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진 문자"의 두 판 사이의 차이

Chinese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한자를 기초하고 필획을 증감하여 소리글자와 뜻글자를 만드는 방법)
 
(사용자 2명의 중간 판 88개는 보이지 않습니다)
1번째 줄: 1번째 줄:
 +
[[파일:여진문자로 적은 여진문.png|섬네일|오른쪽|'''여진문자로 적은 '여진문(女真文)'''<ref>사진 출처 : [https://zh.wikipedia.org/wiki/%E5%A5%B3%E7%9C%9F%E6%96%87#cite_note-2 维基百科 '女真文']<br /></ref>]]
 +
[[파일:방씨묵포(정각본)에 새겨진 여진문.png|섬네일|오른쪽|'''방우로(方于魯)가 편집한『방씨묵포(方氏墨譜)』(정각본)에 새겨진 여진문자<ref>사진 출처 : 위의 페이지</ref>'''<br><br>'''의미'''明王慎德、四夷咸賓<br>'''특징'''둥근 패 먹판에 새겨진 기록한 여진 대역문<ref>방우로의 『방씨묵포』의 ‘구국소저팔자’ 가운데 여진문자만 골라 기록한 여진 대역문이다. 출처 : 이상규, 「"명왕신덕 사이함빈"의 대역 여진어 분석」, 『언어과학연구』, vol.63, 2012, p.236-237</ref>]]
 +
 
==개요==
 
==개요==
 
+
여진족은 북방 민족의 한 갈래이며 [[]](金)나라를 세운 민족이다. 즉, 여진어는 금나라 여진족이 사용하던 언어였으며, 여진문자는 금나라 태조 아골타(阿骨打)의 명에 따라 희윤(希尹)과 엽로(葉魯)를 비롯한 사람들이 만든 문자이며 1119년 반포되었다. 이후 희종(熙宗) 완안단(完顔亶)<ref>금나라 3대 황제. 1135년∼1149년 재위</ref> 또한 여진문자를 만들어 1138년에 반포했다. 따라서 희윤 등이 만든 여진문자는 ‘여진대자(女眞大字)’라 하고, 희종이 만든 여진문자는 ‘여진소자(女眞小字)’라고 한다.<ref>그러나 여진대자와 여진소자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금사(金史)』를 비롯해 현재 발견된 기록이 없다. 현재 『금사』에는 희윤이 거란 문자를 모방하여 여진문자를 만들었다는 기록만 있을 뿐, 이 둘을 구분하는 방법이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위키백과에서는 대자와 소자 구분 없이 ‘여진문자’에 대해 설명했다.</ref>
여진족은 북방 민족의 한 갈래이며 금(金)나라를 세운 민족이다. 즉, 여진어는 금나라 여진족이 사용하던 언어였으며, 여진 문자는 금나라 태조 아골타(阿骨打)의 명에 따라 희윤(希尹)과 엽로(葉魯)를 비롯한 사람들이 만든 문자이며 1119년 반포되었다. 이후 희종(熙宗) 완안단(完顔亶)<ref>금나라 3대 황제. 1135년∼1149년 재위</ref> 또한 여진 문자를 만들어 1138년에 반포했다. 따라서 희윤 등이 만든 여진 문자는 ‘여진대자(女眞大字)’라 하고, 희종이 만든 여진 문자는 ‘여진소자(女眞小字)’라고 한다.<ref>그러나 여진대자와 여진소자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금사(金史)』를 비롯해 현재 발견된 기록이 없다. 현재 『금사』에는 희윤이 거란 문자를 모방하여 여진 문자를 만들었다는 기록만 있을 뿐, 이 둘을 구분하는 방법이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위키백과에서는 대자와 소자 구분 없이 ‘여진 문자’에 대해 설명했다.</ref>
 
  
 
==창제 배경==
 
==창제 배경==
 
여진 사람에게는 문자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완안부(完顔部)<ref>12∼13세기 중국 동북부 일대에 금(金)나라를 세운 여진 민족</ref> 추장 완안석로(完顔石魯)<ref>금나라가 세워지기 전 여진족의 추장. 1005년~1021년 재위</ref> 때는 여진의 여러 부족 간에 사신이 왕래할 때 신패(信牌)를 사용했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전부 구술로 전달하였다. 또한 신패의 형식 또한 여진의 부(附)마다 통일되지 않아 완안석로의 손자 완안영가(完顔盈歌)가 신패를 개별적으로 만들지 못하도록 금지령을 내린 후에야 그 형식이 통일되었다.  
 
여진 사람에게는 문자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완안부(完顔部)<ref>12∼13세기 중국 동북부 일대에 금(金)나라를 세운 여진 민족</ref> 추장 완안석로(完顔石魯)<ref>금나라가 세워지기 전 여진족의 추장. 1005년~1021년 재위</ref> 때는 여진의 여러 부족 간에 사신이 왕래할 때 신패(信牌)를 사용했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전부 구술로 전달하였다. 또한 신패의 형식 또한 여진의 부(附)마다 통일되지 않아 완안석로의 손자 완안영가(完顔盈歌)가 신패를 개별적으로 만들지 못하도록 금지령을 내린 후에야 그 형식이 통일되었다.  
당시 여진에는 문자가 없었기 때문에 사신으로 반드시 기억력이 좋은 사람을 선발했지만 이 또한 큰 불편함을 초래했다. 금나라의 태조 아골타는 요(遼)나라를 물리친 후에 사로잡은 한인과 거란인과도 거란 문자 및 한자로 소통했으며, 이때부터 여진 귀족의 대부분은 [[거란]] 문자로 소통했다. 이 당시 국내 문서 기록이나 이웃 나라와의 통신은 대부분 거란 문자를 채용했고, 이후 아골타가 희윤과 협로에게 명령해서 여진 문자가 창제되었다. 이와 관련된 기록은 『금사(金史)』에서 확인할 수 있다.  
+
당시 여진에는 문자가 없었기 때문에 사신으로 반드시 기억력이 좋은 사람을 선발했지만 이 또한 큰 불편함을 초래했다. 금나라의 태조 아골타는 요(遼)나라를 물리친 후에 사로잡은 한인과 거란인과도 거란문자 및 한자로 소통했으며, 이때부터 여진 귀족의 대부분은 [[거란]] 문자로 소통했다. 이 당시 국내 문서 기록이나 이웃 나라와의 통신은 대부분 [[거란문자]]를 채용했고, 이후 아골타가 희윤과 협로에게 명령해서 여진문자가 창제되었다. 이와 관련된 기록은 『금사(金史)』에서 확인할 수 있다.
 +
 
 +
::“금나라 사람들은 처음에는 문자가 없었으나 나라가 점점 강성해지면서 이웃 나라와 교류할 때에도 거란문자를 사용하였다. 태조는 완안희윤에게 금나라의 문자를 만들고 제도를 준비하라고 명했다. 그래서 완안희윤은 한인의 해자(楷字)를 근거하여 문자체를 모방한 한편 거란자의 제도에 근거하여 본국 언어 상황에 걸맞은 여진문자를 만들었다.…태조는 크게 기뻐하고 반포할 것을 명령했다.……그 후에 희종은 여직자(女直字)를 만들었는데 완안희윤이 만든 여진문자와 함께 사용했다. 완안희윤이 만든 것을 여진 대자라 했고 희종은 만든 것을 소자라고 했다.” (『금사(金史)』 권73 <완안희윤전(完顔希尹>)<ref>진치총·진광핑, 『여진어와 문자』,경전, 2014, p.102</ref>
 +
 
 +
::“여직(女直)에는 처음에 문자가 없었으므로 [[요나라]]를 정벌하고 거란인과 한인을 사로잡았을 때에도 거란문과 한자로 소통하였다.……완안희윤은 거란문자를 모방하여 여진문자를 만들었다.” (『금사(金史)』 권66 <역전(易傳)>)<ref>위의 책, 같은 페이지</ref>
 +
 
 +
==보급 및 쇠퇴==
 +
여진문자는 1119년에 반포된 후 금나라 조정에서는 여러 지역에 학교를 설립하고 문자를 보급했다. 이후 태종 오걸매(吳乞買)가 협로를 상경(上京)에서 여진문자 교수를 담당하도록 했으며, 여진어 학습 성적이 좋은 학생들을 선발해 상경에서 공부시켰다. 이 학생들은 학업을 끝낸 후 여진문자 교수나 서리(書吏)로 여러 지역에 파견되었다. <br>
 +
 
 +
1156년에는 시험용 여진어 책과 거란어 책이 만들어지기도 했으며, 세종 완안옹(完顏雍)은 1164년에 여진문자로 쓴 경서를 발표했고 여진문자를 공부할 학생으로 귀족들을 선발했는데 총 3,000명에 이르렀다. 1169년에는 각 지역의 학생 가운데 100명의 우수한 학생을 선발하여 [[북경]](北京)에 보내 양식을 대주면서 경사와 시를 교육시키기도 했다. <br>
 +
 
 +
그러나 금나라 멸망 후 중원지역으로 옮겨간 여진 사람들은 한족 사람들과 생활하면서 한족 문화의 영향으로 대부분 한어를 사용하고 한자로 소통하게 되었다. 동북지역에 남은 일부 여진 사람들은 명나라 전기까지 여전히 여진문자를 사용했지만, [[원]]나라와 [[명]]나라의 통치 아래 대부분 여진 사람들이 [[몽골]] 문자보다 배우기 어려웠던 여진문자를 포기했다. <br>
 +
 
 +
무엇보다 일반 사람들은 문자를 배울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금나라가 망한 후 문자를 알고 있는 사람은 통치자 계급의 사람들뿐이었고, [[누르하치]] 때 몽골 문자에서 [[만주문자]]로 바꾸어 쓰라는 명령이 내려지기 전 이미 여진의 부락 간의 문서 왕래에는 몽골 문자가 사용되고 있었다. 결국 여진문자는 자연스레 중국의 고문자 중 하나가 되었다.
 +
 
 +
==여진문자의 자형 근간에 대한 논란==
 +
앞에서 살펴봤듯이 『금사(金史)』의 두 기록에서도 여진문자가 거란문자의 조직 방법만을 취했는지, 아니면 자형(字形)까지 취했는지 의견이 다르다. 또한 현재 여진어와 문자에 대한 책들 또한 각각 다른 주장을 취하고 있다. 우선 두 문자 사이의 관계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다음 4가지 사항을 고려해야 한다.
 +
 
 +
(1)거란문자와 여진문자는 한자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br>
 +
(2)여진문자가 창제되기 이전 대부분 여진 사람들은 거란문자를 사용했으며, 새롭게 문자를 만들어 반포한 후에도 거란문자 또한 여전히 사용했다.<br>
 +
(3)현재 거란문자를 해독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어서 거란어 전체를 명료하게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br>
 +
(4)여진문자에서 한자를 기초하여 필획을 조정한 글자와 거란문자의 필획을 조정한 글자 모두 존재한다. <br>
 +
 
 +
위의 사항들에 따르면, 한자를 바탕으로 한 여진문자의 양이 많은 이유로 현재 거란문자가 제대로 해독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여진문자가 창제되었을 당시 한자의 자형뿐만 아니라 거란문자의 자형 및 조직 방법을 취했다고 봐야할 것이다.
 +
 
 +
==제자(制字)원리<ref>사진 및 인용 출처 : 진치총·진광핑, 『여진어와 문자』,경전, 2014, p.93~p.106</ref>==
 +
여진문자의 제작 원리는 다음과 같다.
 +
====한자를 기초로 제자(制字)<ref>한자를 기초하고 필획을 증감하여 소리글자와 뜻글자를 만드는 방법</ref>====
 +
*한자의 필획을 바꾸어 만들었고 의미를 바꾸지 않은 경우<ref>표 출처 : 진치총·진광핑, 『여진어와 문자』,경전, 2014, p.103</ref>
 +
[[파일:여진문1.png|캡션 텍스트]]
 +
 
 +
 
 +
*한자의 필획을 바꾸어 한어의 원음을 따랐으나 원래의 뜻을 따르지 않은 경우<ref>표 출처 : 위의 책, 같은 페이지</ref>
 +
[[파일:여진문2.png|캡션 텍스트]]
 +
 
 +
 
 +
*한어의 자형을 조금 바꾸고 독음만 조금 바꾸거나, 한어의 원자(原字)의 독음을 취하였지만 뜻은 취하지 않은 경우<ref>표 출처 : 위의 책, p.104</ref>
 +
[[파일:여진 문자3.png|캡션 텍스트]]
 +
 
 +
====거란문자를 기초로 제자(制字)1<ref>금서 거란 문자를 기초로 했고 필획을 증감하여 소리글자와 뜻글자를 만드는 방법</ref><ref>표 출처 : 위의 책, p.105</ref>====
 +
[[파일:여진문4.png|캡션 텍스트]]<br>
 +
다음 문자들은 금서에서 발견된 거란 문자에서 필획을 증감해 만든 것이다.
  
 +
====거란문자를 기초로 제자(制字)2<ref>거란 문자를 직접 취하여 만드는 방법</ref><ref>위의 책, 같은 페이지</ref>====
 +
[[파일:여진문5.png|캡션 텍스트]]<br>
 +
다음 문자들은 <금서묘소>에서 발견된 거란 문자와 동일한 여진문자이다.<br><br>
  
“금나라 사람들은 처음에는 문자가 없었으나 나라가 점점 강성해지면서 이웃 나라와 교류할 때에도 거란 문자를 사용하였다. 태조는 완안희윤에게 금나라의 문자를 만들고 제도를 준비하라고 명했다. 그래서 완안희윤은 한인의 해자(楷字)를 근거하여 문자체를 모방한 한편 거란자의 제도에 근거하여 본국 언어 상황에 걸맞은 여진 문자를 만들었다.…태조는 크게 기뻐하고 반포할 것을 명령했다.……그 후에 희종은 여직자(女直字)를 만들었는데 완안희윤이 만든 여진 문자와 함께 사용했다. 완안희윤이 만든 것을 여진 대자라 했고 희종은 만든 것을 소자라고 했다.” (『금사(金史)』 권73 <완안희윤전(完顔希尹>)
+
여진문자는 사전에 소리글자와 뜻글자를 구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단음절에 뜻글자인 경우도 많지만 한 문자에 음절이 두 개에서 네 개까지 들어간 경우도 존재한다. 따라서 여진문자의 대부분은 정확히 복합표음문자(複音字)이다.
 +
다음 문자들은 <금서묘소>에서 발견된 거란 문자와 동일한 여진문자이다.<ref>위와 같은 페이지 인용</ref>
  
 +
==문자 사료==
 +
여진문자는 주로 문헌자료, 금석자료, 묵적자료, 그리고 도장이나 거울에서 발견된다. 이 중 연구에 핵심이 되는 문헌자료와 금석자료를 소개한다.
  
“여직(女直)에는 처음에 문자가 없었으므로 요나라를 정벌하고 거란인과 한인을 사로잡았을 때에도 거란문과 한자로 소통하였다.……완안희윤은 거란 문자를 모방하여 여진 문자를 만들었다.” (『금사(金史)』 권66 <역전(易傳)>)
+
===금석자료===
  
==보급 및 쇠퇴==
+
[[파일:오둔량필시비(奥屯良弼詩碑).png|섬네일|오른쪽|'''행서체 여진문 <오둔량필시비>(파편)'''<ref>사진 출처 : 손백군, 『금나라 시대 여진어』, 태학사, 2015, p.28</ref>]]
여진 문자는 1119년에 반포된 후 금나라 조정에서는 여러 지역에 학교를 설립하고 여진 문자를 보급했다. 이후 태종 오걸매(吳乞買)가 협로를 상경(上京)에서 여진 문자 교수를 담당하도록 했으며, 여진어 학습 성적이 좋은 학생들을 선발해 상경에서 공부시켰다. 이 학생들은 학업을 끝낸 후 여진 문자 교수나 서리(書吏)로 여러 지역에 파견되었다.  
+
*오둔량필시비(奥屯良弼詩碑)
1156년에는 시험용 여진어 책과 거란어 책이 만들어지기도 했으며, 세종 완안옹(完顏雍)은 1164년에 여진 문자로 쓴 경서를 발표했고 여진 문자를 공부할 학생으로 귀족들을 선발했는데 총 3,000명에 이르렀다. 1169년에는 각 지역의 학생 가운데 100명의 우수한 학생을 선발하여 북경에 보내 양식을 대주면서 경사와 시를 교육시키기도 했다.  
+
 
그러나 금나라 멸망 후 중원지역으로 옮겨간 여진 사람들은 한족 사람들과 생활하면서 한족 문화의 영향으로 대부분 한어를 사용하고 한자로 소통하게 되었다. 동북지역에 남은 일부 여진 사람들은 명나라 전기까지 여전히 여진 문자를 사용했지만, 원나라와 명나라의 통치 아래 대부분 여진 사람들이 몽골 문자보다 배우기 어려웠던 여진 문자를 포기했다.  
+
현존하는 유일한 [[행서]]체 여진문자 석각이다. 비문은 칠언율시 한 수이며, 상관에는 시와 지은이를, 하관에는 비석을 세운 사람을 기록했다. 『여진억어』를 참고해서 학자들이 비문을 고증하고 해석하였으나 『여진억어』의 기록 어휘가 한정되어 있고, 비문의 행서가 판독하기 어려워서 완벽히 해석되지는 못했다.<ref>위의 책, p.29-p.30</ref>
무엇보다 일반 사람들은 문자를 배울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금나라가 망한 후 문자를 알고 있는 사람은 통치자 계급의 사람들뿐이었고, 누르하치 때 몽골 문자에서 만주 문자로 바꾸어 쓰라는 명령이 내려지기 전 이미 여진의 부락 간의 문서 왕래에는 몽골 문자가 사용되고 있었다. 결국 여진 문자는 자연스레 중국의 고문자 중 하나가 되었다.  
+
 
 +
*오둔량필전음비(奥屯良弼钱饮碑)
 +
[[파일:오둔량필전음비(奥屯良弼钱饮碑).jpg|섬네일|오른쪽|'''<오둔량필전음비>'''<ref>사진 출처 :
 +
[http://www.bjethnic.gov.cn/gjbhzl/mzwzjs/20150312/1834.shtml 北京市民族宗敎事务委委员会 '《奥屯良弼钱饮碑》局部 (女真文)']<br /></ref>]]
 +
 
 +
현존하는 여진문자비 중 하나로, 비심(碑心)에는 오둔량필(奥屯良弼)이 1206년에 쓴 한문 제자(題字, 비석에 쓴 글자)가 있다. 왼쪽에는 여진자 3행 60여자가 있는데 오둔량필의 친구인 복수홍(卜修洪)이 1210년에 쓴 발문이다.<ref>손백군, 『금나라 시대 여진어』, 태학사, 2015, p.35</ref>
 +
 
 +
*여진진사제명비(女眞進仕題名碑)
 +
[[파일:여진진사제명비(女真進士題名碑).jpg|섬네일|오른쪽|'''<여진진사제명비>'''<ref>사진 출처 :
 +
[http://www.ccamc.co/jurchen_intro.php 古今文字集成 '《女真進士題名碑》']<br /></ref>]]
 +
 
 +
금나라 애종(哀宗) 정대(正大) 원년(1224)에 새겼으며 1,100자 정도 남아있다. 정대 원년에 진사를 모집한 장소, 논제, 모집 과정과 모집한 진사의 출생지 등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원래 비석의 뒷면에 여진문을 새기고 비면(碑面)에는 대역 한문을 적었는데, 이후 비면을 하신묘비(河神廟碑)로 고치게 되면서 원래 새겨졌던 한문 역문이 지워졌다.<ref>손백군, 『금나라 시대 여진어』, 태학사, 2015, p.28-p.29</ref>
 +
 
 +
===문헌자료===
 +
 
 +
====『화이역어』<ref>진치총·진광핑, 『여진어와 문자』,경전, 2014, p.66~p.68 수정 인용</ref>====
 +
 
 +
현존하는 『화이역어』는 총 3가지이다.
 +
 
 +
*홍무(洪武) 『화이역어』
 +
 
 +
명나라 홍무 15년(1382)에 한림시강 화원결(火源潔)과 편수자인 마사역흑(馬沙亦黑)이 황제의 칙명을 받아 편찬했다. 간행본은 홍무 22년(1389)에 반포되었으며, 현재 몽골어와 그 발음을 한자로 표기한 것만 있다.  
 +
 
 +
*영락(永樂) 『화이역어』
 +
 
 +
명나라 영락 5년(1407)에 사이관(四夷館)을 설립하여 사이관에서 편찬한 것이다. 중국 변경의 각 민족의 어문과 아시아 각 이웃나라의 어문 기록이며, 편찬 목적은 왕래 문서의 번역을 위한 것이었다.  
 +
 
 +
*회동관 『화이역어』
 +
 
 +
명나라 모서징(茅瑞徵)이 자료를 수집했고 명대 회동관에서 편집했으며, 영락 『화이역어』보다 늦게 편집되었다. 그러나 이 역어에는 한자로 음을 표기한 여진어 발음만 있고 여진문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
====『여진역어』<ref>산로광명, 『사라진 여진문자 : 여진문자의 제작에 관한 연구』, 경진, 2015,p.22-p.23 요약</ref>====
  
==여진 문자의 자형 근간에 대한 논란==
+
현재 다양한 종류의 『여진역어』의 초본(抄本, 원본의 일부를 베끼거나 발췌한 문서)이 존재한다. 또한 영락 『화이역어』 중에서도 『여진역어』가 존재하는데, 이 또한 다양한 초본이 있다. 현재 베를린 도서관과 일본 동양문고, 영국 캠브리지 대학교 도서관 등에서 보관되고 있다.
앞에서 살펴봤듯이 『금사(金史)』의 두 기록에서도 여진 문자가 거란 문자의 조직 방법만을 취했는지, 아니면 자형(字形)까지 취했는지 의견이 다르다. 또한 현재 여진어와 문자에 대한 책들 또한 각각 다른 주장을 취하고 있다. 우선 두 문자 사이의 관계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다음 4가지 사항을 고려해야 한다.  
 
  
(1)거란 문자와 여진문자는 한자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
== '''참고문헌''' ==
  
(2)여진 문자가 창제되기 이전 대부분 여진 사람들은 거란 문자를 사용했으며, 새롭게 문자를 만들어 반포한 후에도 거란 문자 또한 여전히 사용했다.
 
 
(3)현재 거란 문자를 해독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어서 거란어 전체를 명료하게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4)여진문자에서 한자를 기초하여 필획을 조정한 글자와 거란 문자의 필획을 조정한 글자 모두 존재한다.  
+
======단행본======
 +
진치총·진광핑, 『여진어와 문자』,경전, 2014.<br>
 +
손백군, 『금나라 시대 여진어』, 태학사, 2015.<br>
 +
산로광명, 『사라진 여진문자 : 여진문자의 제작에 관한 연구』, 경진, 2015.
  
위의 사항들에 따르면, 한자를 바탕으로 한 여진 문자의 양이 많은 이유로 현재 거란 문자가 제대로 해독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여진 문자가 창제되었을 당시 한자의 자형뿐만 아니라 거란 문자의 자형 및 조직 방법을 취했다고 봐야할 것이다.  
+
======학술논문======
 +
신태현, 「女眞文字의 構造에 對하여」,vol.5, 1967.<br>
 +
이상규, 「"명왕신덕 사이함빈"의 대역 여진어 분석」, 『언어과학연구』, vol.63, 2012.<br>
  
==문자 제자(制字)원리==
+
======전자자료======
여진 문자의 제작 원리는 다음과 같다.
+
[https://zh.wikipedia.org/wiki/%E5%A5%B3%E7%9C%9F%E6%96%87#cite_note-2 维基百科 '女真文']<br />
====한자를 기초하고 필획을 증감하여 소리글자와 뜻글자를 만드는 방법====
+
[http://munja.yonsei.ac.kr/archives/archives_02_1_14.php 만주문자와 여진문자]<br />
(1) 한자의 필획을 바꾸어 만들었고 의미를 바꾸지 않은 경우
 
하늘(天) → [ɑbuxɑ]  동생(弟) → [dou] <br>
 
달(月)  → [biɑ]  이(二)  → [dʒuwə] <br>
 
나라(國) → [ɡuru]  육(六)  → [niŋgu] <br>
 
남(南)  → [fɑn]  십(十)  → [ʤuwɑ] <br>
 
서(西)  → [furi]  만(萬)  → [tumən] <br>
 
  
 
==각주==
 
==각주==
 +
 +
[[분류:중국문자]]

2018년 12월 17일 (월) 16:05 기준 최신판

여진문자로 적은 '여진문(女真文)[1]
방우로(方于魯)가 편집한『방씨묵포(方氏墨譜)』(정각본)에 새겨진 여진문자[2]

의미明王慎德、四夷咸賓
특징둥근 패 먹판에 새겨진 기록한 여진 대역문[3]

개요

여진족은 북방 민족의 한 갈래이며 (金)나라를 세운 민족이다. 즉, 여진어는 금나라 여진족이 사용하던 언어였으며, 여진문자는 금나라 태조 아골타(阿骨打)의 명에 따라 희윤(希尹)과 엽로(葉魯)를 비롯한 사람들이 만든 문자이며 1119년 반포되었다. 이후 희종(熙宗) 완안단(完顔亶)[4] 또한 여진문자를 만들어 1138년에 반포했다. 따라서 희윤 등이 만든 여진문자는 ‘여진대자(女眞大字)’라 하고, 희종이 만든 여진문자는 ‘여진소자(女眞小字)’라고 한다.[5]

창제 배경

여진 사람에게는 문자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완안부(完顔部)[6] 추장 완안석로(完顔石魯)[7] 때는 여진의 여러 부족 간에 사신이 왕래할 때 신패(信牌)를 사용했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전부 구술로 전달하였다. 또한 신패의 형식 또한 여진의 부(附)마다 통일되지 않아 완안석로의 손자 완안영가(完顔盈歌)가 신패를 개별적으로 만들지 못하도록 금지령을 내린 후에야 그 형식이 통일되었다. 당시 여진에는 문자가 없었기 때문에 사신으로 반드시 기억력이 좋은 사람을 선발했지만 이 또한 큰 불편함을 초래했다. 금나라의 태조 아골타는 요(遼)나라를 물리친 후에 사로잡은 한인과 거란인과도 거란문자 및 한자로 소통했으며, 이때부터 여진 귀족의 대부분은 거란 문자로 소통했다. 이 당시 국내 문서 기록이나 이웃 나라와의 통신은 대부분 거란문자를 채용했고, 이후 아골타가 희윤과 협로에게 명령해서 여진문자가 창제되었다. 이와 관련된 기록은 『금사(金史)』에서 확인할 수 있다.

“금나라 사람들은 처음에는 문자가 없었으나 나라가 점점 강성해지면서 이웃 나라와 교류할 때에도 거란문자를 사용하였다. 태조는 완안희윤에게 금나라의 문자를 만들고 제도를 준비하라고 명했다. 그래서 완안희윤은 한인의 해자(楷字)를 근거하여 문자체를 모방한 한편 거란자의 제도에 근거하여 본국 언어 상황에 걸맞은 여진문자를 만들었다.…태조는 크게 기뻐하고 반포할 것을 명령했다.……그 후에 희종은 여직자(女直字)를 만들었는데 완안희윤이 만든 여진문자와 함께 사용했다. 완안희윤이 만든 것을 여진 대자라 했고 희종은 만든 것을 소자라고 했다.” (『금사(金史)』 권73 <완안희윤전(完顔希尹>)[8]
“여직(女直)에는 처음에 문자가 없었으므로 요나라를 정벌하고 거란인과 한인을 사로잡았을 때에도 거란문과 한자로 소통하였다.……완안희윤은 거란문자를 모방하여 여진문자를 만들었다.” (『금사(金史)』 권66 <역전(易傳)>)[9]

보급 및 쇠퇴

여진문자는 1119년에 반포된 후 금나라 조정에서는 여러 지역에 학교를 설립하고 문자를 보급했다. 이후 태종 오걸매(吳乞買)가 협로를 상경(上京)에서 여진문자 교수를 담당하도록 했으며, 여진어 학습 성적이 좋은 학생들을 선발해 상경에서 공부시켰다. 이 학생들은 학업을 끝낸 후 여진문자 교수나 서리(書吏)로 여러 지역에 파견되었다.

1156년에는 시험용 여진어 책과 거란어 책이 만들어지기도 했으며, 세종 완안옹(完顏雍)은 1164년에 여진문자로 쓴 경서를 발표했고 여진문자를 공부할 학생으로 귀족들을 선발했는데 총 3,000명에 이르렀다. 1169년에는 각 지역의 학생 가운데 100명의 우수한 학생을 선발하여 북경(北京)에 보내 양식을 대주면서 경사와 시를 교육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금나라 멸망 후 중원지역으로 옮겨간 여진 사람들은 한족 사람들과 생활하면서 한족 문화의 영향으로 대부분 한어를 사용하고 한자로 소통하게 되었다. 동북지역에 남은 일부 여진 사람들은 명나라 전기까지 여전히 여진문자를 사용했지만, 나라와 나라의 통치 아래 대부분 여진 사람들이 몽골 문자보다 배우기 어려웠던 여진문자를 포기했다.

무엇보다 일반 사람들은 문자를 배울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금나라가 망한 후 문자를 알고 있는 사람은 통치자 계급의 사람들뿐이었고, 누르하치 때 몽골 문자에서 만주문자로 바꾸어 쓰라는 명령이 내려지기 전 이미 여진의 부락 간의 문서 왕래에는 몽골 문자가 사용되고 있었다. 결국 여진문자는 자연스레 중국의 고문자 중 하나가 되었다.

여진문자의 자형 근간에 대한 논란

앞에서 살펴봤듯이 『금사(金史)』의 두 기록에서도 여진문자가 거란문자의 조직 방법만을 취했는지, 아니면 자형(字形)까지 취했는지 의견이 다르다. 또한 현재 여진어와 문자에 대한 책들 또한 각각 다른 주장을 취하고 있다. 우선 두 문자 사이의 관계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다음 4가지 사항을 고려해야 한다.

(1)거란문자와 여진문자는 한자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2)여진문자가 창제되기 이전 대부분 여진 사람들은 거란문자를 사용했으며, 새롭게 문자를 만들어 반포한 후에도 거란문자 또한 여전히 사용했다.
(3)현재 거란문자를 해독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어서 거란어 전체를 명료하게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4)여진문자에서 한자를 기초하여 필획을 조정한 글자와 거란문자의 필획을 조정한 글자 모두 존재한다.

위의 사항들에 따르면, 한자를 바탕으로 한 여진문자의 양이 많은 이유로 현재 거란문자가 제대로 해독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여진문자가 창제되었을 당시 한자의 자형뿐만 아니라 거란문자의 자형 및 조직 방법을 취했다고 봐야할 것이다.

제자(制字)원리[10]

여진문자의 제작 원리는 다음과 같다.

한자를 기초로 제자(制字)[11]

  • 한자의 필획을 바꾸어 만들었고 의미를 바꾸지 않은 경우[12]

캡션 텍스트


  • 한자의 필획을 바꾸어 한어의 원음을 따랐으나 원래의 뜻을 따르지 않은 경우[13]

캡션 텍스트


  • 한어의 자형을 조금 바꾸고 독음만 조금 바꾸거나, 한어의 원자(原字)의 독음을 취하였지만 뜻은 취하지 않은 경우[14]

캡션 텍스트

거란문자를 기초로 제자(制字)1[15][16]

캡션 텍스트
다음 문자들은 금서에서 발견된 거란 문자에서 필획을 증감해 만든 것이다.

거란문자를 기초로 제자(制字)2[17][18]

캡션 텍스트
다음 문자들은 <금서묘소>에서 발견된 거란 문자와 동일한 여진문자이다.

여진문자는 사전에 소리글자와 뜻글자를 구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단음절에 뜻글자인 경우도 많지만 한 문자에 음절이 두 개에서 네 개까지 들어간 경우도 존재한다. 따라서 여진문자의 대부분은 정확히 복합표음문자(複音字)이다. 다음 문자들은 <금서묘소>에서 발견된 거란 문자와 동일한 여진문자이다.[19]

문자 사료

여진문자는 주로 문헌자료, 금석자료, 묵적자료, 그리고 도장이나 거울에서 발견된다. 이 중 연구에 핵심이 되는 문헌자료와 금석자료를 소개한다.

금석자료

행서체 여진문 <오둔량필시비>(파편)[20]
  • 오둔량필시비(奥屯良弼詩碑)

현존하는 유일한 행서체 여진문자 석각이다. 비문은 칠언율시 한 수이며, 상관에는 시와 지은이를, 하관에는 비석을 세운 사람을 기록했다. 『여진억어』를 참고해서 학자들이 비문을 고증하고 해석하였으나 『여진억어』의 기록 어휘가 한정되어 있고, 비문의 행서가 판독하기 어려워서 완벽히 해석되지는 못했다.[21]

  • 오둔량필전음비(奥屯良弼钱饮碑)
<오둔량필전음비>[22]

현존하는 여진문자비 중 하나로, 비심(碑心)에는 오둔량필(奥屯良弼)이 1206년에 쓴 한문 제자(題字, 비석에 쓴 글자)가 있다. 왼쪽에는 여진자 3행 60여자가 있는데 오둔량필의 친구인 복수홍(卜修洪)이 1210년에 쓴 발문이다.[23]

  • 여진진사제명비(女眞進仕題名碑)
<여진진사제명비>[24]

금나라 애종(哀宗) 정대(正大) 원년(1224)에 새겼으며 1,100자 정도 남아있다. 정대 원년에 진사를 모집한 장소, 논제, 모집 과정과 모집한 진사의 출생지 등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원래 비석의 뒷면에 여진문을 새기고 비면(碑面)에는 대역 한문을 적었는데, 이후 비면을 하신묘비(河神廟碑)로 고치게 되면서 원래 새겨졌던 한문 역문이 지워졌다.[25]

문헌자료

『화이역어』[26]

현존하는 『화이역어』는 총 3가지이다.

  • 홍무(洪武) 『화이역어』

명나라 홍무 15년(1382)에 한림시강 화원결(火源潔)과 편수자인 마사역흑(馬沙亦黑)이 황제의 칙명을 받아 편찬했다. 간행본은 홍무 22년(1389)에 반포되었으며, 현재 몽골어와 그 발음을 한자로 표기한 것만 있다.

  • 영락(永樂) 『화이역어』

명나라 영락 5년(1407)에 사이관(四夷館)을 설립하여 사이관에서 편찬한 것이다. 중국 변경의 각 민족의 어문과 아시아 각 이웃나라의 어문 기록이며, 편찬 목적은 왕래 문서의 번역을 위한 것이었다.

  • 회동관 『화이역어』

명나라 모서징(茅瑞徵)이 자료를 수집했고 명대 회동관에서 편집했으며, 영락 『화이역어』보다 늦게 편집되었다. 그러나 이 역어에는 한자로 음을 표기한 여진어 발음만 있고 여진문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여진역어』[27]

현재 다양한 종류의 『여진역어』의 초본(抄本, 원본의 일부를 베끼거나 발췌한 문서)이 존재한다. 또한 영락 『화이역어』 중에서도 『여진역어』가 존재하는데, 이 또한 다양한 초본이 있다. 현재 베를린 도서관과 일본 동양문고, 영국 캠브리지 대학교 도서관 등에서 보관되고 있다.

참고문헌

단행본

진치총·진광핑, 『여진어와 문자』,경전, 2014.
손백군, 『금나라 시대 여진어』, 태학사, 2015.
산로광명, 『사라진 여진문자 : 여진문자의 제작에 관한 연구』, 경진, 2015.

학술논문

신태현, 「女眞文字의 構造에 對하여」,vol.5, 1967.
이상규, 「"명왕신덕 사이함빈"의 대역 여진어 분석」, 『언어과학연구』, vol.63, 2012.

전자자료

维基百科 '女真文'
만주문자와 여진문자

각주

  1. 사진 출처 : 维基百科 '女真文'
  2. 사진 출처 : 위의 페이지
  3. 방우로의 『방씨묵포』의 ‘구국소저팔자’ 가운데 여진문자만 골라 기록한 여진 대역문이다. 출처 : 이상규, 「"명왕신덕 사이함빈"의 대역 여진어 분석」, 『언어과학연구』, vol.63, 2012, p.236-237
  4. 금나라 3대 황제. 1135년∼1149년 재위
  5. 그러나 여진대자와 여진소자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금사(金史)』를 비롯해 현재 발견된 기록이 없다. 현재 『금사』에는 희윤이 거란 문자를 모방하여 여진문자를 만들었다는 기록만 있을 뿐, 이 둘을 구분하는 방법이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위키백과에서는 대자와 소자 구분 없이 ‘여진문자’에 대해 설명했다.
  6. 12∼13세기 중국 동북부 일대에 금(金)나라를 세운 여진 민족
  7. 금나라가 세워지기 전 여진족의 추장. 1005년~1021년 재위
  8. 진치총·진광핑, 『여진어와 문자』,경전, 2014, p.102
  9. 위의 책, 같은 페이지
  10. 사진 및 인용 출처 : 진치총·진광핑, 『여진어와 문자』,경전, 2014, p.93~p.106
  11. 한자를 기초하고 필획을 증감하여 소리글자와 뜻글자를 만드는 방법
  12. 표 출처 : 진치총·진광핑, 『여진어와 문자』,경전, 2014, p.103
  13. 표 출처 : 위의 책, 같은 페이지
  14. 표 출처 : 위의 책, p.104
  15. 금서 거란 문자를 기초로 했고 필획을 증감하여 소리글자와 뜻글자를 만드는 방법
  16. 표 출처 : 위의 책, p.105
  17. 거란 문자를 직접 취하여 만드는 방법
  18. 위의 책, 같은 페이지
  19. 위와 같은 페이지 인용
  20. 사진 출처 : 손백군, 『금나라 시대 여진어』, 태학사, 2015, p.28
  21. 위의 책, p.29-p.30
  22. 사진 출처 : 北京市民族宗敎事务委委员会 '《奥屯良弼钱饮碑》局部 (女真文)'
  23. 손백군, 『금나라 시대 여진어』, 태학사, 2015, p.35
  24. 사진 출처 : 古今文字集成 '《女真進士題名碑》'
  25. 손백군, 『금나라 시대 여진어』, 태학사, 2015, p.28-p.29
  26. 진치총·진광핑, 『여진어와 문자』,경전, 2014, p.66~p.68 수정 인용
  27. 산로광명, 『사라진 여진문자 : 여진문자의 제작에 관한 연구』, 경진, 2015,p.22-p.23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