 3월 28일, https://www.yna.co.kr/view/AKR20180328162800083(2019년 6월 23일).</ref>
  
 
==참고문헌==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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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오승렬 저, 『통일한국』 (2012년 4월 통권 340호), 평화문제연구소.
 
7. 오승렬 저, 『통일한국』 (2012년 4월 통권 340호), 평화문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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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국민권익위원회, 「중국의 반부패 동향」(2018년 4월호), http://acrc.go.kr/acrc/briefs/201804/sub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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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김남성, 「[시진핑 시대의 중국] 중국의 ‘부패’ 해결할까」, 월간조선(2013년 3월호), https://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D&nNewsNumb=201303100028&page=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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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1천700억대 뇌물' 中 부패간부, 시진핑 집권후 첫 사형판결」, 2018년 3월 28일, https://www.yna.co.kr/view/AKR20180328162800083(2019년 6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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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시진핑 5년, 부정부패 처벌 공산당 119만명”」, 2017년 9월 18일, https://www.edaily.co.kr/news/read?newsId=01357926616061432&mediaCodeNo=257(2019년 6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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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시진핑도 뜨끔한 중국의 부정부패」, 2016년 5월 13일, http://jajusibo.com/27529(2019년 6월 23일).

2019년 6월 23일 (일) 11:29 기준 최신판

관료자본주의란

<중문명> 官僚资本主义

<영문명> Crony capitalism

정의

관료자본주의는 경제체제 중 하나로, 상업의 성공여부가 기업과 정부관료 사이의 관계가 밀접한가에 달려있는 상태를 말한다.
관료자본주의는 국가 권력과 재산의 사적 소유제가 결합하여 자신의 능력 밖의 사적인 재산을 창출하는 것을 추구한다. 이러한 정치상의 편파적인 상황은 친인척 등용 등에 의해서 나타나며 법률 허가와 자원 분배, 정부 보조나 세제 혜택 등에서 유리하기 때문에 공공 서비스 형태의 경제와 정치 이상을 망가뜨린다.
대부분의 국가에는 심각한 관료자본주의가 존재하고 있다.



조건

바이두 백과사전‘官僚资本主义’항목에 의하면, 관료자본주의의 필요충분조건으로 다음의 5가지 조건이 있다.[1]


1. 재산의 사적 소유제

만약 사적 소유 제도가 없다면, 권력을 이용해 경제적 이득을 취할 동기와 기반은 없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사유제도가 없는 관료자본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2. 고도집권

정부 관료는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비교적 쉽게 법률이나 법규에 접근할 수 있어 특정한 자본과 자원을 차지할 수 있다.

3. 정치적 후진성

민주주의가 없거나, 설령 민주주의와 언론의 자유가 있다 하더라도, 경제가 낙후되었다면 시민의식이 성숙하지 못하여 민주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따라서 분권 감독 체제가 생기지 못한다.

4. 고의로 비경제적 수단으로 경제적 이득을 얻음

유휴자본과 권력을 이용해 경제적 이득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을 가졌으며, 이를 통해 고의적인 발전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5. 권력을 통해 얻은 자본

권력을 통해 얻은 자본은 보통 다시 만들어질 수 없는 희소 자원이며, 이러한 행위의 목표는 한정적이거나 독점적인 상업의 진출 허가를 받는 것이다. 따라서 시장 경쟁은 관료자본주의의 천성적인 적이다.

공산주의 국가 중국에서의 관료자본주의

새로운 부르주아지의 탄생

관료자본주의는 다수의 국가에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듯이, 중국역사에서도 자주 나타난 현상이었다. 그러나 부르주아지의 사적 재산을 몰수하여 계급혁명을 이룬 공산주의 중국에서의 관료자본주의는 보통의 것과 다른 특징을 보인다. 개혁개방 후 중국은 새로운 시장정책이 요구하는 부르주아지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계급이 필요했다. 그러나 중국의 부르주아지는 그동안 재산이 국가에 흡수되었으며, 사회적으로 탄압받아야 할 존재였기 때문에 그 명맥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을 뿐, 시장에서 부르주아지 역할을 수행하기엔 그 힘이 충분하지 못했다. 따라서 새로운 부르주아지 계급을 창출하는 것은 중국 공산당의 일이었으며, 이러한 역할에 가장 적절한 후보로 공산당 관료기구의 간부들이 채택되었다. 개혁 개방 초반, 다수의 관료들은 이러한 사실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덩샤오핑의 새로운 시장정책은 지금까지 그들이 갖고 있던 사회주의적 가치와 상반되기 때문이었다. 또한 경제적 권리를 개인에게 이양하면, 오히려 자신들의 권력에게 위협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공산당의 지시를 충실히 수행한 간부들은 자신의 지위와 권력이 새로운 시장이 가져다주는 경제적 기회에 유리함을 알게 되었다. 이후 공산당 관료들과 그들과 가까운 관계에 있는 친척, 자녀들은 새로운 중국의 부르주아지 역할을 수행하며 중국 내 관료자본주의를 형성했다.

경제특구에서의 활동

공산당 간부들의 자녀들은 특히 개혁 개방 시 지정된 경제특구와 해안도시에서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외국 자본과 중국 시장을 이어주는 매판의 역할을 수행하며 그 과정에서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이들은 곧 1980년대 말 부정부패의 상징이 되었다. 경제특구의 개방 도시 중 하나인 산터우시는 대만, 홍콩과 가깝다는 지리적 특성에도 불구하고 다른 개방 도시들에 비해 외국 자본과 산업이 부족했던 곳이었다. 그러나 부정부패로 인해 중국의 대표적인 밀수항으로 변모한 이후, 산터우시는 크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밤이 되면 상공엔 헬리콥터와 항공기가 날아다니고 해상엔 구축함이 다니는 등 산터우시를 중심으로 밀수 작전을 벌어졌으며, 그 내부엔 대만홍콩 등 전 세계에서 들여온 밀수품들이 가득했다고 한다.[2]

농촌부르주아지

농촌 인민공사가 해체되고, 도급경영책임제가 새로이 수립되면서 지방 관료들은 농촌 사업과 토지 사유에 있어 유리한 자신들의 권위를 이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농촌에서 가장 좋은 토지와 큰 수익을 낼 수 있는 사업 운영 권리를 그들과 가까운 친척과 지인들에게 넘겨주었다. 지방 관료와 그들의 친척, 친구들은 곧 새로운 농촌부르주아지 계급을 형성했다. 또한 그들은 농촌 향진기업의 우두머리들과 협력하여 집단기업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집단기업의 경우 사영기업보다 토지나 시장에서의 기회 획득, 대출 등에 있어 지방정부의 도움을 받는 데 보다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기업 운영과 자금조달에 있어 궁극적인 통제권을 가진 지방 관료는 이러한 상인과의 결탁으로 많은 부를 창출할 수 있었다.

도시부르주아지

1980년대 시행된 정부의 시장개혁 중 하나인 가격개혁은 도시 관료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도시 관료들은 가격개혁 속에서 시장메커니즘을 조작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막대한 부를 얻었다. 그들은 최대한 낮은 가격으로 구매한 재화를 몇 배나 높은 가격으로 자유시장에 팔았다. 도시 건설이 계속됨에 따라 그들은 농민의 농지를 반강제로 매수하여 높은 가격으로 부동산 업자나 기업에 되팔기도 하였다. 이는 토지가 국가 소유제임을 이용하여 농민에게 언제든지 토지를 빼앗을 수 있기 때문이었는데, 이외에도 도시에서의 이러한 관료자본주의는 점점 확대되었다. 1984년 자영업을 장려하는 정부 정책 역시 도시 관료의 부정부패를 촉진하였다. 도시 관료들은 그들의 친척이나 친구가 운영하는 사업을 후원하였다. 이 때의 후원금은 그동안의 부정축재로 쌓은 것으로, 이들의 후원은 사업에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1990년대 들어 도시 관료들 스스로 자본가가 되어 사업에 뛰어드는 일이 만연해진다.

인민해방군의 활동

인민해방군 또한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이용하여 각종 사업을 벌였다. 특히 덩샤오핑이 1984년 군대의 규모와 예산을 4분의 1로 삭감하자, 그들은 자신들의 자금을 시장경제를 통해 확보해야 했다. 인민해방군은 군대의 공장을 개조했다. 그들은 무기 제조, 수출 이외에도 수익성 높은 사업을 약 2만 개 이상 운영하고 있으며 국제무역과 금융업계에도 큰 영향력을 갖고 있다.



중국 관료자본주의 특징

공산주의 국가 중국에서의 관료자본주의의 특징은 관료자본주의가 당 간부와 관료기구 전체가 그동안 비어있던 중국의 부르주아지 역할을 대신한데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1989년 민주화 운동은 이러한 중국 내 관료자본주의 특징과 관련 있다. 보통 민주주의는 자유시장 속의 독립적인 부르주아지 계급이 기존 질서에 대항하여 그들에게 유리한 새로운 정치질서를 요구하면서 형성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중국의 부르주아지 계급은 자신들의 정체성과 권력이 기존의 정치질서에 있기 때문에 정부에 의존한다. 설령 관료층에서 나오지 않은 부르주아지이더라도, 그들은 자신의 부를 증진시키기 위해 관료들에게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중국의 민주화 요구는 부르주아지 계급이 아닌 관료자본주의의 희생자인 대중으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었다. 결국 20세기 중국은 관료자본주의로 서구적 형태의 시민사회로 발전하지 못했다.



관료자본주의를 부추긴 요소들

지방 분권화

1980년대의 비약적인 경제성장으로 인해 농촌에서의 과 국가의 권위는 쇠퇴했다. 이는 자발적인 시장체제를 위해 중앙 정부의 역할을 축소시키는 대신, 지방의 결정권을 확대했기 때문이다. 특히 지방 관료와 상인의 결탁은 지방 분권화를 더욱 가속시켰는데, 그들은 때때로 중앙 정부의 지시가 자신들과의 이해관계와 맞지 않으면 그것을 무시하거나 저항하기도 했다. 중앙 정부가 부패와 노동착취, 과다징수에 대해 금지시켜도 이는 소용없는 일이었다. 결국 관료와 기업 간의 동맹은 중앙 정부의 권위를 더욱 약화시키며 관료자본주의를 부추겼다. 한편, 자오쯔양연해전략은 남부 해안 지대와 양쯔 강 델타에서 지방 분권화를 심화시키며 동시에 중국의 관료자본주의를 더욱 부추겼다.

정치개혁의 부재

중국은 경제개혁 후의 경제적 역동성을 받아들이기에 마땅한 정치개혁을 실행하지 않았다. 이렇듯 경제개혁으로 인해 나타난 각종 부작용을 규제할 수 있는 충분한 법규의 부재는 중국에 부패와 불평등, 지역 격차 등의 문제를 불러왔다. 후야오방 해임 후 새롭게 당 총서기 자리에 오른 자오쯔양은 공정한 관료제를 위한 몇 가지 정치개혁을 실시한다. 그 중 하나인 행정소송법은 1989년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승인되어 1990년 10월부터 시행된 법으로, 이를 통해 일반 대중에게 독단적인 관료에 대해 소송을 걸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여 부패의 만연을 줄이고자 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이러한 노력에도 행정소송법은 큰 효과를 보여주지 못했다. 행정소송법을 비롯해 부패를 막기 위한 법률들은 모두 법을 강제하는 제도와 강력한 중앙정부, 독립적인 사법기구가 결여된 체제 내에서 시행되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법을 집행하는 관료조차도 부패에 관련된 경우가 아주 많았고, 이는 오히려 당과 국가의 권위를 약화시켰다.



관료자본주의의 결과

고속성장의 기반

부정부패와 유리한 정치권력으로 축적된 자본은 대부분 중국 내에 투자금으로 돌아갔다. 이는 비록 관료와 그들의 자녀들이 더 큰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 했던 일이지만, 이러한 투자 덕에 중국은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경제적인 고속 성장을 할 수 있었다. 관료자본주의를 부추겼던 지방 분권화 역시 조금 더 많은 세입이 지방에 머물러있게 해줌으로써 지방의 경제성장을 촉진했다. 그러나 이는 단기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이며, 우리는 좀 더 장기적으로 봐야할 필요가 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지방 세입의 증가는 중앙 정부의 수입을 감소시켜 교육, 의료 등의 공공 서비스 부문에서의 지출을 감소시켰다.

1989년 민주화 운동

경제적으로 부강한 나라로 만들고자 했던 덩샤오핑의 정책을 위해서는 국가 경제에 있어 정부의 규제와 통제가 느슨해야했다. 관료와 간부들은 각종 암거래와 밀수 등 부정부패를 저질렀고, 심지어 경찰과 군대와도 결탁하여 조직적인 부정을 저지르기도 하였다. 이렇듯 대놓고 부정부패를 행해도 아무런 제재가 가해지지 않는 수준이 되자 관료뿐만 아니라 국영기업, 일반 자본가, 대중들도 이러한 경향에 합세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자와 농민은 점점 소외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계속적인 부정축재와 점점 심해지는 부정부패는 덩샤오핑 정권에 대한 대중의 혐오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덩샤오핑과 자오쯔양은 자본주의적 개혁을 지속하였고, 오히려 확대하고자 하였다. 이로써 점점 커진 원망의 감정은 점점 쌓여 1989년 민주화 운동(1989천안문사건)에서 분출되었다. 특히 노동자와 농민은 경제개혁으로 인한 부패와 불평등, 물가 상승 등을 종결시킬 것을 요구했다.

좌파의 비판

중국의 사회주의 발전에 있어 좌파는 시장개혁 노선에 관해 당이 갖고 있는 우편향적이며 시장만능주의적 시각을 비판하였다. 이와 더불어 중국사회주의의 관료자본주의를 비판하기도 하였다.



현재의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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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중국정치협상회의에서 칭화대 인문사회과학학원 차이지밍 위원은 중국 인구의 0.4%가 전체 부의 70%를 소유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통계자료

국제투명성기구(Transparency International)가 발표한 2014년 기준 세계부정부패 현황에 따르면 중국은 다소 높은 부정부패지수를 보여준다. 123455.jpg


왼쪽 하단의 수치가 높을수록 부정부패지수가 낮음.


국제투명성기구(TI)가 발표한 2017년 부패인식조사에 따르면, 중국은 최근 부패가 늘어났다고 인식하는 사람이 가장 많은 국가였으며, 기본 서비스를 이용할 때 뇌물을 준 적이 있다고 응답한 사람의 비율이 26%로, 한국(3%)과 일본(0.2%)에 비해 높은 응답 비율을 보여준다.[3]

우려의 목소리

현재 중국 GDP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부유층은 당의 기득권층으로, 그들의 정치적·경제적인 특권은 당 주도형 경제성장 방식에서 보장받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성장 발전 모델로의 전환에 쉽사리 찬성하지 않는다. 특히나 1989천안문사건 이후 국가와 밀접한 관계를 맺는 것이 그들에게 경제적으로 유리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 그들은 당에 반하는 정치적 요구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중국의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서는 경제개혁과 더불어 정치개혁도 실시되어야 한다. 현재의 중국은 과거와 같이 고속성장을 바라기엔 현실적인 무리가 있다.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발전을 위해서 사회보장 제도 등의 정치 개혁과 새로운 성장 방식 모델을 모색해야할 필요가 있다.

중국의 개혁은 전기를 맞고 있다. 중국이 ‘관료 자본주의’의 두꺼운 껍질을 벗어버리지 못하는 한 진정한 ‘발전모델의 전환’을 이루기는 어려울 것이다. 중국 경제는 성장기에 있으나, 여전히 지속가능한 바람직한 발전모델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

 
— 『통일한국』 (2012년 4월 통권 340호)

시진핑 정부

老虎和蒼蠅打一起(호랑이와 파리를 함께 때려잡겠다.)

 
— 시진핑(2013년 1월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전체회의 中)

시진핑은 2012년 중국공산당 총서기로 집권하자마자 ‘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시진핑은 2012년 제 18차 당대회 개막식에서 ‘부정부패를 다스리지 못하면 국가와 공산당이 함께 망할 수 있다’며 부정부패 척결 의지를 보였다. 시진핑을 포함한 상무위원 7명이 재산 신고를 했으며, 2013년 12월에는 부패척결 5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시진핑의 부패척결 소식에 중국 국민들은 기대를 보였다. 2012년 11월 25일 《중국청년보》는 전국 31개 성급도시 1만 219명 네티즌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했는데, 약 77.8%가 시진핑 부패척결에 대해 매우 큰 기대를 걸고 있다는 결과를 발표했다.[4] 그러나 일각에서는 시진핑 주석이 자신의 정치적 권력을 위해 숙적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부정부패 척결을 이용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저우융캉 구속사건을 두고 시진핑이 장쩌민계를 저격했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또한 시진핑 일가의 재산이 재벌급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시진핑의 친인척들에게서도 부정부패 혐의 의혹이 나왔다. 독점자본을 능가하는 천문학적인 자금을 축적에 분명 뇌물과 비리가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5] 인민망CCTV 보도에 따르면. 2017년 9월 17일 기준으로 시진핑 집권 출범 후 부정부패로 처벌당한 공산당은 119만여 명이다. 여기엔 저우융캉, 보시라이, 궈보슝, 쉬차이허우, 링지화와 같은 정치국원급 이상의 공산당원들도 포함되었다. 이들은 부정부패로 낙마하였다.

상무위원 저우융캉은 2015년 그의 부인과 아들, 측근 등이 약 232억 원에 달하는 뇌물을 받은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최종 판결에서 16년으로 감형되었다. 보시라이 전 충칭시 당서기는 1500명의 부패사범을 적발하는 등 부정부패 척결에 앞장서며 인기를 끌었지만, 보시라이 역시 불법 자금을 조성하고 100명이 넘는 내연녀를 두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2018년 장중성 전 뤼량시 부시장이 부정부패 혐의로 사형 판결을 받았다. 장중성은 탄광 인허가권을 빌미로 약 1억 774억원에 상당하는 10억 4만 위안의 뇌물을 받았다. 산시성 린펀시 중급인민법원은 그의 정치권리를 박탈하고, 개인 재산을 전부 몰수하도록 했다. 이번 조사에서 장중성 전 부시장은 2003년 부임한 후 탄광업자 사업 승인을 대가로 지속적인 뇌물을 받아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법원은 뇌물 액이 크고, 약 100억 위안에 달하는 재산의 출처를 명확히 밝히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에게 사형 판결을 내렸다.[6]

참고문헌

1. 바이두 백과사전 ‘官僚资本主义’ 항목.

2. 중국 위키피디아 ‘裙带资本主义’ 항목.

3. 모리스 마이스너 지음, 김수영 옮김,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2』, 이산.

4. 최재선 지음, 『불멸의 이노베이터 덩샤오핑』, 청림출판사.

5. 존 킹 페어뱅크 지음, 김형종·신성곤 옮김, 『신중국사』, 까치.

6. 이희옥 지음, 『중국의 새로운 사회주의 탐색』, 창비.

7. 오승렬 저, 『통일한국』 (2012년 4월 통권 340호), 평화문제연구소.

8. 국민권익위원회, 「중국의 반부패 동향」(2018년 4월호), http://acrc.go.kr/acrc/briefs/201804/sub6.html.

9. 김남성, 「[시진핑 시대의 중국] 중국의 ‘부패’ 해결할까」, 월간조선(2013년 3월호), https://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D&nNewsNumb=201303100028&page=10.

10. 「'1천700억대 뇌물' 中 부패간부, 시진핑 집권후 첫 사형판결」, 2018년 3월 28일, https://www.yna.co.kr/view/AKR20180328162800083(2019년 6월 23일).

11. 「“시진핑 5년, 부정부패 처벌 공산당 119만명”」, 2017년 9월 18일, https://www.edaily.co.kr/news/read?newsId=01357926616061432&mediaCodeNo=257(2019년 6월 23일).

12. 「시진핑도 뜨끔한 중국의 부정부패」, 2016년 5월 13일, http://jajusibo.com/27529(2019년 6월 23일).

  1. 바이두 백과사전 ‘官僚资本主义’ 항목.
  2. 최재선 지음, 『불멸의 이노베이터 덩샤오핑』, 청림출판사.
  3. 국민권익위원회, 「중국의 반부패 동향」(2018년 4월호), http://acrc.go.kr/acrc/briefs/201804/sub6.html.
  4. 김남성, 「[시진핑 시대의 중국] 중국의 ‘부패’ 해결할까」, 월간조선(2013년 3월호), https://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D&nNewsNumb=201303100028&page=10.
  5. 「시진핑도 뜨끔한 중국의 부정부패」, 2016년 5월 13일, http://jajusibo.com/27529(2019년 6월 23일).
  6. 「'1천700억대 뇌물' 中 부패간부, 시진핑 집권후 첫 사형판결」, 2018년 3월 28일, https://www.yna.co.kr/view/AKR20180328162800083(2019년 6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