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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서는 일반적으로 진예(秦隸)와 한예(漢隸)로 나뉜다. 진나라 관리들이 늘어나는 행정업무에 발맞추어 서사의 편의를 위해 소전 대신 사용한 자체가 진예이고, 한나라에서 본격적으로 사용되고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해서의 직접적인 모체가 되는 자체가 한예이다. 또 시기상으로 구분하여 진예를 고예(古隸-옛 진나라의 예서)라 하고, 한예를 금예(今隸-지금 한나라의 예서)라고 한다.<ref>공상철 외(2001), 중국, 중국인 그리고 중국문화, 다락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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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25일 (일) 18:53 판

예서.jpg

개요

시대가 복잡해지면서 전서를 간략화 시킨 예서가 출현하게 되었으며, 이는 진나라때 발원하여 隸人 정막이 만들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나 민간인들이나 하급관리들 사이에 이미 서서히 변화가 진행되어 온 서체로 진나라의 사무가 번잡하고 많아지자 전서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워 획을 간략히 하면서 생겼다. 이 예서는 한 대에 이르러 정치 경제적인 안정과 더불어 장식적인 조형성을 가미하여 팔분예서로 변화 발전하였다.[1]

기원

隸書라는 명칭을 가장 먼저 사용한 책은 한나라의 班固의『漢書˙藝文志』에 "감옥에 일이 많아지자 간단하고 쓰기 쉬운 문자를 개발하여 노예들의 일을 다루는데 사용하였다." 라고 하였다. 許愼의『說文解字˙序』에서도 "관청의 감옥이 일이 많아짐에 따라 처음으로 간략하고 쓰기 편한 예서로 일을 신속히 처리 하였다." 라고 하였다. 이로써 예서라는 명칭의 사용은 漢代때 부터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예서의 자양적 기틀은 오랜 역사적, 사회적 필연에 의해서 사용하게 되었다. 秦系文字 자료를 보면 春秋以後부터 점점 그 형태가 예서와 가까워지다가 춘추말기에 이르러 예서의 풍격을 띄게 된다. 이는 육국문자가 草率해지면서 이것이 바로 예서의 先導가 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현재까지 출토되고 있는 자료를 근거로 할 때 戰國初期는 예서가 형성된 시기임이 확실하다.[2]

특징

진예(秦隸)와 한예(漢隸)

예서는 일반적으로 진예(秦隸)와 한예(漢隸)로 나뉜다. 진나라 관리들이 늘어나는 행정업무에 발맞추어 서사의 편의를 위해 소전 대신 사용한 자체가 진예이고, 한나라에서 본격적으로 사용되고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해서의 직접적인 모체가 되는 자체가 한예이다. 또 시기상으로 구분하여 진예를 고예(古隸-옛 진나라의 예서)라 하고, 한예를 금예(今隸-지금 한나라의 예서)라고 한다.[3]

참고자료

각주

  1. 이승연(2008), 書體에 나타난 書藝美學 연구 : 漢字의 書體 演變을 중심으로, 원광대학교
  2. 허현자(2004), 隸書의 書藝美 硏究, 전주대학교 교육대학원
  3. 공상철 외(2001), 중국, 중국인 그리고 중국문화, 다락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