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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개요==
: 이 문서에서 다루는 것은 모든 몽골 울루스의 역사가 아닌, 중국과 몽골 초원을 중심으로 하는 칸 울루스의 역사를 중심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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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빌라이가 1271년 수립한 중국과 몽골 초원지대, 그리고 만주와 연해주 지역을 기반으로 한 몽골족 왕조. 쿠빌라이가 칸의 자리를 놓고 계승 전쟁을 펼치는 와중에 다른 형제들과 가문들의 자치권을 인정해주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지역이 위의 그림과 같은 범위였다. 쿠빌라이는 지역의 국호를 대원(몽골 말로는 다이온 예케 몽골 울루스, 대원대몽골국)이라 붙이고 지금의 북경인 대도와 카라코룸을 중심으로 이 지역들을 다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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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인의 입장에서 본 대원 울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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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 울루스는 몽골인들의 정복에 의해 성립되었고, 기존에는 중국이 아니었던 부분까지 포함하고 있는, 세계적인 대국가였다. 대원의 칸들은 스스로를 초원 지대의 칸이자 모든 울루스들의 칸인 대칸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비록 다른 울루스들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는 못하더라도 연대가 존재했으며, 이것이 울루스들 사이의 활발한 정치, 경제, 문화적 교류를 촉발시켜 팍스 몽골리카를 탄생시켰다. 대원 울루스는 다양성과 통합을 통해 국제적인 제국을 건설했다. 상인들과 선교사들, 그리고 수많은 여행가들이 동아시아에서 유럽까지 오가면서 문화를 교류하고 상품을 판매하였으며, 기술을 전파했다. 이를 통해 각지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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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 울루스의 역사]]===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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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 울루스의 사회와 문화]]===
  
===[[쿠빌라이 칸]](원 태조)의 시기(1260~1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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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의 입장에서 본 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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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골 치하의 한인들은 사회적, 정치적으로 차별받는 존재들이었다. 북중국 지역에 살던 한인과 남중국 지역에 살던 한인인 남인은 가장 낮은 계층의 사람들로 대우받았고, 한인들은 정치적으로 상위 직위에 올라가는 것이 불가능했다. 과거 제도는 대원의 후반기에나 시행되엇으며, 선발 인원도 적고 불리했다. 그리하여 지식인들의 사회적 위치가 낮아지면서 한인들의 사회와 문화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서민 문화가 꽃피었으며, 몽골인들의 후원 아래 각종 공연이 발전하고 원곡이라고 불리는 장르가 발전했다. 그러나 한인들은 몽골 제국 전역에 퍼지고 있던 문화들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를 지키는 일이 우선시했다다. 몽골의 정복과 군사적 위협에 대해 보수적으로 대응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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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의 한인 역사]]===
  
====쿠빌라이와 아릭 부케의 권력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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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의 한인 사회]]===
  
:뭉케가 사천 조어산에서 갑자기 죽으면서 후계자 자리를 둘러싼 권력 다툼이 일어났다. 뭉케의 세 아우가 남았는데 쿠빌라이, 훌레구, 아릭 부케였다. 이 중에서 훌레구는 페르시아를 담당하고 있었으므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러므로 자연히 쿠빌라이와 아릭 부케 사이의 경합이 벌어졌다. 막내인 아릭 부케는 몽골 본토의 총독이며 수도 카라코룸의 지배자였다. 그는 몽골리아의 지배자로서 [[쿠릴타이]]를 그 땅에서 소집하여, 자신의 칸 선출을 확실하게 할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쿠빌라이가 그를 앞질렀다. 쿠빌라이는 자신의 본부가 있던 상도에서 자신의 일파의 추대를 받아 칸으로 선언되었다. 칭기즈 칸 가문의 법에 따르면 서두른 이 선출은 무효였다. 전통적으로 [[쿠릴타이]]는 몽골리아에서 적절하게 미리 소집된 칭기즈 칸 일족인 네 울루스의 대표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려야 했다. 결국 아릭 부케도 카라코룸에서 칸의 칭호를 취함에 따라 둘의 대결은 시간 문제가 되었다. 쿠빌라이는 중국의 장군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인 뒤에 북진을 시작했다. 쿠빌라이는 1260년 말 옹긴 강까지 북진해 겨울을 나고, 아릭 부케는 예니세이 강 상류로 후퇴하였다. 그러자 쿠빌라이는 전쟁이 끝난 것으로 여기는 실수를 저질러, 카라코룸에는 평범한 수비대만 남기고 중국으로 돌아갔다. 이에 1261년 말 아릭 부케가 돌아와 수비대를 몰아내면서 고비 변두리에서 두 번의 전투가 있었다. 그러나 아릭 부케는 차가타이 울루스를 지배하고 있던 알구가 쿠빌라이의 편으로 돌아서면서 마침내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갑작스러운 이런 배신은 쿠빌라이가 훌레구와 알구에게 정치적 자유를 약속해주고, 그들이 장악하고 있던 제국의 지배권을 분할해줬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다.
+
===[[대원의 한인 문화]]===
  
====쿠빌라이 칸 시기의 정벌 - 남송 정복====
+
==인물==
: 가족 간의 경쟁을 종결지은 쿠빌라이는 송 제국에 대한 자신의 시도를 재개할 수 있었다. 그는 유능한 지휘관인 바얀과 아주를 거느리고 위구르인 아릭 카야의 지원을 받는 행운을 누렸다. 1268년 아주는 양양과 번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이슬람 기술자와 공성기계를 통해 1273년에 그들은 번성을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고, 곧 이어 양양의 수비자인 여문환이 양양을 바쳤다. 그 뒤 바얀과 아주는 양자강 하류로 내려가 동부 호북, 안휘 그리고 강소의 거점들을 굴복시켰다. 다음에 절강을 침공하여 상주를 취하고, 송의 수도인 항주를 1276년 1월에 점령하였다. 아릭 카야는 호남의 중요한 도시인 장사와 광서의 계림을 함락하였다. 중국의 마지막 저항군들은 장세걸의 지도아래 그들의 함대를 끌고 해외로 피난하였다. 1279년 4월 3일 이 함대는 광주 남서쪽 애산도 근처에서 몽골 함대의 공격을 받아 파괴되고 흩어졌다. 이로써 마침내 몽골은 중국 전역을 장악하게 되었다.
+
* [[마르코 폴로]]
 
+
* [[카르피니]]
====쿠빌라이 칸과 카이두의 대결 – 계속되는 내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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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븐 바투타]]
: 쿠빌라이의 집권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쿠빌라이가 속한 톨루이 가문의 탄압과 숙청에 반발한 우구데이⋅차가다이 가문이 반발하면서 초원 지대의 내전은 격화되었다. 우구데이 가문의 지도자였던 카이두는 탈라스에서 독자적으로 쿠릴타이를 열어 초원지대의 지배권을 칸의 동의 없이 분할했으며, 마침내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했다. 이것은 쿠빌라이를 배제한 채 이루어진 것이었기 때문에 쿠빌라이에 대한 도전이었으며, 카이두는 쿠빌라이의 계속된 복속 요구를 거절함으로써 내전은 격화되었다. 이 내전은 쿠빌라이의 생전에는 진압되지 않았고, 쿠빌라이의 다음 칸이었던 테무르의 시대에 카이두가 사망하면서 진압되었다.
 
 
 
====쿠빌라이 시대와 칸 울루스의 성립====
 
: 쿠빌라이가 칸의 위치에 올라가면서 중앙아시아에 위치한 알구와 훌레구에게 정치적 자유를 약속했기 때문에, 쿠빌라이의 직접적인 통치가 미치는 지역은 몽골 초원과 북중국, 티베트와 하서 지방 정도였다. 당시 몽골인들은 쿠빌라이와 그의 후계자들이 통치하던 이 지역을 ‘칸 울루스’라고 불렀다. 쿠빌라이는 제국의 수도를 카라코룸에서 상도로 옮겼으며, 폐허가 된 여진의 수도인 중도 부근에 새 도성을 축조했는데, 이것이 지금의 베이징 지역에 위치한 대도였다. 칸은 상도와 대도를 왕복하며 여름과 겨울을 보냈다. 이렇게 계절에 따라 수도를 옮기는 것은 유목민 계열 국가들의 특징으로, 후에 등장하는 청 역시 여름과 겨울을 다른 수도에서 보냈다.
 
: 칸 울루스는 중서성과 그 파견 기관인 10여 개의 행중서성이 관할하는 지역들로 나뉘었다. 만주와 몽골 초원에는 요양행성과 영북행성이, 고려에는 정동행성이 설치되었다. 중서성과 행성 아래에는 로⋅부⋅주⋅현을 두었고 일부 지역에는 행정과 군사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선위사를 두었다. 또한 군사를 담당하는 추밀원과 감찰을 담당하는 어사대가 있었고, 지방에는 행추밀원과 행어사대가 설치되었다.
 
: 쿠빌라이는 수적으로 절대 열세인 몽골인들로 넓은 지역을 통치해야 했기 때문에 다양한 제도를 도입했다. 그는 몽골인을 다루가치로 삼고 한인과 색목인들을 하위 직책에 배치해 영토를 통치하려 했다. 한인과 남인은 고위직과 중요 직책에서 배제되었으며, 차별 대우를 받았다.
 
  
====쿠빌라이칸과 국제 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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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스 일족의 주요 인물 계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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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칭기스 칸]](太祖, 1206-1227)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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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구데이 (太宗, 1229-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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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육 (定宗, 1246-1248)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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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뭉케 (憲宗, 1251-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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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빌라이]] (世祖, 세첸 카안, 1260-1294)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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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무르 (成宗, 울제이투 카안, 1294-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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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이샹 (武宗, 쿨룩 카안, 1307-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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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유르바르와다 (仁宗, 부얀투 카안, 1311-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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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데발라 (英宗, 게겐 카안, 1320-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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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순 티무르 (泰政帝, 1323-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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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라기박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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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실라 (明宗, 쿠툭투 카안,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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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툭 티무르 (文宗, 자야투 카안, 1328-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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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린지발 (寧宗,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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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곤 티무르 (順帝, 우하투 카안, 1333-1370)
 +
* 아유르시리다라 (1370-1378)
 +
* 투쿠스 티무르 (1379-1388)
  
 
==참고도서==
 
==참고도서==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르네 그루세 지음, 김호동 옮김
+
* 김호동,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
 
+
* 토마스 바필드, 『위태로운 변경』
몽골 세계제국, 스기야마 마사야키
+
* 김호동,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
 
+
* 조관희, 『조관희 교수의 중국사 강의』, 궁리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 김호동
+
* 신성곤·윤혜영,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서해문집
 
+
* 박문호의 자연과학 세상, 『몽골』, (주)엑셈
위태로운 변경, 토마스 바필드
+
* 김종래, 『유목민 이야기』, 꿈엔들
 
+
* 박한제 외 3명, 『유라시아 천년을 가다』, 사계절
元史, krause역
+
* 김학주, 『중국 문학사』
 
+
* 데이비드 O.모건, 『몽골족의 역사』, 권용철 역, 모노그래프, 2012.
몽골비사, 유원수 역주
+
* 라시드 앗 딘, 『칸의 후예들』, 김호동 역, (주)사계절, 2005.
 
+
* 마르코 폴로, 김호동 역, 『동방견문록』, 사계절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 김호동 지음
+
* 패트리샤 버클리 에브리,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케임브리지 중국사』, 시공사
 +
* 발레리 한센, 신성곤 역, 『열린 제국: 중국, 고대-1600』, 까치
  
 
==관련 문서==
 
==관련 문서==
 
*[[몽골]]
 
*[[몽골]]
 
*[[쿠릴타이]]
 
*[[쿠릴타이]]

2016년 6월 27일 (월) 17:34 기준 최신판

개요

카안 울루스.png

쿠빌라이가 1271년 수립한 중국과 몽골 초원지대, 그리고 만주와 연해주 지역을 기반으로 한 몽골족 왕조. 쿠빌라이가 칸의 자리를 놓고 계승 전쟁을 펼치는 와중에 다른 형제들과 가문들의 자치권을 인정해주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지역이 위의 그림과 같은 범위였다. 쿠빌라이는 이 지역의 국호를 대원(몽골 말로는 다이온 예케 몽골 울루스, 대원대몽골국)이라 붙이고 지금의 북경인 대도와 카라코룸을 중심으로 이 지역들을 다스렸다.

몽골인의 입장에서 본 대원 울루스

대원 울루스는 몽골인들의 정복에 의해 성립되었고, 기존에는 중국이 아니었던 부분까지 포함하고 있는, 세계적인 대국가였다. 대원의 칸들은 스스로를 초원 지대의 칸이자 모든 울루스들의 칸인 대칸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비록 다른 울루스들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는 못하더라도 연대가 존재했으며, 이것이 울루스들 사이의 활발한 정치, 경제, 문화적 교류를 촉발시켜 팍스 몽골리카를 탄생시켰다. 대원 울루스는 다양성과 통합을 통해 국제적인 제국을 건설했다. 상인들과 선교사들, 그리고 수많은 여행가들이 동아시아에서 유럽까지 오가면서 문화를 교류하고 상품을 판매하였으며, 기술을 전파했다. 이를 통해 각지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대원 울루스의 역사

대원 울루스의 사회와 문화

한인의 입장에서 본 대원

몽골 치하의 한인들은 사회적, 정치적으로 차별받는 존재들이었다. 북중국 지역에 살던 한인과 남중국 지역에 살던 한인인 남인은 가장 낮은 계층의 사람들로 대우받았고, 한인들은 정치적으로 상위 직위에 올라가는 것이 불가능했다. 과거 제도는 대원의 후반기에나 시행되엇으며, 선발 인원도 적고 불리했다. 그리하여 지식인들의 사회적 위치가 낮아지면서 한인들의 사회와 문화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서민 문화가 꽃피었으며, 몽골인들의 후원 아래 각종 공연이 발전하고 원곡이라고 불리는 장르가 발전했다. 그러나 한인들은 몽골 제국 전역에 퍼지고 있던 문화들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를 지키는 일이 우선시했다다. 몽골의 정복과 군사적 위협에 대해 보수적으로 대응했던 것이다.

대원의 한인 역사

대원의 한인 사회

대원의 한인 문화

인물

칭기스 일족의 주요 인물 계보도

  • 칭기스 칸(太祖, 1206-1227)
  • 우구데이 (太宗, 1229-1241)
  • 구육 (定宗, 1246-1248)
  • 뭉케 (憲宗, 1251-1259)
  • 쿠빌라이 (世祖, 세첸 카안, 1260-1294)
  • 티무르 (成宗, 울제이투 카안, 1294-1307)
  • 카이샹 (武宗, 쿨룩 카안, 1307-1311)
  • 아유르바르와다 (仁宗, 부얀투 카안, 1311-1320)
  • 시데발라 (英宗, 게겐 카안, 1320-1323)
  • 이순 티무르 (泰政帝, 1323-1328)
  • 아라기박 (1328)
  • 코실라 (明宗, 쿠툭투 카안, 1329)
  • 툭 티무르 (文宗, 자야투 카안, 1328-1332)
  • 이린지발 (寧宗, 1332)
  • 토곤 티무르 (順帝, 우하투 카안, 1333-1370)
  • 아유르시리다라 (1370-1378)
  • 투쿠스 티무르 (1379-1388)

참고도서

  • 김호동,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
  • 토마스 바필드, 『위태로운 변경』
  • 김호동,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
  • 조관희, 『조관희 교수의 중국사 강의』, 궁리
  • 신성곤·윤혜영,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서해문집
  • 박문호의 자연과학 세상, 『몽골』, (주)엑셈
  • 김종래, 『유목민 이야기』, 꿈엔들
  • 박한제 외 3명, 『유라시아 천년을 가다』, 사계절
  • 김학주, 『중국 문학사』
  • 데이비드 O.모건, 『몽골족의 역사』, 권용철 역, 모노그래프, 2012.
  • 라시드 앗 딘, 『칸의 후예들』, 김호동 역, (주)사계절, 2005.
  • 마르코 폴로, 김호동 역, 『동방견문록』, 사계절
  • 패트리샤 버클리 에브리,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케임브리지 중국사』, 시공사
  • 발레리 한센, 신성곤 역, 『열린 제국: 중국, 고대-1600』, 까치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