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진남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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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peccable13 (토론 | 기여)님의 2016년 5월 12일 (목) 00:12 판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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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개요

위진남북조는 동한 말의 건안년간(196-219)로부터 수(隨)나라 개황 9년(589) 진(陳)나라가 멸망한 시기까지 400년 동안을 말한다. 파일:위진남북조 연표.jpg


삼국시대

서진

동진

5호 16국 시대

남북조 시대

남조

북조

종교

- 민중과 황제의 종교, '불교' -

유교 사상은 국교로서 한 대를 풍미했으나, 위진남북조 시대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유일한 권위가 될 수 없었다. 노자 · 장 계보를 이은 도가 사상과 개인 구제를 기구하는 신앙이 합쳐져 도교가 확립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후한 초기의 실크로드를 타고 서방에서 유입한 불교 사상과 신앙이 비로소 중국인들에게 수용되기 시작했다. 유 · 불 · 도 삼교가 병립하여 인간 정신의 진폭을 크게 넓히자 이런 사상적 다양성 아래서 새롭고 더욱 확실한 가치가 모색되고 있었다.
확실한 교설도 없으며 제창한 교조도 없는 것이 특징인 도교는 내세보다 현생의 삶 자체에 기본적인 전제를 두고 욕구 추구를 근본적인 목적으로 삼고 있었다. 충실한 삶과 그러한 삶을 무한히 연장하려는 욕구를 신비적 실천이나 수양에 의하거나 혹은 초인간적인 힘에 의지하여 달성하려는 것이 바로 도교였다. 후한 말 장각(張角)의 태평도와 삼장(三張)의 오두미도에서 나름의 교법을 갖고 그것에 기초한 교단이 조직되었지만, 신도로서 일체감을 갖는 시기는 동진 말과 남북조 초가 되어서였다. 초기 도교 신도의 핵심 구성원은 유망 농민이거나 파산 또는 궁핍한 농민이었다. 도교는 한중 지역에서 종교왕국을 건설한 사천의 성한(成漢)정권에서 세력을 확대한 바 있고, 북위 시대 구겸지의 활약으로 불교 대신 국교의 지위를 차지한 적이 있으며, 남조 도교에서 보듯이 어용 · 관방화한 측면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반왕조적 · 민중적 성격의 종교였다.
불교가 본격적으로 중국에 정착하게 된 것은 서역과 관련이 깊은 유목민들이 화북을 지배한 오호십육국 시대부터였다. 불교는 호조군주들에게 화이론적 차별의 대상이 아니었다. 또한 초자연적인 힘으로 재난을 물리치고 전쟁에서도 예견 능력을 발휘하는 신이승(神異僧)은 그 시대 상황과 부합하여 특별한 존재로 부각되었다. 불도징이 후조 왕조에 영입되었고, 그의 제자 동안은 전진 왕조에서 크게 활약했다. 특히 부견구마라습을 데려오고자 여광에게 7만의 병사를 주어 쿠차를 정복하게 하였을 정도였다. 돈황에 석굴이 개착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구마라습은 후진 왕조에게 국사가 되어 3000명의 제자를 모아 불경 번역에 힘썼고, 그 결과 8년 동안 74부 384권을 번역하여 불교 교리를 중국에 소개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운강 및 용문 등지의 대석굴 조영이 모두 이민족 왕조 하에서 이뤄졌다는 것은 불교와 호족정권의 밀접성을 말해준다.
오호 · 북조 시대의 불교는 민중의 종교라기보다 황제의 종교였다. 운강석굴 가운데 '담요오굴(曇曜五窟)'로 알려진 대불들이 황제의 모습을 띤 것이라든지 북위 태무제와 북주의 무제시기 양차에 걸쳐 폐불이 단행된 것도 불교가 국가에 종속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황제는 당금의 여래”라고 인정한 북조 불교는 “사문은 왕자(王者)에게 경례하지 않아도 된다.”는 입장을 고수했던 남조 불교와는 달랐다. 특히 네 번에 걸쳐 삼보의 종이라 칭하며 사원에 자신의 몸을 위탁하였고 그때마다 신하들이 수억 전을 사원에 지불하고 황제를 다시 찾아와야 했던 양무제와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불교가 이 시대에 이르러서 성행하게 된 것은 난세의 지속과 민중의 아픔이라는 시대상과 연관이 있다. 그러나 도교와 비교할 때 역시 불교는 국가 또는 황제의 종교로서의 성격이 짙었다.

귀족의 시대

귀족제 실시

위진남북조, 특히 위진 · 남조 시대는 정치와 사회 체제로서 귀족제가 보편적이었다. 귀족은 당시 정치와 사회를 이끌어 가는 중심세력으로서 군주의 권력을 일정 정도 제약하여 서양 중세의 영주에 비견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러나 서양의 영주처럼 장원 등 경제력이나 군사력을 반드시 보유하고 있지는 않았으므로 문인 귀족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들 귀족계층은 외척과 환관의 정치개입에 반대하여 당쟁을 벌였던 후한 말 청류파에 그 사상적 원류를 두고 있다. 이들이 세습적인 지배세력으로 군림하게 된 것은 구품관인법(九品官人法)의 시행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왕·사 씨로 대표되는 북방 교민 귀족들은 강남 토착 호족인 주·장·고·육 씨 등과 협력하여 동진에서 귀족제를 부활시켰다. 동진 건국과정에서 공훈을 세운 왕씨는 “와과 사마가 함께 천하를 다스렸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그 세력이 대단했다. 이 말은 귀족세력이 군주의 권력을 제약했다는 측면도 있지만 국사에서 그만큼 책임감을 갖고 관여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송 이후 왕조에서는 낮은 가문 출신의 창업자가 계속 출현함에 따라 귀족과 군주는 별개로 움직였다. 귀족은 관직과 가문의 안전을 유지하는 데만 관심을 쏟을 뿐 국사에는 무관심했다. 귀족의 실무에 대한 무관심과 무능은 한문(寒門)·한인(寒人)들의 정치참여를 초래했고, 송·제·양·진은 한문들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게 되었다.
그 가운데 양 무제는 한문·한인과 귀족층을 결합한 통일적 관료체제를 지향하는 소위 천감개혁을 실시하여 지배층의 분열을 봉합하려 했다. 그 결과 ‘50년간 강남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태평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양 말에 일어난 후경의 난의 진압과정에서 남조 귀족의 무능함이 유감없이 드러났을 뿐만 아니라 귀족들이 대량 살육됨으로써 귀족제는 사실상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귀족문화의 개화

귀족의 문화가 활짝 꽃핀 곳은 강남이었지만 꽃망울을 터뜨린 것은 서진 시대였다. 이 시대 귀족 문화는 가치관의 다양성을 그 특징으로 한다. 후한 시대의 국교였던 유교 도덕을 계승하기도 하였지만 그 가치에 얽매이지 않았고, 유교의 형식적인 예교주의에 속박되었던 인간을 해방시키고 인간 본연의 진정성을 찾으려 했다. 기존의 가치와 질서를 떠나 어떤 것이든 자유롭게 논하는 청담(淸談)이 유행했다. 이 것이 후에 현학(玄學)으로 확립된다. 이런 사조는 죽림칠현(竹林七賢)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폭음과 마약 복용 등 기행을 서슴지 않았다. 또 서진 귀족들은 사치와 물욕에 몸을 맡겼다. 사치 풍조 속에 “돈은 신이다”라고 풍자한 『전신론(錢神論)』이 나온 것은 이런 배경에서였다.
강남 문화의 주역은 서진의 종실 사마예가 건강을 중심으로 동진을 세우면서 북에서 이주해온 명문 귀족들이었다. 청담의 풍조는 동진 · 남조에서 여전히 유행하였다. 귀족들은 유교를 명분만을 중시하는 ‘명교(名敎)’라 비판하였다. 속세를 등지고 자연과 합일하려는 탈속적인 사상은 문확과 예술 등과 결합하여 화려한 문화로 꽃피었다.
이 시대 문화는 시(時) · 서(書) · 화(畵)로 대표된다. 정치적 불안이 이어지던 난세와 산수가 수려한 강남이라는 자연환경은 「등지상루(登地上樓)」와 「초거군(草去郡)」을 지은 산수 시인 사령운, 「도화원기(桃花源記)」와 「귀거래사(歸去來辭)」로 유명한 전원시인 도연명 등 수많은 문인을 배출했다. 당시에 확립된 문장(산문)의 스타일인 4·6병려체는 대구를 구사하여 4구6구가 말이 함께 달리는 듯 균정과 화려함의 결정체였다. 이것은 고전에 대한 깊은 교양과 중국어 음조에 대한 예리한 감각이 합쳐져야만 나올 수 있는 문학사 상 가장 세련된 문체였다.
해서 · 행서 그리고 초서를 완벽한 예술로 완성시키고 「난정서(蘭亭序)」를 쓴 것으로 유명한 서성(書聖) 왕희지는 이 시대가 배출한 걸출한 예술가였다 .또 “형태의 신을 그려냈다‘고 일컬어지는 뛰어난 인물화 <여사잠도(女史箴圖)>를 그린 화성(畵聖) 고개지도 이 시대를 풍미한 사람이다.
이 시대는 문학과 예술이 하나의 장르로서 자각되고 확립된 시기였다. 글씨와 그림의 역사가 오래되었다고는 하나 이것이 예술로서 자각되고, 또 비평하기 위해 문론과 서론 · 화론이 행해져 하나의 장르로 독립된 것은 이 시대에 이르러서야 가능한 일이었다.
문장의 작법과 비평의 기준을 제시한 유협의 『문심조룡(文心雕龍)』과 한·위 시대 이래 시인의 작품을 상중하 3품으로 품평한 종영의 시품, 아름다운 문장을 가려 수록한 소통의 『문선(文選)』 등이 바로 이 시대에 나온 책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화론인 사혁의 『고화품록(古畵品錄)』에 보이듯이 예술 비평의 일환으로서 회화론과 회화사가 처음 본격적으로 저술되었던 시대였다. 회화는 이제 고대적인 세계관에 종속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로서 독립적인 의의를 갖는 것으로 취급되기 시작하였다.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조충지는 당시 수학의 수준으로는 극히 이례적으로 원주율을 정확하게 계산해냈다.
이처럼 문학과 예술이 하나의 장르로서 확립될 수 있었던 것은 사상의 자유라는 풍토 위에 여러 개성을 가진 교양인이 활동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이 시대의 귀족들은 현(玄) · 유(儒) · 문(文) · 사(史)를 겸수하는 것이 보통이었고, 넷 가운데 어느 하나에도 결코 치우치지 않았다.


참고문헌

  • <<아틀라스 중국사>>, 박한제 외 3인, 사계절 출판사,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