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진남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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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개관

위진남북조는 동한 말의 건안년간(196-219)로부터 수(隨)나라 개황 9년(589) 진(陳)나라가 멸망한 시기까지 400년 동안을 말한다. 위진남북조 연표.png


삼국시대

  • 220년

조조(曹操)가 사망하자 조비(曹丕)가 위를 이어받아 승상 위왕에 올랐다. 연호를 건안(建安) 25년에서 개원하여 연강 원년(延康元年)으로 바꾸었다. 10월, 헌제는 어사대부 장음(張音)에게 조서를 들게 하고, 옥새를 받들어 조비에게 제위를 선양하며 말했다.

“짐이 재위한지 삼십년 동안 천하가 흔들리고 뒤집혔으나 다행히 조종(祖宗)의 혼령 덕분에 위기를 벗어나 다시 존립했소. 그러나 이제 천상(天象)을 우러르고 민심을 굽어 살피니 화정(炎精)의 기수 이미 끝나고 행운(行運)이 조씨에게 있소. 이에 전왕(前王: 조조)은 이미 신무 (神武)의 공을 세우고 금왕(今王: 조비)도 명덕을 비춰 그 기대에 응했소. 역수(曆數)가 이렇게 분명하니 믿어 알 수 있소. 무릇 대도지행(大道之行: 대도가 행해짐)이면 천하위공(天下為公: 천하를 모두 향유하게 됨)이라 했소. 당요(唐堯: 요임금)는 아들을 위해서 삿되지 아니해 이름을 무궁히 전하소. 짐도 남몰래 이를 우러러 본받고자 했소. 이제 마땅히 요임금의 모범을 따라 승상 위왕에게 선위하니 위왕은 사양치 마시오!"

조비는 몇 번이나 사양했으나, 여러 번 권한 후 10월 28일에 비로소 번양(翻揚)에 제단을 세워 관위에 따라 백관을 배석시키고 제위에 올랐다. 연호를 연강에서 황초(黃初)로 바꾸고 전국적으로 대사면령을 내렸다. 위문제(魏文帝-조비)는 황초 원년(220) 11월 1일 헌제 유협에게 1만 호의 식읍을 주고 산양공(山陽公)으로 봉하였다.-조부인 태왕 조숭(曹嵩)을 태황제(太皇帝)라고 하였으며, 부친 무왕에게 무황제(武黃帝)의 칭호를 바쳤다.

  • 221년

6월, 조비는 부인 견씨가 자신에 대한 총애가 줄었다는 이유로 자신을 원망하자 견씨를 죽이고 업에 매장한다. 8월, 손권이 몸소 번국이 되기를 청하자 그를 대장군으로 임명하고 오왕으로 봉하였다. 조비는 포로로 사로잡혀 있던 우금이 돌아오자, 그를 위로하며 안원장군으로 삼았다. 그러나 우금이 참배하러 간 조조의 묘에 자신이 수치스럽게 항복하는 모습을 그려놓게 하였다. 우금은 그것을 보고 화병으로 앓다가 죽었다.

  • 226년

5월, 조비가 제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깊은 병을 얻었고, 조예를 황태자로 책봉한다. 위문제는 조진, 진군, 조휴, 사마의 등으로 하여금 조예를 보필하게 하고, 17일에 4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6월, 조예는 조비의 손에 죽은 견씨에게 문소황후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이후 견씨의 친족들을 중용하는 등 어머니의 죽음을 늘 신경 쓰며 살았다. 8월, 손권이 강하를 공격하지만, 태수인 문빙이 굳건히 지켰다. 조정에서 구원군을 보낼 것을 건의하지만, 조예는“손권은 수전에 익숙한데, 감히 배에서 내려 뭍에서 공격하는 까닭은 (우리가) 대비하지 못한 것을 엄습하기를 바랐기 때문이오. 지금은 문빙과 서로 대치하고 있으며, 공격이란 수비하는 세력보다 두 배는 있어야 하므로, 끝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오.” 라 하였고, 이내 손권은 퇴각하였다. 또한 제갈근이 양양을 공격하였으나 사마의가 이를 격파하였다.

  • 228년

220년, 촉장이었던 맹달은 유장을 배신하고 유비에게 귀순하였으나, 조비가 제위에 올랐을 때 다시 위에 투항하고, 재주가 뛰어나 조비의 총애를 받았다. 사마의는 그러한 그를 신임해서는 안 된다고 간언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오히려 맹달은 신성태수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226년 조비가 사망하자 그의 위치는 불안해졌고, 이에 227년에 제갈량이 평소 맹달을 미워하던 신의에게 곽모를 거짓 투항시켜 위나라와 맹달의 사이를 이간함으로써 요지인 상용을 지키고 있는 그가 촉으로 다시 귀순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이를 눈치 챈 사마의는 맹달에게 그를 신임한다는 전언을 보냄으로써 그를 안심시키고, 신속하게 진군하여 방심하고 있는 맹달을 공격하여 그를 사로잡아 참수한다.

4월, 위나라는 오 토벌군을 일으켜 강릉과 심양에 각각 사마의와 조휴를 주둔시킨다. 조휴는 오의 파양태수 주방의 거짓 투항에 속아 적진 깊숙이 들어갔다가 육손과 주방의 군대에 참패하고 석정으로 후퇴한다. 가규가 급히 와서 조휴를 구원했음에도, 조휴는 평소 사이가 나빴던 가규를 모함한다. 조휴는 이 일로 인해 등에 악성 종기가 생겨 죽었다.

  • 230년

대장군 조진은 촉을 토벌할 것을 건의하였고, 조예가 이를 승낙하였다. 8월, 대사마 조진과 대장군 사마의는 조예의 조칙을 받아, 조진은 자오곡에서 남쪽을 향해 진군하였고, 사마의는 한수를 따라 서성을 통하여 한중에서 합류하기로 하였다. 9월, 폭우가 계속되어 이수, 낙수, 황하, 한수 등이 범람하여 잔도가 끊어지자 조진 등은 퇴각하였다.

  • 231년

제갈량이 또다시 군사를 보내 기산을 포위하자, 병든 조진 대신에 사마의가 장합, 비요, 대릉, 곽회 등을 지휘하여 출진한다. 사마의는 비요로 하여금 상규를 지키게 하고 기산을 구원하였다. 곽회와 비요는 제갈량에게 패퇴하였고, 사마의는 영채를 지어 방비를 굳힌 채 출진하지 않았다. 장합은 사마의에게 "저들이 멀리서 와서 우리와 맞서는데 싸우기를 청하여도 공께 허락을 얻지 못하는 것은 저들과 싸우지 않는 것이 우리에게 이롭다 여기시고, 장구(長久)한 계책으로 저들을 제압하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물며[且] 기산의 백성은 우리의 대군(大軍)이 근처에 있음을 알고 사람마다 지켜내고자 하는 마음이 절로 굳세게 되었을 것이니 이곳에 잠시 주둔하였다가 군사를 나누어 기병(奇兵)으로 삼아 제갈량의 후방을 칠 것처럼 보이시면 제갈량은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하고 감히 기산을 더 이상 핍박치도 못할 터이니, 이대로 주저앉아 민망(民望)을 잃지 마소서. 제갈량은 현군(縣軍-후방의 지원이 없는 군대)으로 군량이 적으니 역시 얼마 안 있어 떠나갈 것입니다." 하며, 제갈량을 기습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사마의는 이에 따르지 않았다. 이에 제장들이 사마의가 촉을 겁내는 것이라 여기자, 사마의는 한스러워하며 5월에 군사를 출진시키지만 위연, 고상, 오반 등에게 패배한 후 다시 방어를 굳혀 출진하지 않는다. 제갈량이 군량이 떨어져 퇴각하려 하자 장합에게 제갈량을 추적할 것을 요구한다. 장합이 말하길, “군법(軍法-병법)에서 성을 포위할 때는 반드시 출로를 열어두고, 퇴각하는 군사는 쫓지 말라 했습니다.” 그러나 사마의가 이를 들어주지 않자 장합은 부득이하게 진군하였으나, 제갈량의 복병에 의해 오른쪽 다리에 화살을 맞고 죽는다.

  • 234년

3월, 산양공 유협이 세상을 떠나니, 명제는 유협의 장례식을 치러주었다. 4월, 제갈량이 10여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위남에 영루를 세우니, 조예는 진랑에게 보병과 기병 2만을 주어 사마의를 돕도록 하였다. 제갈량은 사마의를 도발하기 위해 사마의에게 자주 사자를 보내 편지를 전하고, 건괵(여성이 쓰던 두건과 머리장식)을 보냈다. 이에 사마의는 제갈량과 싸우기를 원했으나, 조예는 “단지 성벽을 굳게 지켜 촉나라 군대의 날카로운 기운을 꺾음으로 그들로 하여금 나아가 공격할 수 없게 하고, 물러나 싸울 수 없게 하여 오랫동안 머물게 하면 군량미가 부족할 것이다. 설령 사방에서 약탈을 자행해도 얻는 것이 없다면 반드시 군대를 물릴 것이다. 달아나는 적을 추격할 때는 아군을 안전한 상태에 놓고 오랜 시일 동안 피곤해진 적군을 공격하여 완전한 승리를 얻어야 한다.”라며 허락하지 않았다. 이후에 또 제갈량이 싸움을 걸자 사마의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출전하려 하였지만, 명제가 신비로 하여금 부절을 지니고 막아서게 하니, 사마의는 결국 싸우러 나가지 못하였다. 8월, 병이 깊어진 제갈량이 병사했고, 촉의 군대는 물러갔다. 사마의는 촉의 군대가 후퇴한 진영을 살펴본 뒤, “천하의 기재로다.” 라며 감탄하였다. 신비가 아직 제갈량이 죽었는지 확신할 수 없다고 하자 사마의는 “군가에서 중히 여기는 것이 군서(軍書), 밀계(密計), 병마(兵馬-병졸과 군마)가 먹는 양곡(糧穀)인데, 이제 이들을 모두 내버렸으니 자신의 오장(五藏)을-오장에서 五는 숫자 5라기 보다는 중요한 것을 나타내는 의미 정도로 쓰인 것이다-내버린 자가 어찌 살아 있겠소? 의당 급히 추격해야 하오.” 라며 촉군의 후미를 추격했다. 그러나 촉군이 갑자기 뒤돌아서 공격해오는 듯 하자 사마의는 놀라서 군대를 퇴각시켰다. 이에 백성들이 “죽은 제갈(諸葛)이 살아있는 중달(仲達)을 달아나게 했다.”(死諸葛走生仲達) 고 하였다. 그러자 이야기를 들은 사마의는 웃으며 말했다. “나는 산 자를 헤아릴 수는 있으나 죽은 자를 헤아릴 수는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서진

동진

5호 16국 시대

남북조 시대

남조

북조

사회와 경제

9품중정제

9품중정제로 호족의 문벌 귀족화, 호족의 대토지소유 ('중정관'이라는 직책의 문신이 9개 품으로 나눠 관직을 임의로 정해주는 파격적인 인사 정책이다. 처음에는 잘지켜졋으나 후기에 관직을 사고파는 문제와 기득권의 귀족화로 결국 '문벌귀족사회'라는 암적인 존재를 낳는다.)

-귀족제의 실시

위진남북조, 특히 위진 · 남조 시대는 정치와 사회 체제로서 귀족제가 보편적이었다. 귀족은 당시 정치와 사회를 이끌어 가는 중심세력으로서 군주의 권력을 일정 정도 제약하여 서양 중세의 영주에 비견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러나 서양의 영주처럼 장원 등 경제력이나 군사력을 반드시 보유하고 있지는 않았으므로 문인 귀족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들 귀족계층은 외척과 환관의 정치개입에 반대하여 당쟁을 벌였던 후한 말 청류파에 그 사상적 원류를 두고 있다. 이들이 세습적인 지배세력으로 군림하게 된 것은 구품관인법(九品官人法)의 시행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왕·사 씨로 대표되는 북방 교민 귀족들은 강남 토착 호족인 주·장·고·육 씨 등과 협력하여 동진에서 귀족제를 부활시켰다. 동진 건국과정에서 공훈을 세운 왕씨는 “와과 사마가 함께 천하를 다스렸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그 세력이 대단했다. 이 말은 귀족세력이 군주의 권력을 제약했다는 측면도 있지만 국사에서 그만큼 책임감을 갖고 관여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송 이후 왕조에서는 낮은 가문 출신의 창업자가 계속 출현함에 따라 귀족과 군주는 별개로 움직였다. 귀족은 관직과 가문의 안전을 유지하는 데만 관심을 쏟을 뿐 국사에는 무관심했다. 귀족의 실무에 대한 무관심과 무능은 한문(寒門)·한인(寒人)들의 정치참여를 초래했고, 송·제·양·진은 한문들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게 되었다.
그 가운데 양 무제는 한문·한인과 귀족층을 결합한 통일적 관료체제를 지향하는 소위 천감개혁을 실시하여 지배층의 분열을 봉합하려 했다. 그 결과 ‘50년간 강남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태평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양 말에 일어난 후경의 난의 진압과정에서 남조 귀족의 무능함이 유감없이 드러났을 뿐만 아니라 귀족들이 대량 살육됨으로써 귀족제는 사실상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강남지역

강남지방의 경제적 개발 촉진: 한족들의 강남이주, 벼농사 널리보급 [동양사]위진남북조 시대 사회, 경제, 문화

종교

<太平廣記 佛敎類 故事 硏究-佛敎素材의 受容과 變容을 중심으로.2013>참고하기


유교 사상은 국교로서 한 대를 풍미했으나, 위진남북조 시대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유일한 권위가 될 수 없었다. 노자 · 장 계보를 이은 도가 사상과 개인 구제를 기구하는 신앙이 합쳐져 도교가 확립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후한 초기의 실크로드를 타고 서방에서 유입한 불교 사상과 신앙이 비로소 중국인들에게 수용되기 시작했다. 유 · 불 · 도 삼교가 병립하여 인간 정신의 진폭을 크게 넓히자 이런 사상적 다양성 아래서 새롭고 더욱 확실한 가치가 모색되고 있었다.

도교

- 민중과 황제의 종교, '불교' -
확실한 교설도 없으며 제창한 교조도 없는 것이 특징인 도교는 내세보다 현생의 삶 자체에 기본적인 전제를 두고 욕구 추구를 근본적인 목적으로 삼고 있었다. 충실한 삶과 그러한 삶을 무한히 연장하려는 욕구를 신비적 실천이나 수양에 의하거나 혹은 초인간적인 힘에 의지하여 달성하려는 것이 바로 도교였다. 후한 말 장각(張角)의 태평도와 삼장(三張)의 오두미도에서 나름의 교법을 갖고 그것에 기초한 교단이 조직되었지만, 신도로서 일체감을 갖는 시기는 동진 말과 남북조 초가 되어서였다. 초기 도교 신도의 핵심 구성원은 유망 농민이거나 파산 또는 궁핍한 농민이었다. 도교는 한중 지역에서 종교왕국을 건설한 사천의 성한(成漢)정권에서 세력을 확대한 바 있고, 북위 시대 구겸지의 활약으로 불교 대신 국교의 지위를 차지한 적이 있으며, 남조 도교에서 보듯이 어용 · 관방화한 측면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반왕조적 · 민중적 성격의 종교였다.
불교가 본격적으로 중국에 정착하게 된 것은 서역과 관련이 깊은 유목민들이 화북을 지배한 오호십육국 시대부터였다. 불교는 호조군주들에게 화이론적 차별의 대상이 아니었다. 또한 초자연적인 힘으로 재난을 물리치고 전쟁에서도 예견 능력을 발휘하는 신이승(神異僧)은 그 시대 상황과 부합하여 특별한 존재로 부각되었다. 불도징이 후조 왕조에 영입되었고, 그의 제자 동안은 전진 왕조에서 크게 활약했다. 특히 부견구마라습을 데려오고자 여광에게 7만의 병사를 주어 쿠차를 정복하게 하였을 정도였다. 돈황에 석굴이 개착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구마라습은 후진 왕조에게 국사가 되어 3000명의 제자를 모아 불경 번역에 힘썼고, 그 결과 8년 동안 74부 384권을 번역하여 불교 교리를 중국에 소개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운강 및 용문 등지의 대석굴 조영이 모두 이민족 왕조 하에서 이뤄졌다는 것은 불교와 호족정권의 밀접성을 말해준다.
오호 · 북조 시대의 불교는 민중의 종교라기보다 황제의 종교였다. 운강석굴 가운데 '담요오굴(曇曜五窟)'로 알려진 대불들이 황제의 모습을 띤 것이라든지 북위 태무제와 북주의 무제시기 양차에 걸쳐 폐불이 단행된 것도 불교가 국가에 종속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황제는 당금의 여래”라고 인정한 북조 불교는 “사문은 왕자(王者)에게 경례하지 않아도 된다.”는 입장을 고수했던 남조 불교와는 달랐다. 특히 네 번에 걸쳐 삼보의 종이라 칭하며 사원에 자신의 몸을 위탁하였고 그때마다 신하들이 수억 전을 사원에 지불하고 황제를 다시 찾아와야 했던 양무제와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불교가 이 시대에 이르러서 성행하게 된 것은 난세의 지속과 민중의 아픔이라는 시대상과 연관이 있다. 그러나 도교와 비교할 때 역시 불교는 국가 또는 황제의 종교로서의 성격이 짙었다.

아육왕상

아육왕상.PNG

아육왕상은 일반적으로 인도 최초의 통일제국인 마우리아 왕조의 제3대왕인(재위 약 기원전 268-232년) 아쇼카왕, 즉 아육왕이 만든 석가모니상을 지칭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인도에서 불상은 1세기가 되어서야 출현했으므로, 아육왕상의 존재는 후대 불교도들이 만들어낸 전승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이후 아육왕상은 많은 고사를 생산하며 서상(瑞像)으로서 널리 숭배되었다.
아육왕상은 아육왕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중국에서는 4세기부터 아육왕상에 대한 전승이 성립되어 6세기까지 아육왕상 숭배가 매우 유행했다. 아육왕상의 최고조기는 위진남북조시대이다. 최근에는 사천성 성도에서 아육왕상 명문을 가진 남북조시대의 상들이 발견됨으로써 기록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위진남북조시대 아육왕상의 전승과 숭배>소현숙 참고하기

문화

-북조:북방적 성격잔존 (강건, 소박), 유교적 권위존속, 불교 발달, 황제 독재 정치 -남조:우아하고 화려한 귀족문화, 노장사상의 유행, 현실도피적 색채 (청담사상, 죽림 7현)

배경

귀족문화

-귀족문화의 개화

귀족의 문화가 활짝 꽃핀 곳은 강남이었지만 꽃망울을 터뜨린 것은 서진 시대였다. 이 시대 귀족 문화는 가치관의 다양성을 그 특징으로 한다. 후한 시대의 국교였던 유교 도덕을 계승하기도 하였지만 그 가치에 얽매이지 않았고, 유교의 형식적인 예교주의에 속박되었던 인간을 해방시키고 인간 본연의 진정성을 찾으려 했다. 기존의 가치와 질서를 떠나 어떤 것이든 자유롭게 논하는 청담(淸談)이 유행했다. 이 것이 후에 현학(玄學)으로 확립된다. 이런 사조는 죽림칠현(竹林七賢)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폭음과 마약 복용 등 기행을 서슴지 않았다. 또 서진 귀족들은 사치와 물욕에 몸을 맡겼다. 사치 풍조 속에 “돈은 신이다”라고 풍자한 『전신론(錢神論)』이 나온 것은 이런 배경에서였다.
강남 문화의 주역은 서진의 종실 사마예가 건강을 중심으로 동진을 세우면서 북에서 이주해온 명문 귀족들이었다. 청담의 풍조는 동진 · 남조에서 여전히 유행하였다. 귀족들은 유교를 명분만을 중시하는 ‘명교(名敎)’라 비판하였다. 속세를 등지고 자연과 합일하려는 탈속적인 사상은 문확과 예술 등과 결합하여 화려한 문화로 꽃피었다.
이 시대 문화는 시(時) · 서(書) · 화(畵)로 대표된다. 정치적 불안이 이어지던 난세와 산수가 수려한 강남이라는 자연환경은 「등지상루(登地上樓)」와 「초거군(草去郡)」을 지은 산수 시인 사령운, 「도화원기(桃花源記)」와 「귀거래사(歸去來辭)」로 유명한 전원시인 도연명 등 수많은 문인을 배출했다. 당시에 확립된 문장(산문)의 스타일인 4·6병려체는 대구를 구사하여 4구6구가 말이 함께 달리는 듯 균정과 화려함의 결정체였다. 이것은 고전에 대한 깊은 교양과 중국어 음조에 대한 예리한 감각이 합쳐져야만 나올 수 있는 문학사 상 가장 세련된 문체였다.
해서 · 행서 그리고 초서를 완벽한 예술로 완성시키고 「난정서(蘭亭序)」를 쓴 것으로 유명한 서성(書聖) 왕희지는 이 시대가 배출한 걸출한 예술가였다 .또 “형태의 신을 그려냈다‘고 일컬어지는 뛰어난 인물화 <여사잠도(女史箴圖)>를 그린 화성(畵聖) 고개지도 이 시대를 풍미한 사람이다.
이 시대는 문학과 예술이 하나의 장르로서 자각되고 확립된 시기였다. 글씨와 그림의 역사가 오래되었다고는 하나 이것이 예술로서 자각되고, 또 비평하기 위해 문론과 서론 · 화론이 행해져 하나의 장르로 독립된 것은 이 시대에 이르러서야 가능한 일이었다.
문장의 작법과 비평의 기준을 제시한 유협의 『문심조룡(文心雕龍)』과 한·위 시대 이래 시인의 작품을 상중하 3품으로 품평한 종영의 시품, 아름다운 문장을 가려 수록한 소통의 『문선(文選)』 등이 바로 이 시대에 나온 책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화론인 사혁의 『고화품록(古畵品錄)』에 보이듯이 예술 비평의 일환으로서 회화론과 회화사가 처음 본격적으로 저술되었던 시대였다. 회화는 이제 고대적인 세계관에 종속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로서 독립적인 의의를 갖는 것으로 취급되기 시작하였다.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조충지는 당시 수학의 수준으로는 극히 이례적으로 원주율을 정확하게 계산해냈다.
이처럼 문학과 예술이 하나의 장르로서 확립될 수 있었던 것은 사상의 자유라는 풍토 위에 여러 개성을 가진 교양인이 활동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이 시대의 귀족들은 현(玄) · 유(儒) · 문(文) · 사(史)를 겸수하는 것이 보통이었고, 넷 가운데 어느 하나에도 결코 치우치지 않았다.


주요 예술

알기쉬운 중국역사 : <<秦漢魏晉南北朝篇>>참고하기 도연명의 시 (귀거래사, 도화원가), 4-6변려체 (형식존중) 고개지의 <여사잠도> 불교:귀족과 국가의 보호 ,승려의 내왕-구파마습, 법현<불국기> 불교미술- 둔황, 윈강,룽먼의 석굴 사원 (간다라 미술의 영향)

도연명의 시

왕희지의 서체

고개지의 그림


참고문헌

  • <<아틀라스 중국사>>, 박한제 외 3인, 사계절 출판사,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