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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조: 1638년 [[홍타이지]]는 전족을 중죄로 다스리겠다는 조령을 반포하였고, 이후 [[순치]] 17년(1660)과 [[강희]] 3년(1664)에 거듭하여 포고령을 내렸다. 하지만 한족 민심의 반대에 부딪혀 청 정부는 전족을 용인하였고, 만주족들도 부분적으로나마 전족을 하기도 하였다.<br>  
 
*청조: 1638년 [[홍타이지]]는 전족을 중죄로 다스리겠다는 조령을 반포하였고, 이후 [[순치]] 17년(1660)과 [[강희]] 3년(1664)에 거듭하여 포고령을 내렸다. 하지만 한족 민심의 반대에 부딪혀 청 정부는 전족을 용인하였고, 만주족들도 부분적으로나마 전족을 하기도 하였다.<br>  
*청조 말: 중국에 개화의 바람이 불어오면서 전족금지운동인 [[천족운동(天足運動)]]이 추진되었으나 당시 사회 분위기 때문에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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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천국]]시기: 태평천국의 지도자 [[홍수전]]은 남녀 평등을 주장하며, 여인들의 정상적인 발 또한 주장하였다. 태평군이 [[남경]]에 진입하자 그는 전족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리고, 위반하는 자는 사형에 처하여 당시 태평군이 진압한 곳에서는 확실히 전족을 엄금했다. 하지만 전족을 철저하게 금할 수는 없었다.<br>
*[[무술개혁운동(1898)]]: 지도자였던 [[강유위]][[(캉유웨이)]]와 [[양계초]]가 [[부전족회]](不纏足會:전족 안하기 모임)를 만들고 전족 반대를 제창하였다. 이후 [[위안스카이]]와 [[장지동]]을 비롯한 당시의 실력자들도 전족반대 진영에 가담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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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술개혁운동]] 시기: 지도자였던 [[강유위]]와 [[양계초]]가 [[부전족회]](不纏足會:전족 안하기 모임)를 만들고 [[천족운동]]을 제창하였다. 이후 [[위안스카이]]와 [[장지동]]을 비롯한 당시의 실력자들도 전족반대 진영에 가담하였다.<br>
 
*[[5.4운동]](1919): 5.4운동 이후 젊은 지식인 사이에는 전족여성과 결혼하는 것을 수치로 인식하는 풍조가 생겨났다.<br>
 
*[[5.4운동]](1919): 5.4운동 이후 젊은 지식인 사이에는 전족여성과 결혼하는 것을 수치로 인식하는 풍조가 생겨났다.<br>
 
*[[중화민국]] 시기: 여성해방운동의 일환으로 엄격히 금지되었으나, 산간 농촌지역을 중심으로 암암리에 진행되었다.<br>
 
*[[중화민국]] 시기: 여성해방운동의 일환으로 엄격히 금지되었으나, 산간 농촌지역을 중심으로 암암리에 진행되었다.<br>

2016년 6월 22일 (수) 21:31 판

개요

전족(缠足,纏足,chánzú)은 중국에서 발을 인위적으로 작게 만들기 위해 어린 여자아이의 발을 천 등으로 묶던 풍습을 뜻한다.

전족1.jpg
전족한 여성의 발.jpeg


오대(五代)부터 민국(民國)시기까지 거의 1000여년동안 지속되었다.

아래의 링크에서는 미국의 사진작가가 찍은 중국 여인들의 전족한 발을 더 상세히 볼 수 있다.
http://www.huffingtonpost.kr/2014/06/15/story_n_5497725.html
https://www.kickstarter.com/projects/livinghistory/living-history-bound-feet-women-of-china

전족의 기원

전족은 남북조, 과 오대시기를 기원으로 보는 설이 있지만, 송대에 전족이 이미 유행하고 있었던 사실로 볼 때, 오대에 시작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송말의 자료에 따르면 오대십국시기 남당의 후주 이욱의 궁정에서 이습은 충에 능한 그의 빈의 발을 비단으로 묶고 발끝을 뾰족하게 만들어 금련 즉, 황금으로 만든 연꽃 위에서 춤을 추게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발이 아름답다고 소문이 나서 궁중과 상류층의 여성들이 흉내 내기 시작했고, 이로부터 전족의 풍습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욱은 빈을 보며 "비단으로 발을 감싸 언뜻 곱게 구부리니 갓 나온 달 같구나"라고 하였다고 한다.

전족 전파 과정

<오대(五代) 및 북송대: 제한적 전파>

전족은 오대(五代)에 출현하였지만, 궁정의 일부 무녀와 후궁만이 전족을 행했을 뿐이었다. 그러다 전족이 궁정내 일부 특수계층의 고립된 행위에서 벗어나 민간에 유포되기 시작한 것은 북송 말기인 12세기부터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동경(東京) 개봉(開封)의 지배계층 부녀자들이 전족의 유행을 주도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그 풍조가 점차 지방의 도시로, 그리고 여타 사대부층으로 확산되어갔다.

<남송대: 지역적 전파>

남송시대에 이르러서 전족은 더 유행하여서, 북방의 상층 부녀자들에게만 국한되었던 것이 남방으로 전해지고, 더 나아가서는 남송치하의 모든 지역에 파급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만해도 전족은 궁중 여인들이나 기생들에게만 보편적이었을 뿐, 여전히 모든 계층에 보편적이지는 않았다.

<원대: 상류층 보편화>

다음 시대인 대에는 전족이 사대부층 전반의 보편적인 풍조로 자리잡게 되었다. 『철경록』에서는 "사람마다 전족을 하여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부끄러워했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원대에 전족이 지배계층의 일반적 풍속으로 정착되었음을 시사한다.

<명청대: 전 계층 보편화>

명청대에 전족은 지배계층의 범위를 벗어나 일반민중에까지 확산되었다. 한족은 물론이고 서북, 서남의 소수민족들까지 전족을 채택하였다. 을 몰아내고 을 세워 중국을 지배했던 만주족은 수차례에 걸쳐 전족을 폐지하고자 하였으나 결국 민간의 압도적인 풍조를 막아내지 못했고, 급기야 만주족들도 전족을 채용하기에 이른다.


전족의 방법

전족과정.jpg


전족은 보통 아이가 걸을 수 있는 나이인 4~5살 때 시작한다. 그러나 전족하기 전에 아이의 발이 자라지 못하도록 발에 꼭 끼는 신발을 신겨서 자연스럽게 성장하지 못하도록 한다. 전족할 때는 길이가 7~8척, 폭이 3~3.5치되는 무명천(쉽게 느슨해지는 비단과 같은 천은 사용하지 않는다), 바늘과 실, 가위, 더운물, 명반(지혈제) 등이 준비되어야한다.

<전족의 과정>

  1. 전족할 아이의 발을 더운물로 씻고, 발톱을 깎는다.
  2. 아이를 의자에 앉히고 발을 전족을 해주는 사람의 다리위에 올려 놓는다.
  3. 발가락 사이마다 명반을 발라 화농이나 염증이 발생하는 것을 방지한다.
  4. 일반적으로 오른 발부터 묶기 시작하는데, 엄지발가락을 제외한 나머지 발가락을 아래로 눌러 굽혀서 발바닥 밑에 들어가도록 묶는다.
  5. 발의 바깥쪽 뼈를 묶어 아래로 집어 넣어 발이 가늘고 마르게 만든다.
  6. 발을 짧고 활처럼 굽도록 묶는다. 이 때 발바닥 중심이 오목하게 들어가고 발등이 솟아오르도록 모양을 낸다.
  7. 바느질로 기워 천을 단단히 고정시킨다.

https://www.youtube.com/watch?v=OXvs5OnlL8w
위의 링크에서 전족과정을 담은 동영상을 볼 수 있다.

<전족 후의 과정>

전족을 하고 나서는 사흘에 한 번 씩은 발을 풀어 소독을 하고 발바닥에 난 티눈을 침으로 빼준다. 그리고 전족 띠를 더욱 조여서 발을 묶는다. 천을 교환하는 동작은 빨라야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피가 솟구쳐 심한 고통을 당하기 때문이다. 반년 이상의 시간이 지나면 발 가운데의 뼈를 발바닥 밑에 오그려 넣어 발등이 위로 올라가고 발이 작아지도록 만든다. 발허리가 꺾어질 즈음이면 하루걸로 한번 씻고 매번 힘주어 꺾는다. 살을 짓무르게 하기 위해 고의로 전족 천안에 돌 부스러기, 기와조각, 도자기 파편을 집어 넣어 상처를 내기도 한다. 잠잘 때는 발 아래 물건을 놓아 피가 거꾸로 흐르도록 해서 발 부위의 혈액순환을 둔화 시킨다. 시간이 지나면 발의 근육이 수축되고 발등이 굳었던 피부가 벗겨지고 썩은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면서 작은 발이 된다. 이 과정은 대략 2년 정도 걸린다.

<전족 후 유의점>

전족한 발은 냄새제거와 혈액순환, 굳은살을 없애주기 위해 자주 씻어주어야 한다. 발 닦는 물에 향료를 타기도 한다.
그리고 전족 후에는 발이 아무리 아파도 걸어야한다. 그래야만 전족이 완성한 후에 걷지 못하는 비극을 막을 수 있다.


전족의 여러 상징

전족그림.jpg

<중국인과 작은 발>

중국인들은 예부터 작은 발을 미의 잣대로 삼았고, 작은 발을 가진 여자가 걷는 것을 보면서 우아하고 매력적이라고 여겼다. 이러한 심미관이 동한 말기의 민요 《공작동남비(孔雀東南飛)》에서도 보이는 것을 보면 이와 같은 관념은이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성(性)적 상징>

중국에서 여성의 발은 남편이 아니면 접촉할 수도 살펴볼 수도 없는 신체부위였다. 특히 맨발을 외간남자에게 보인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어서, 가슴이나 엉덩이를 만지는 행위보다도 금기시되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전족한 발은 신체의 그 어느 부위보다도 가장 은밀한 부분이자 성적 매력의 결집체로 이해되었다.
이외에도 전족을 하게 되면 보행시 보폭이 줄게 되어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걷게 되는데, 이 모습이 성적 매력으로 비추어졌다는 설명도 있으며, 이러한 보행 습관으로 인해 엉덩이와 생식기의 근육이 발달하게 되어 성적 쾌감이 높아졌다는 설명도 있다.
전족을 페티시즘의 일부로 보는 관점도 존재하는데, 여성의 몸을 의도적으로 훼손시킨 전족이 성행위의 상징이 되어 전족에 대한 더 심한 집착을 불러왔다는 것이다. 전족 특유의 부패하는 냄새가 남성들의 페티시즘을 자극시켰다는 설명도 존재한다.

<종교적 상징>

종교적 의미로서의 전족 풍습은 중국의 봉건 사상인 음양가(陰陽家)유교 그리고 불교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음양이론의 핵심적 관념 중 하나는 이원론적 인식이다. 남성과 밝음과 뜨거움, 적극성 등이 양(陽)이라면, 여성과 어두움, 차가움, 소극성은 음(陰)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적이고 소극적인 음에 속하는 여성을 더욱 음에 가깝게 해주는 것이 전족이였던 것이다.
유교의 가부장제 아래에서 여성은 수동적이고 복종적이어야 했는데, 전족은 이러한 제도와 꼭 맞는 의식이었다.
전족을 금련(金蓮)이라고 칭하는 것은 불교의 영향으로 볼 수 있는데, 맨발로 서 있는 관음보살상 등에서 보여지는 연꽃의 이미지를 여성 전족에 대입시켜 전족을 연꽃처럼 고결하고 진귀한 것으로 여기게 하는 의미를 부여했다.
전족은 여성들에게 종교적 측면에서도 숙명적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종교는 전족을 미화하고 지속하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심리적 신분상승과 전족>

전족은 본래 상층신분을 중심으로 행해졌다. 전족을 하게되면 여성은 그 순간부터 활동력이나 노동력을 거의 상실하여 자기 발로 갈 수 있는 거리는 자연히 제한되었고, 먼 거리를 가야할 때는 반드시 남의 도움에 의존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족은 특별한 노동을 하지 않는 상류층에서만 가능했다. 하층신분의 여성들은 상류층의 특권이었던 전족을 부러워했고, 이후 전족이 전 계층에 확산되면서 '전족을 하지 않는 것'은 창피하고 수치스러운 것이 되었다.

전족금지와 여성해방

<전족 금지과정>

  • 청조: 1638년 홍타이지는 전족을 중죄로 다스리겠다는 조령을 반포하였고, 이후 순치 17년(1660)과 강희 3년(1664)에 거듭하여 포고령을 내렸다. 하지만 한족 민심의 반대에 부딪혀 청 정부는 전족을 용인하였고, 만주족들도 부분적으로나마 전족을 하기도 하였다.
  • 태평천국시기: 태평천국의 지도자 홍수전은 남녀 평등을 주장하며, 여인들의 정상적인 발 또한 주장하였다. 태평군이 남경에 진입하자 그는 전족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리고, 위반하는 자는 사형에 처하여 당시 태평군이 진압한 곳에서는 확실히 전족을 엄금했다. 하지만 전족을 철저하게 금할 수는 없었다.
  • 무술개혁운동 시기: 지도자였던 강유위양계초부전족회(不纏足會:전족 안하기 모임)를 만들고 천족운동을 제창하였다. 이후 위안스카이장지동을 비롯한 당시의 실력자들도 전족반대 진영에 가담하였다.
  • 5.4운동(1919): 5.4운동 이후 젊은 지식인 사이에는 전족여성과 결혼하는 것을 수치로 인식하는 풍조가 생겨났다.
  • 중화민국 시기: 여성해방운동의 일환으로 엄격히 금지되었으나, 산간 농촌지역을 중심으로 암암리에 진행되었다.
  • 중화인민공화국 시기: 전족금지법령으로 완벽히 없어지게 되었다.

전족을 보는 또 다른 시각

  • 高彦颐: "당대의 여성들에게 전족은 하나의 특권이었다. 그들에게 전족은 바깥세상이 정한 신분적 지위나 '바람직함(可欲性)'이었을 뿐만 아니라, 자존의 구체적인 표현이었다."

참고문헌

  1. 박은희, 윤미영, "중국 근대의 전족폐지론과 국가주의", 『退溪學論叢 第23輯』: 143-176쪽
  2. 이근명, "중국여성의 슬픔-전족의 역사", 『국제지역연구』, 1999, 3(3) : 197-216쪽
  3. 박지훈, "纏足 : 중국역사 속의 畸形문화", 『시민인문학 21호』, 2011 : 172-201쪽
  4. 정기성, 김민자, "전족과 코르셋에 표현된 몸의 억압에 대한 의미해석", 『한국복식학회지』, 61(156), 2011 : 35-50쪽
  5. 차은진, 박민여, "纏足의 상징적 의미", 『한국의류학회지』, 2001, 8(25) : 1398-1407쪽
  6. 소황옥, "중국 전족(纏足)의 미학적 연구",『한복문화』, 2006, 9 : 107-116쪽
  7. 엄영욱, "중국문학에 나타난 성:전족을 중심으로", 『문예연구』, 2004, 11(43) : 51-68쪽
  8. 신수용, "中國 纏足에 關한 史的 考察", 국민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6
  9. 刘 怡, "她们的身体记得的历史——评高彦颐《缠足:“金莲崇拜”盛极而衰的演变》", 『妇女研究论丛』, 2011, 2(104)