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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무방정(司母戊方鼎)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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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무방정(司母戊方鼎)은 1939년 하남성(河南省) 안양시(安阳市) 무관촌(武官村)에서 출토된 [[상]](商)나라 후기 주요 청동기 중 하나이다. 현재는 중국국가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무게는 832.84kg이고, 높이는 133cm이며 길이는 110cm에 달한다. 이러한 특징으로 사모무방정(司母戊方鼎)은 세계 최대의 청동기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다. 어마무시한 크기의 사모무방정(司母戊方鼎)을 자세히 보면 모양이 굉장히 정교하고, 하단에는 4개의 발이 무거운 정을 지탱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모무방정(司母戊方鼎)의 모습은 상나라 시기의 주조기술이 매우 뛰어났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가 되며, 학자들은 상나라 시대의 물질문명은 오히려 후대인 주나라보다 발달해 있었다고 말한다.<ref>신성곤, 윤혜영,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서해문집, p31.</ref>
  
===정(鼎)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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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무방정(司母戊方鼎)에서 말하는 정(鼎)은 본래 발이 3개 달린 솥을 말한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귀가 달린 둥글거나 장방형의 불룩한 몸통이 있는 요리솥의 형상인 것이다. 솥이기 때문에 원래의 용도는 취사도구였고, 제작 재료 역시 처음에는 나무와 토기 등 가벼운 것들이었다. 하지만 상나라 귀족들은 제사를 지낼 때나 부(富)를 과시하기 위해서 청동으로 주조했고, 일반적인 대중들은 나무나 토기로 만든 용기들만 사용할 수 있었다.<ref>許進雄, 『중국고대사회-문자학과 고고학적 해석에 입각하여』, 지식산업사, pp.206~207.</ref> 이러한 상나라 시대 상황을 고려할 때 정(鼎)에서 방정(方鼎)이 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즉, 처음에 둥근 형태에 발이 3개 달린 모습에서 이후 사각형의 형태에 발이 4개 달린 모습으로의 변화는 일반 사람들의 사용한 용기의 일종에서 고유한 제사용기로 바뀐 것이고, 나아가 국가권력의 상징이 된 것이다. 정(鼎)이 국가권력을 상징한다는 것은 [[하]](夏)나라 우왕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다. 우왕은 나라를 아홉 개의 성으로 나누고 각 성을 상징하는 아홉 개의 정을 만들도록 했다는 점에서 '구정'은 군왕과 국가의 권력을 상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f>세실리아 링크비스트, 『한자왕국』, 청년사, p.208.</ref> 
  
 
===어떻게 제작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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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나라의 도가니는 하나에 불순물을 제거한 약 12.7kg의 순 청동액을 담을 수 있다. 그래서 사모무방정을 주조하려면 70, 80개의 도가니를 동시에 가열하여 청동액을 만들어 계속해서 주형이 부어야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1톤에 달하는 사모무방정은 깨었을 것이다. 그래서 사모무방정을 만들기 위해서는 용광로에 불을 때고, 청동을 용해하고 용광로의 온도를 측정하고 재료를 운반하고 청동액을 붓는 등의 엄청난 작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최소 수백 명의 사람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ref>許進雄, 『중국고대사회-문자학과 고고학적 해석에 입각하여』, 지식산업사, p.143.</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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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구체적으로 그 당시의 상황을 보자면
  
 
==특징과 시대문화적 가치==
 
==특징과 시대문화적 가치==

2020년 12월 19일 (토) 12:36 판

사모무방정(司母戊方鼎)이란?

사모무방정.jpg

사모무방정(司母戊方鼎)은 1939년 하남성(河南省) 안양시(安阳市) 무관촌(武官村)에서 출토된 (商)나라 후기 주요 청동기 중 하나이다. 현재는 중국국가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무게는 832.84kg이고, 높이는 133cm이며 길이는 110cm에 달한다. 이러한 특징으로 사모무방정(司母戊方鼎)은 세계 최대의 청동기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다. 어마무시한 크기의 사모무방정(司母戊方鼎)을 자세히 보면 모양이 굉장히 정교하고, 하단에는 4개의 발이 무거운 정을 지탱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모무방정(司母戊方鼎)의 모습은 상나라 시기의 주조기술이 매우 뛰어났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가 되며, 학자들은 상나라 시대의 물질문명은 오히려 후대인 주나라보다 발달해 있었다고 말한다.[1]

정()에 대하여

사모무방정(司母戊方鼎)에서 말하는 정(鼎)은 본래 발이 3개 달린 솥을 말한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귀가 달린 둥글거나 장방형의 불룩한 몸통이 있는 요리솥의 형상인 것이다. 솥이기 때문에 원래의 용도는 취사도구였고, 제작 재료 역시 처음에는 나무와 토기 등 가벼운 것들이었다. 하지만 상나라 귀족들은 제사를 지낼 때나 부(富)를 과시하기 위해서 청동으로 주조했고, 일반적인 대중들은 나무나 토기로 만든 용기들만 사용할 수 있었다.[2] 이러한 상나라 시대 상황을 고려할 때 정(鼎)에서 방정(方鼎)이 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즉, 처음에 둥근 형태에 발이 3개 달린 모습에서 이후 사각형의 형태에 발이 4개 달린 모습으로의 변화는 일반 사람들의 사용한 용기의 일종에서 고유한 제사용기로 바뀐 것이고, 나아가 국가권력의 상징이 된 것이다. 정(鼎)이 국가권력을 상징한다는 것은 (夏)나라 우왕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다. 우왕은 나라를 아홉 개의 성으로 나누고 각 성을 상징하는 아홉 개의 정을 만들도록 했다는 점에서 '구정'은 군왕과 국가의 권력을 상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3]

어떻게 제작했을까?

상나라의 도가니는 하나에 불순물을 제거한 약 12.7kg의 순 청동액을 담을 수 있다. 그래서 사모무방정을 주조하려면 70, 80개의 도가니를 동시에 가열하여 청동액을 만들어 계속해서 주형이 부어야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1톤에 달하는 사모무방정은 깨었을 것이다. 그래서 사모무방정을 만들기 위해서는 용광로에 불을 때고, 청동을 용해하고 용광로의 온도를 측정하고 재료를 운반하고 청동액을 붓는 등의 엄청난 작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최소 수백 명의 사람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4] 조금 더 구체적으로 그 당시의 상황을 보자면

특징과 시대문화적 가치

  1. 신성곤, 윤혜영,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서해문집, p31.
  2. 許進雄, 『중국고대사회-문자학과 고고학적 해석에 입각하여』, 지식산업사, pp.206~207.
  3. 세실리아 링크비스트, 『한자왕국』, 청년사, p.208.
  4. 許進雄, 『중국고대사회-문자학과 고고학적 해석에 입각하여』, 지식산업사, p.1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