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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民族),민권(民權),민생(民生)의 삼민주의(三民主義)는 쑨원(孫文, 1866~1925)이 제창한 중국 근대 혁명과 건국의 기본 정치 이념이다. 즉, 다시말하자면 중국 근대 혁명의 기본 이념으로 민족주의, 민권주의, 민생주의로 이루어져 있다. 1905년 일본에서 중국혁명동맹회가 결성 되고 동맹회가 발간한 <민보(民報)>의 발간사에서 만주족 축출(韃虜驅除), 중화의 회복(中華恢復), 공화국 건립(民國建立), 토지 소유의 균등(地權平均), 이 4대 강령을 3대 주의로 통합해 이론 체계를 확립하였고, 1906년부터 3대 주의를 삼민주의라는 표현으로 나타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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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民族),민권(民權),민생(民生)의 삼민주의(三民主義)는 쑨원(孫文, 1866~1925)이 제창한 중국 근대 혁명과 건국의 기본 정치 이념이다. 즉, 다시말하자면 중국 근대 혁명의 기본 이념으로 [[민족주의]], [[민권주의]], [[민생주의]]로 이루어져 있다. 1905년 일본에서 중국혁명동맹회가 결성 되고 동맹회가 발간한 <민보(民報)>의 발간사에서 만주족 축출(韃虜驅除), 중화의 회복(中華恢復), 공화국 건립(民國建立), 토지 소유의 균등(地權平均), 이 4대 강령을 3대 주의로 통합해 이론 체계를 확립하였고, 1906년부터 3대 주의를 삼민주의라는 표현으로 나타내기 시작했다. 일찍부터 민족국가를 형성해왔던 중국에서 쑨원은 새로운 민족주의를 걸어 혁명에 나섰다. 이에 대한 이유에 대해서 쑨원은 민족주의’라는 이름을 다시금 자신의 혁명강령(삼민주의)의 첫머리에 두었다. 쑨원은 여기서 “그것은 세계의 조류에 순응하고 중국의 국정에 알맞기 때문” 이라고 말했다. 민족주의 제1강을 보면 “중국의 국제지위의 평등, 정치지위의 평등, 경제지위의 평등을 촉진시켜 중국을 영구히 세계에 떨치자” 라는 말이 있다. 스스로 민족이라고 정의하는 서구사회의 영향력이 그 범위를 확대하면서, 서구가 중심인 세계질서에 소속하거나 가입을 추구하는 여타 다른 사회 역사도 사실은 민족으로 되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러한 세계질서에 동참하기 위해서 쑨원은 부득불‘민족주의’라는 슬로건이 다시금 필요했던 것이고, 그로인해 그 ‘민족주의’는 이제 새로운 서구적.근데적 의미를 갖게 되면서 나오는 것이다. ‘삼민주의(三民主義)’는 쑨원 정책과 사상의 총집약이라고 할 수 있다. 삼민주의에는 중국 미래구상과 관련하여 두 가지 커다란 줄기가 시종일관 교차한다. 당장에는 국민국가체제를 목표로 하면서도 오래된 중화제국의 체제를 먼 미래로 설정하는 중국의 전통 정치 지도자로서의‘도저한’심리가 그것이다. 삼민주의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국민국가 건설이라는 것과 중화제국체제에의 전망이라는 것이 함께 공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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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삼민주의는 유럽의 근대국가를 모델로 하여 중국의 민족적 독립과 정치적 민주 제도, 경제적 평등의 요구를 실현하려는 것이었다. 곧 당시의 민족주의는 멸만흥한(滅滿興漢), 곧 만주족의 청(淸) 왕조를 타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고, 민권주의는 유럽식의 공화정의 확립, 민생주의는 지주의 불로 소득을 억제하는 것을 과제로 했다. 쑨원에게는 이 3가지가 통일된 목표였지만, 실제로 동맹회는 민족주의에 중점을 두었고, 민생주의에 대한 관심과 활동은 두드러지지 않았다.
 
당시의 삼민주의는 유럽의 근대국가를 모델로 하여 중국의 민족적 독립과 정치적 민주 제도, 경제적 평등의 요구를 실현하려는 것이었다. 곧 당시의 민족주의는 멸만흥한(滅滿興漢), 곧 만주족의 청(淸) 왕조를 타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고, 민권주의는 유럽식의 공화정의 확립, 민생주의는 지주의 불로 소득을 억제하는 것을 과제로 했다. 쑨원에게는 이 3가지가 통일된 목표였지만, 실제로 동맹회는 민족주의에 중점을 두었고, 민생주의에 대한 관심과 활동은 두드러지지 않았다.
 
 
  
  
 
===삼민주의의 발전, 진행과정. ===
 
===삼민주의의 발전, 진행과정. ===
  
1911년의 신해혁명(辛亥革命), 1919년의 5.4 운동 등을 거치면서 쑨원의 삼민주의도 내용을 보완하며 발전하였다. 특히 1924년 1월에 이루어진 국공합작은 중요한 전환을 가져왔다. 민족주의는 국내 여러 민족의 평등과 함께 반제국주의의 성격을 명확히 했다. 민권주의는 전민정치(全民政治)를 구현하기 위해 국민의 정부 통제권인 선거권, 파면권, 창제권(創製權, 유리한 법률을 시행토록 하는 것), 복결권(複決權, 불리한 법률을 폐지 또는 개정토록 하는 것) 등의 4대 민권을 실현하자는 것으로 나아갔다. 민생주의는 독점자본의 억제와 대기업의 국영화 등을 포함한 자본절제(資本節制)와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에 입각한 토지 해방의 내용이 덧붙여졌다. 그리고 쑨원은 이를 실현하기 위해 연소(聯蘇),용공(容共),농공부조(農工扶助)의 3대 정책을 제시하였다. 이 시기의 삼민주의를 동맹회 시기의 그것과 구별하기 위해 신(新)삼민주의로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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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의 신해혁명(辛亥革命), 1919년의 5.4 운동 등을 거치면서 쑨원의 삼민주의도 내용을 보완하며 발전하였다. 특히 1924년 1월에 이루어진 국공합작은 중요한 전환을 가져왔다. 민족주의는 국내 여러 민족의 평등과 함께 반제국주의의 성격을 명확히 했다. 민권주의는 전민정치(全民政治)를 구현하기 위해 국민의 정부 통제권인 선거권, 파면권, 창제권(創製權, 유리한 법률을 시행토록 하는 것), 복결권(複決權, 불리한 법률을 폐지 또는 개정토록 하는 것) 등의 4대 민권을 실현하자는 것으로 나아갔다. 민생주의는 독점자본의 억제와 대기업의 국영화 등을 포함한 자본절제(資本節制)와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에 입각한 토지 해방의 내용이 덧붙여졌다. 그리고 쑨원은 이를 실현하기 위해 연소(聯蘇),용공(容共),농공부조(農工扶助)의 3대 정책을 제시하였다. 이 시기의 삼민주의를 동맹회 시기의 그것과 구별하기 위해 신(新)삼민주의로 부르기도 한다. 처음 쑨원의 삼민주의에 대한 대체적인 구상은 1896년 10월 런던에서 있었던 주영청국공사관 감금사건을 겪으면서 이루어졌다. 이 때 민족혁명과 민주주의를 결합하여국민국가의 기초가 될 만한 사상체계의 대강을 완성했다. 이후 하와이와 일본 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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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오가며 여러 세력을 규합하여 1905년 일본에서 동맹회를 결성했고 기관지인『민보(民報)』를 창간했다. 창간사에서 쑨원은 처음으로 민족, 민권, 민생의 3대 주의를 제시했다.『 민보』제1호 첫머리 도판에‘중국 민족의 개국 시조 황제’,‘ 세계 제일의민권주의대가루소’,‘ 세계제일의공화국건설자워싱턴’,‘ 세계제일의평등박애주의자 묵자(墨子)’의 초상을 실어 3대 주의를 구체화했다. 1923년 1월 소련 외무부 대표 아돌프 요페(Adolph Joffe)와 상하이에서 발표한 이 공동 선언으로 소련과 중국 국민당 간의 협력 기반을 마련했다. 1924년 쑨원은‘소련과 연합하고 공산주의주장을 수용하며 노동자와 농민을 돕는다’는 내용을 기존의 삼민주의에 새롭게 삽입함으로써 신(新)삼민주의를 탄생시켰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국공합작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평등사회를 지향하는 민생주의가 삼민주의의 중요한 강령 중 하나였고 그것이 미래가치로서 제시되었다. 민생주의는 실제로 토지소유의 균등화를 의미하는‘평균지권(平均地權)’으로 구체화되었고 이는 당시 사회적·정치적으로 강력한 변혁 슬로건으로 작용했다. 이처럼 민주의 문제가 공론으로서가 아니라 공화제라는 제도의 문제와 연결되어 가까운 미래에 현실화될 수 있었다는 것이 중요한 의미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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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⓶결과및 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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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민주의와 관련한 중국 공산당의 태도는 1940년에 발표된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의 《신민주주의론》에서 잘 나타나는데, 그 글에서 마오쩌둥은 삼민주의를 쑨원이 남긴 위대한 공적일 뿐만 아니라, 중국 공산당의 민주주의 혁명 단계에서의 목표와 일치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후진타오[胡錦濤] 정부는 2003년부터 “권력은 인민을 위해 사용하고(權爲民所用), 감정은 인민과 연결되고(情爲民所繫), 이익은 인민을 위해 추구한다(利爲民所謀)”는 신삼민주의를 제창하며 삼민주의를 계승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쑨원은 1924년 1월부터 8월까지 삼민주의에 대한 내용을 강연하였는데, 1925년 그가 죽은 뒤에 이 강연 내용은 《삼민주의》라는 책으로 출간되었다. 이 책을 통하여 쑨원이 제창한 삼민주의의 기본 정신과 주요 내용을 더 자세히 잘 알아볼수 있다.
 
삼민주의와 관련한 중국 공산당의 태도는 1940년에 발표된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의 《신민주주의론》에서 잘 나타나는데, 그 글에서 마오쩌둥은 삼민주의를 쑨원이 남긴 위대한 공적일 뿐만 아니라, 중국 공산당의 민주주의 혁명 단계에서의 목표와 일치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후진타오[胡錦濤] 정부는 2003년부터 “권력은 인민을 위해 사용하고(權爲民所用), 감정은 인민과 연결되고(情爲民所繫), 이익은 인민을 위해 추구한다(利爲民所謀)”는 신삼민주의를 제창하며 삼민주의를 계승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쑨원은 1924년 1월부터 8월까지 삼민주의에 대한 내용을 강연하였는데, 1925년 그가 죽은 뒤에 이 강연 내용은 《삼민주의》라는 책으로 출간되었다. 이 책을 통하여 쑨원이 제창한 삼민주의의 기본 정신과 주요 내용을 더 자세히 잘 알아볼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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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권분립==
 
==오권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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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은 선거권 ·파관권(罷官權) ·창제권(創制權) ·복결권(複決權)의 4가지 ‘정권(政權)’으로써 정부를 감독하고 직접 민권을 행사한다. 창제권은 입법원(立法院)과는 독립적으로 법률을 제정하거나 폐지하는 권한이며, 복결권은 입법원에서 부결된 법률을 통과시키는 권한이다. 1905년의 중국동맹회(中國同盟會) 결성 때 삼민주의와 함께 기본강령으로 채택된 오권헌법은 1928년 10월 국민정부조직법으로 실현되었고, 1947 ·1957년의 중화민국헌법의 기초가 되었다.
 
국민은 선거권 ·파관권(罷官權) ·창제권(創制權) ·복결권(複決權)의 4가지 ‘정권(政權)’으로써 정부를 감독하고 직접 민권을 행사한다. 창제권은 입법원(立法院)과는 독립적으로 법률을 제정하거나 폐지하는 권한이며, 복결권은 입법원에서 부결된 법률을 통과시키는 권한이다. 1905년의 중국동맹회(中國同盟會) 결성 때 삼민주의와 함께 기본강령으로 채택된 오권헌법은 1928년 10월 국민정부조직법으로 실현되었고, 1947 ·1957년의 중화민국헌법의 기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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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민주의의 의미와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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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민주의 안에 두 가지 함의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제국성과 국민국가이다. 그 안에는 중국의 현재지향과 더불어 미래지향이 과거와 겹쳐져 있다. 먼저 20세기 근현대사 전체는 표면적으로는‘국민국가화’의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민족, 민권,민생이라는 3대 키워드 중 민권은 무엇보다도‘주권재민’을 매우 강하게 의식한 모토였다. 천하의 신민(臣民)이 아닌 국민의 실현이야말로 근대적인 국가의 필수조건이었기 때문이다. 중화민국의 수립에도 불구하고 국가는 여전히‘천하’적 성격을띠고 있었기에 주권재민을 내세운 국민국가의 창출은 쑨원이 성립시킨 난징(南京)국민정부의 최대 정치적 과제였다. 이 과제를 강하게 의식하는 가운데 비로소 하나의정당에 의한 지도라고 하는 정치체제를 탄생시킬 수 있었고, 이것은 다시 국가통합원리로서의‘훈정적(訓政的)’국민주권제로 귀결된다. 지금 중국에서 자주 사용하고있는 당국체제(黨國體制)는 사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즉 중국은1920년대부터 정당이 국가를 창출하는 정당국가(party-state) 시스템이 만들어져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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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번의 위기]]
 
|[[여덟번의 위기]]
 
|2016년 출판<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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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보는근현대중국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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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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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민주의 건국방략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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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출판<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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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보는근현대중국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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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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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출판<BR>
 
|[[인물로보는근현대중국사회]]
 
|[[인물로보는근현대중국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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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12일 (목) 15:00 기준 최신판

쑨원(孫文

출생 1866.11.12
광저우 성 청나라 광동
사망 1925.3.12
중화민국 경도특별시 협화의원
가족 부인 쑹칭링,
주요 작품 삼민주의 등
관련 활동 중화혁명단 창설, 중화민국 임시 대총통, 흥중회 조직

틀:사건정보


{{||<중국 근대 혁명과 건국의 기본 정치 이념의 탄생>}}

개요

민족(民族),민권(民權),민생(民生)의 삼민주의(三民主義)는 쑨원(孫文, 1866~1925)이 제창한 중국 근대 혁명과 건국의 기본 정치 이념이다. 즉, 다시말하자면 중국 근대 혁명의 기본 이념으로 민족주의, 민권주의, 민생주의로 이루어져 있다. 1905년 일본에서 중국혁명동맹회가 결성 되고 동맹회가 발간한 <민보(民報)>의 발간사에서 만주족 축출(韃虜驅除), 중화의 회복(中華恢復), 공화국 건립(民國建立), 토지 소유의 균등(地權平均), 이 4대 강령을 3대 주의로 통합해 이론 체계를 확립하였고, 1906년부터 3대 주의를 삼민주의라는 표현으로 나타내기 시작했다. 일찍부터 민족국가를 형성해왔던 중국에서 쑨원은 새로운 민족주의를 걸어 혁명에 나섰다. 이에 대한 이유에 대해서 쑨원은 민족주의’라는 이름을 다시금 자신의 혁명강령(삼민주의)의 첫머리에 두었다. 쑨원은 여기서 “그것은 세계의 조류에 순응하고 중국의 국정에 알맞기 때문” 이라고 말했다. 민족주의 제1강을 보면 “중국의 국제지위의 평등, 정치지위의 평등, 경제지위의 평등을 촉진시켜 중국을 영구히 세계에 떨치자” 라는 말이 있다. 스스로 민족이라고 정의하는 서구사회의 영향력이 그 범위를 확대하면서, 서구가 중심인 세계질서에 소속하거나 가입을 추구하는 여타 다른 사회 역사도 사실은 민족으로 되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러한 세계질서에 동참하기 위해서 쑨원은 부득불‘민족주의’라는 슬로건이 다시금 필요했던 것이고, 그로인해 그 ‘민족주의’는 이제 새로운 서구적.근데적 의미를 갖게 되면서 나오는 것이다. ‘삼민주의(三民主義)’는 쑨원 정책과 사상의 총집약이라고 할 수 있다. 삼민주의에는 중국 미래구상과 관련하여 두 가지 커다란 줄기가 시종일관 교차한다. 당장에는 국민국가체제를 목표로 하면서도 오래된 중화제국의 체제를 먼 미래로 설정하는 중국의 전통 정치 지도자로서의‘도저한’심리가 그것이다. 삼민주의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국민국가 건설이라는 것과 중화제국체제에의 전망이라는 것이 함께 공존한다.

발단

쑨원이 삼민주의 사상 체계를 구상한 것은 1895년 광저우[廣州]에서의 봉기가 실패한 뒤 영국으로 망명했던 시기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것이 공표된 것은 1905년 일본에서 중국혁명동맹회(中國革命同盟會)를 결성했을 때이다. 쑨원은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 도쿄[東京]에서 반청(反淸) 무장 투쟁을 벌이기 위해 중국혁명동맹회를 조직하였다. 동맹회는 창립 선언에서 ‘만주족 축출(韃虜驅除), 중화의 회복(中華恢復), 공화국 건립(民國建立), 토지 소유의 균등(地權平均)’의 4대 강령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동맹회가 발간한 <민보(民報)>의 발간사에서 이 4대 강령을 3대 주의로 통합해 이론 체계를 확립하였고, 1906년부터 3대 주의를 삼민주의라는 표현으로 나타내기 시작했다.




전개

시대적 상황

당시의 삼민주의는 유럽의 근대국가를 모델로 하여 중국의 민족적 독립과 정치적 민주 제도, 경제적 평등의 요구를 실현하려는 것이었다. 곧 당시의 민족주의는 멸만흥한(滅滿興漢), 곧 만주족의 청(淸) 왕조를 타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고, 민권주의는 유럽식의 공화정의 확립, 민생주의는 지주의 불로 소득을 억제하는 것을 과제로 했다. 쑨원에게는 이 3가지가 통일된 목표였지만, 실제로 동맹회는 민족주의에 중점을 두었고, 민생주의에 대한 관심과 활동은 두드러지지 않았다.


삼민주의의 발전, 진행과정.

1911년의 신해혁명(辛亥革命), 1919년의 5.4 운동 등을 거치면서 쑨원의 삼민주의도 내용을 보완하며 발전하였다. 특히 1924년 1월에 이루어진 국공합작은 중요한 전환을 가져왔다. 민족주의는 국내 여러 민족의 평등과 함께 반제국주의의 성격을 명확히 했다. 민권주의는 전민정치(全民政治)를 구현하기 위해 국민의 정부 통제권인 선거권, 파면권, 창제권(創製權, 유리한 법률을 시행토록 하는 것), 복결권(複決權, 불리한 법률을 폐지 또는 개정토록 하는 것) 등의 4대 민권을 실현하자는 것으로 나아갔다. 민생주의는 독점자본의 억제와 대기업의 국영화 등을 포함한 자본절제(資本節制)와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에 입각한 토지 해방의 내용이 덧붙여졌다. 그리고 쑨원은 이를 실현하기 위해 연소(聯蘇),용공(容共),농공부조(農工扶助)의 3대 정책을 제시하였다. 이 시기의 삼민주의를 동맹회 시기의 그것과 구별하기 위해 신(新)삼민주의로 부르기도 한다. 처음 쑨원의 삼민주의에 대한 대체적인 구상은 1896년 10월 런던에서 있었던 주영청국공사관 감금사건을 겪으면서 이루어졌다. 이 때 민족혁명과 민주주의를 결합하여국민국가의 기초가 될 만한 사상체계의 대강을 완성했다. 이후 하와이와 일본 등지 를 오가며 여러 세력을 규합하여 1905년 일본에서 동맹회를 결성했고 기관지인『민보(民報)』를 창간했다. 창간사에서 쑨원은 처음으로 민족, 민권, 민생의 3대 주의를 제시했다.『 민보』제1호 첫머리 도판에‘중국 민족의 개국 시조 황제’,‘ 세계 제일의민권주의대가루소’,‘ 세계제일의공화국건설자워싱턴’,‘ 세계제일의평등박애주의자 묵자(墨子)’의 초상을 실어 3대 주의를 구체화했다. 1923년 1월 소련 외무부 대표 아돌프 요페(Adolph Joffe)와 상하이에서 발표한 이 공동 선언으로 소련과 중국 국민당 간의 협력 기반을 마련했다. 1924년 쑨원은‘소련과 연합하고 공산주의주장을 수용하며 노동자와 농민을 돕는다’는 내용을 기존의 삼민주의에 새롭게 삽입함으로써 신(新)삼민주의를 탄생시켰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국공합작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평등사회를 지향하는 민생주의가 삼민주의의 중요한 강령 중 하나였고 그것이 미래가치로서 제시되었다. 민생주의는 실제로 토지소유의 균등화를 의미하는‘평균지권(平均地權)’으로 구체화되었고 이는 당시 사회적·정치적으로 강력한 변혁 슬로건으로 작용했다. 이처럼 민주의 문제가 공론으로서가 아니라 공화제라는 제도의 문제와 연결되어 가까운 미래에 현실화될 수 있었다는 것이 중요한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사건의 전개, 내용

⓵사건 전개, 활동

1927년 4월 국공합작이 분열된 뒤 장제스(蔣介石, 1887-1975)의 난징[南京] 국민정부는 삼민주의에 반공적 내용을 부여하는 보수적이며 유교적인 해석을 덧붙이려 하였다. 하지만 1936년 12월에 일어난 시안[西安] 사건을 계기로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지자 중국 공산당의 주장으로 삼민주의는 다시 연합전선의 강령이 되었다.

⓶결과및 그 후

삼민주의와 관련한 중국 공산당의 태도는 1940년에 발표된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의 《신민주주의론》에서 잘 나타나는데, 그 글에서 마오쩌둥은 삼민주의를 쑨원이 남긴 위대한 공적일 뿐만 아니라, 중국 공산당의 민주주의 혁명 단계에서의 목표와 일치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후진타오[胡錦濤] 정부는 2003년부터 “권력은 인민을 위해 사용하고(權爲民所用), 감정은 인민과 연결되고(情爲民所繫), 이익은 인민을 위해 추구한다(利爲民所謀)”는 신삼민주의를 제창하며 삼민주의를 계승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쑨원은 1924년 1월부터 8월까지 삼민주의에 대한 내용을 강연하였는데, 1925년 그가 죽은 뒤에 이 강연 내용은 《삼민주의》라는 책으로 출간되었다. 이 책을 통하여 쑨원이 제창한 삼민주의의 기본 정신과 주요 내용을 더 자세히 잘 알아볼수 있다.




오권분립

쑨원[孫文]의 삼민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 중화민국 헌법의 권력분립주의.

오권(五權)이란 입법권 ·사법권 ·행정권 ·고시권(考試權) ·감찰권(監察權) 등을 말한다. 고시권은 시험제도에 의한 관리채용권, 감찰권은 탄핵권(彈劾權)인데, 쑨원이 이 이권을 행정권과 입법권으로부터 독립시켜 오권분립을 제창한 것은, 권력을 삼권으로만 분립시켰을 경우의 폐해를 배제하기 위하여 중국 고래의 제도를 참고한 독창적인 것이라 한다. 중앙정부는 이 5가지의 ‘치권(治權)’에 따라 오원정부(五院政府)를 구성한다.

국민은 선거권 ·파관권(罷官權) ·창제권(創制權) ·복결권(複決權)의 4가지 ‘정권(政權)’으로써 정부를 감독하고 직접 민권을 행사한다. 창제권은 입법원(立法院)과는 독립적으로 법률을 제정하거나 폐지하는 권한이며, 복결권은 입법원에서 부결된 법률을 통과시키는 권한이다. 1905년의 중국동맹회(中國同盟會) 결성 때 삼민주의와 함께 기본강령으로 채택된 오권헌법은 1928년 10월 국민정부조직법으로 실현되었고, 1947 ·1957년의 중화민국헌법의 기초가 되었다.




삼민주의의 의미와 의의

삼민주의 안에 두 가지 함의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제국성과 국민국가이다. 그 안에는 중국의 현재지향과 더불어 미래지향이 과거와 겹쳐져 있다. 먼저 20세기 근현대사 전체는 표면적으로는‘국민국가화’의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민족, 민권,민생이라는 3대 키워드 중 민권은 무엇보다도‘주권재민’을 매우 강하게 의식한 모토였다. 천하의 신민(臣民)이 아닌 국민의 실현이야말로 근대적인 국가의 필수조건이었기 때문이다. 중화민국의 수립에도 불구하고 국가는 여전히‘천하’적 성격을띠고 있었기에 주권재민을 내세운 국민국가의 창출은 쑨원이 성립시킨 난징(南京)국민정부의 최대 정치적 과제였다. 이 과제를 강하게 의식하는 가운데 비로소 하나의정당에 의한 지도라고 하는 정치체제를 탄생시킬 수 있었고, 이것은 다시 국가통합원리로서의‘훈정적(訓政的)’국민주권제로 귀결된다. 지금 중국에서 자주 사용하고있는 당국체제(黨國體制)는 사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즉 중국은1920년대부터 정당이 국가를 창출하는 정당국가(party-state) 시스템이 만들어져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작품 목록

제목 특징 수업과의 연계
여덟번의 위기 2016년 출판
인물로보는근현대중국사회
삼민주의 2000년 출판
인물로보는근현대중국사회
삼민주의 건국방략60 1991년 출판
인물로보는근현대중국사회
청년쑨원 2011년 출판
인물로보는근현대중국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